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 터키에서 본 문명, 전쟁 그리고 역사 이야기
조윤수 지음 / 렛츠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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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접종을 했을 즈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소아시아사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책은 예상외로 불친절했다. 해당 유적지를 방문한다면, 방문지에 대한 지도를 친절하게 제시해야했다. 그러나, 불친절한 커다란 지도를 한장 제시할 뿐, 해당 유적지가 터키의 어느 부분에 위치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인터넷에 신세를 져야했다. 가볍게 읽을 수는 있지만, 불친절한 자료제시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한가지 위로라면, 조윤수 대사가 제시한 사진 자료를 통해서 미처 알지 못한 소아시아의 다양한 유물 유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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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시간 - 아픔과 진실 말하지 못한 생각
조국 지음 / 한길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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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는 금기가 있다. 예전에는 색깔론에 대해서 맞서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색깔론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가 되자,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시각이 금기가 되었다. 고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박원순 시장을 옹호하는 발언 자체자 금기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금기가 생겨났다. 조국을 옹호하는 발언 자체가 금기가 되었다. 조국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나도 숨죽였다. 이 사회의 금기를 깰 용기가 없었다. 단지 조국 교숙가 쓴 '조국의 시간'을 구입하며 '나는 조국을 지지한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조국 가족을 멸문지화의 위기로 몰아 넣은자가 야권의 강력한 대권후보가 되었다. 그의 민낯을 드러내는 연속된 실언과 망언이 계속되면서 다시 조국을 떠올렸다. 이제 '조국의 시간'을 읽을 용기가 생겨났다. 조국이 하고 싶었던 말! 내가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 우리 모두가 가슴속에 새겨 들어야하는 말들을 이제 읽어보자.


검찰개혁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꿈이었다. 정치 보복의 칼날 앞에서 쓰러져야만 했던 바보 노무현을 떠나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그중에 나도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그의 운구행렬을 바라보며, 투표로 복수하자고 외쳤다. 그러나 박근혜가 정권을 재창출하면서 투표로 복수하자는 외침은 이뤄지지 않았다.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권이 탄생하면서 비로서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 박영수 특권은 칼날을 휘둘렀다. 정의가 바로 선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박영수 특검에서 활약하던 윤석렬이 검찰총장이 되면서 정의로운 세상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그 가시밭길을 조국일가는 온 몸으로 걸어야했다.

국감장에서 '혹시 조직을 사랑합니까'라는 질문에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혹시 사람에게 충성하는거 아니에요'라는 질문이 이어지자,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여기서 조직이 검찰이라는 사실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보수 정치인에 대해서는 사정의 칼날을 감추고, 조국을 비롯한 진보진영에게는 '인디언 기우제'식의 수사가 이뤄졌다. 그 가시밭길 속에서 수구 언론이 나팔수 역할을 했다. 언론의 무차별적 조국 비난보도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S대를 비롯한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조국을 비난하는 시위에 참석했다. 그들의 논리는 '공정'이었다. 진보지식인이 사회적 특권을 이용해서 자녀를 명문대에 진학시켰고, 이것이 공정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그래, 명문대를 진학하지 못한 이땅의 흑수저들은 그러한 비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명문대생은 조국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진학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그 시절에는 부모를 통한 체험학습과 봉사활동이 대부분 이뤄졌다한다. 조국만이 아니고, 강남만의 일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학습과 봉사활동의 폐해로 인해서 체험학습이 생기부에서 삭제되고, 해외봉사활동이 입력불가가되었다. 서울지역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 중에서도 부모의 인간관계를 이용한 체험학습과 봉사활동이 조국가족 이외에는 없었을까? 입시현실에 무지한 기자, 혹은 한쪽눈만 뜬 기레기들이 조국을 천하의 범죄자로 만들었다. 진보인사에게만 가혹한 도덕의 칼날에 무슨말을 할 수 있을까?

부유한 집안의 서울대학교 교수인 조국! 그가 시류에 영합하여 편히 살려했다면 그의 가족은 영화를 누리며 달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검찰 개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을까?


  "검찰개혁은 학자와 지식인으로서 제 필생의 사명이었고, 오랜 동안 고민하고 추구해왔던 목표였습니다."-265쪽

  "상설조직과 자체수사 인력을 갖춘 공수처가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MB는 대선전, 적어도 취임전 기소되었을 것이다."-117쪽


조국은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 이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검찰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기초한 수사구조 개혁!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조국은 가족을 희생양으로 내 놓아야했다.

언론 검찰, 보수시민들의 조리돌림 속에서도 그는 죽지않았다. 살아서 우리에게 왔다. 사실 조국 사태 속에서 조국이 제2의 노무현이나, 제2의 노회찬이 되지 않기를 바랬다. 제발 그가 살아서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고대했다.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을 공부하면서, '생존이 최고의 투쟁인 시기'라는 표현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랬다. 조국에게 이 시간은 생존이 가장 큰 투쟁의 성과였다. 그가 살아서 '조국의 시간'을 썼다. 그의 고민을 시민과 공유하며,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되새긴다. 조국! 살아 돌아와서 고마워요!

조국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조형근 선생의 말을 해주고 싶다. 


  "위선이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

  "위선은 역겹지만 위선마져 사라진 세상은 야만이다."-359쪽


조국은 강남의 금수저인 자신이 진보 지식인으로 활약하면서도, 기득권을 버리지 못한점을 이 책에서 반성한다. 일부 시민들은 기득권을 버리고 도덕군자처럼 조국이 살길 바랬나보다. 이들은 너무도 순진하다. 현실에서는 절대 선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속세를 버리고 산사로 들어가 홀로살아간다한들, 어찌 때가 묻지 않겠는가? 고려시대 사찰에서도 국왕을 따르는 승려와 문벌귀족을 따르는 승려 사이의 다툼이 있었다. 

단지 우리는 옷에 구정물이 튀어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떳떳하게 살아가려 노력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의 유혹에 고뇌하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이다. 그러나, 우린 염치가 있고, 부끄러움을 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국민을 개, 돼지로 보는 세력과는 엄연히 다르다. 우리의 옷에 구정물이 묻었다고 우리를 버리고 국민을 개, 돼지로 보는 세력을 선택한다면, 결론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조국은 재기할 수 있을까? 15년전, 공개 강좌에서 한 시민이 "'조국이 대통령감이다.' 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대통령에 도전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라고 질문했다. 그때, 조국 교수는 자신은 그럴 마음이 없다고 겸손해했다. 겸손한 사람,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 약자를 보듬어주려는 사람! 그 사람이 조국이다. 조국에게는 할일이 남아있다. 조국이 가족을 제물삼으며 공수처의 출발을 고대했지만, 공수처에 걸었던 기대는 실망으로 되돌아 오고 있다. 염치없지만, 조국에게 다시 정치로 뛰어들기를 부탁해야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조국이 복권되어 다시 이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길 바란다. 박근혜 처럼 대통령의 사면령이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서 깊은 탄식이 터져나온다. 조국! 그는 언제쯤 복권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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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0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22-01-13 16:16   좋아요 1 | URL
그때를 떠올리며 읽었더니 금새 다읽었습니다.
로스쿨가는 따님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겠네요.

성은이감사 2022-07-19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석열이 조직에 충성한다고는 증언한적은 없지요. 사랑합니까 물으니 예라 답 했을뿐. 본인의 기억왜곡은 좀 빼주세요

강나루 2022-07-20 04:15   좋아요 0 | URL
사람의 기억에 부분적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 확인하고 급히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 그들만의 사랑법을 발명한 연인들의 역사
김형민 지음 / 어마마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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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발명을 할 수있을까?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라는 쌕시한 제목의 책을 팟캐스트'내일을 여는 역사'를 통해서 처음 들었을 때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질문이다. '발명'이란 없었던 것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부터 이미 있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사랑은 발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에는 다양한 사랑이 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커플들 숫자 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이 있고,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때마다 새로운 사랑이 발명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에 실린 30편의 사랑 이야기 중에서 인상 깊은 발명된 사랑을 살펴보자.


1. 상처 받은 영혼의 사랑

'24시간 돌아다닌다'라는 말을 할 때, '제 이사도라야'라는 말을 흔히들 한다. 이사도라 던컨은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수많은 남성들을 만나서 세상을 헤메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아이를 자동차 사고로 저 세상에 먼저 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남성은 자신의 자녀를 닮은 예세닌이었다. 이사도라 던컨보다 18살이나 어린 남성과 사랑에 빠진 것은 그를 통해서 자녀를 만나고 싶은 이사도라 던컨의 어긋난 사랑 때문이다. 그 어긋난 사랑은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예세닌은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정신병원에 갖히는 신세가 되었고, 예세닌은 동맥을 끊는다. 

이사도라 던컨은 왜? 한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했으며, 진정으로 사랑한 남성을 비극으로 보내야했을까? 여러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교육학과 심리학을 배운 나로서는 그녀의 어린시절의 비극을 원인으로 말하고 싶다. 프로파일러 배상훈 교수와 철학자 강신주는 어린시절이 불행한 사람은 행복해 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한다고 말한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싫었고, 술주정뱅이 남편이 싫어서 이혼했는데, 재혼한 남성이 술주정뱅이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어려서 불행한 사람은 그 불행에 익숙해져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을 불러들인다. 이사도라 던컨은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아버지 밑에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했다. 불행한 어린 시절에 갖혀서, 결혼을 한다하더라도 이혼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한남자의 여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남성을 선택하는 정면대결 보다는 남성이 자신을 버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남성을 버리는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자녀를 저 세상에 보내고 나서는, 자녀에게 해주지 못한 사랑을 예세린에게 쏟아붓는 잘못된 사랑을 한다. 

교육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아버지로서의 삶의 무게를 알았다. 오늘 우리 부부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우리 자녀의 미래 행복을 결정한다. 한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바람둥이들은 진정한 사랑을 부모로 부터 받지 못한, 사랑에 고픈 자들이었다.


2. 가면을 사랑하는 사람.

TV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연예인을 할머니들이 꾸짖고 욕하는 경우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속의 배우가 실제 삶에서도 그러한 삶을 살아갈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과 배우가 만난다면, 그들은 행복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만인의 여인 오드리 헵번은 은막위의 화려한 삶보다는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랬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녀가 히틀러를 피해서 미국에 정착했고, 헐리우드의 영화 산업은 그녀를 은막위의 화려한 스타로 만들었다. 평범한 어머니로서, 아내로 살길 바랬던 그녀와는 달리, 그녀의 남편 안드레아 도티는 그녀가 현실에서도 은막위의 화려한 삶을 살기를 바랬다. 오드리 헵번이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평범한 스위트홈을 꿈꾸자, 안드레아 도티는 바람을 피운다. 결국 그녀의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이한다. 어쩌면 그녀가 영화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행복했을 수도 있었다.

만인의 여인 오드리 헵번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러한 불행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켰다는데 있다. 그녀는 유니세프의 대사로 활동하면서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녀의 뜻을 이어받아 '오드리 헵번 재단'은 세월호에서 꺼져간 생명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기억의 숲'을 조성했다.

현실에서 만난 남자들은 오드리 헵번의 가면을 사랑했다. 오드리 헵번은 영화속 가면을 벗고 진정한 사랑을 원했다. 오드리 헵번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소망을 인류애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인류애는 우리의 세월호 아이들에게도 전해졌다. 


3. 동지와 연인의 사랑.

부부이지만, 삶의 가치관이 달라서 갈등을 겪는 부부가 많다. 사랑할 때는 안보이던 것이 결혼하고 나서는 보이기 시작해서 갈등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책에 소개된 문익환과 박용길, 이수자와 윤이상, 김병곤과 박문숙, 임화와 지하련의 사랑은 사랑하는 존재이면서 같은 길을 가는 동지의 사랑이야기이다. 

동지와 연인의 삶을 살았던 연인 중에서 김병곤과 박문숙의 사랑이 나의 가슴을 울렸다.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재판장에서,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패기를 보인 김병곤의 뒤에는 박문숙이라는 철의 여인이 있었다. "군부독재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군부 독재에 맞서서 민주화 투쟁을 하는 남편을 위해서 옥바라지를 하는 것은 기본이요. 자녀들을 키우고, 가족이 없는 민주화 투사의 옥바라지까지했다. 결국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두 딸과 아내를 남기고 저세상으로 간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여기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가 여기에서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한들, 그 누가 그녀를 나무라겠는가?

김희숙은 다시 일어선다. 생활협동조합운동 간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사료관장, 녹색환경운동 이사장을 맡으면서 남편이 이루지 못한 일들을 이루어갔다. 결국, 그녀도 위암으로 남편의 뒤를 따라간다. 

셍떽쥐베리가 부부는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이다. 라는 말을 했다. 김병곤과 박문숙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사랑을 이어온 존재이다. 두사람의 사랑은 이번생에서도 다음생에서도 이어지지 않을까?


4. 집착과 아집의 사랑.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의 사랑은 건강한 사랑이었을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짐승과도 같은 헬렌 켈러를 헌신적인 설리번 선생님이 가르쳐서 장애를 이겨냈다는 감동적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설리번 선생님을 진정한 참스승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저자 김형민은 설리번 선생님이 고아였다는 사실과 헬렌 켈러의 가정교사를 하면서 비로소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실 헬렌 켈러가 홀로 설수 있는 길을 설리번 선생님이 막아섰다. 그것은 헬렌 켈러의 사랑을 설리번이 가로막은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설리번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피터라는 남성과 헬렌 켈러는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장님이 자녀를 낳아 기를 수 없다는 선입견에 헬렌 켈러의 어머니와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 켈러의 사랑을 가로 막는다. 결국, 헬렌 켈러는 사랑을 떠나 보내야했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 켈러가 홀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 결국, 헬렌 켈러는 설리번 선생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니체는 "아직도 나의 제자로 남아있는 제자보다 더 나쁜 제자는 없다."라는 말을 했다. 임제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라고 했다.(살불살조(殺佛殺祖)) 니체와 임제 스님이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 무엇이겠는가! 제자는 스승을 뛰어 넘어야만 스승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의 제자로 남아있으려는 제자를 질타했으며, 임제스님은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라고 했다. 그런데, 설리번 선생님은 제자가 떠나갈 것을 두려워했다. 제자가 자신을 뛰어 넘을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결국, 헬렌 켈러가 행복해지는 길을 가로막았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려해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설리번 선생님은 알지 못했다. 


'사랑고 발명이 되나요?'라는 책에는 가슴 시린 사랑이야기가 많이 실려있다. 물이 차오르는 타이타닉호에서 노부부가 두손을 꼭잡고 서로를 위로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서부터, 방사능 덩어리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남편의 붕대를 갈아주며 입술을 맞추는 아내의 이야기까지, 너무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다.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사랑이야기를 감상하며, 나는 어떠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는 어떠한 반려자로 기억되고 있는지 반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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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칠서 육도.삼략 문화문고 22
성백효 옮김 / 전통문화연구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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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기본은 무엇일까? 나는 적을 속이는 '궤도(詭道)'라고 생각했다. 손자병법에 전쟁은 속이는 것이라하지 않았던가! 그러했기에, 대학시절,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구체적인 속이는 방법 즉, 궤도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기에 실망을 많이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다양한 책략과 적을 속이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손빈병법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손빈병법에는 구체적인 진법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적을 속이는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사회에 나와서 여러 책들을 읽으며 나의 견문과 식견을 넓혔다. 그러던중 만난 것이 바로 '36계'라는 병법서이다. 이 책은 내가 바라던 적을 속이고 전쟁에서 이기는 구체적인 방법 36가지가 제시되었다. 재미있게 36계를 읽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온갖 권모술수로 적을 이길 수 있다면, 조조가 삼국을 통일해야했다. 그러나, 조조의 자손이 세운 위나라도 결국은 사마씨의 진나라에 멸망하고, 진에 의해서 삼국이 통일되지 않았던가! 

  병법서에 대한 나의 갈증은 조선시대, 무과 시험교재였던 무경칠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 책들 중에서 '육도 삼략'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태공망과 문왕, 무왕과의 대화를 적은 육도와, 태공망의 저서로 알려져 있는 삼략을 읽어본다면, 36계를 읽으며 느꼈던 허전함을 채우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이들었다. 

  '육도삼략'은 보통의 병법서와는 달랐다. 손자병법이 전쟁과 전략, 전술의 원리를 적어 놓았고, 손빈병법이 진법에 대해서 적어 놓았으며, 36계가 전쟁의 계책에 대해서 서술했다면, '육도삼략'은 치국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육도에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으로 부터 방어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있다. 그렇지만, '육도 삼략'에는 다른 병법서에는 나와 있지않은 치국의 도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되어있다. 육도의 문도와 무도, 삼략의 대부분의 내용이 치국의 내용이다. 한번 그 자세한 내요을 살펴보자.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바로 천하 사람들의 천하이니, 천하의 이로움을 함께하는 군주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로움을 독차지하는 군주는 천하를 잃습니다."-21쪽


  지금으로부터 3천년전, 이미 군주 독재를 경계해는 내용이 병법서에 쓰여져있다. 군주 혼자서 독재를 하지 말라는 이러한 내용은 현대의 정치가들도 귀를 귀울여야하는 내용이다. 그뿐이아니다. 군주의 사치와 향략을 경계하기도 한다. 


  "요임금이 (중략) 궁궐의 담과 지붕과 방을 곱게 칠하여 꾸미지않고 (중략) 띠풀과 찔래가 들에 가득하였으나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사슴 갖옷으로 추위를 막고 삼베옷으로 몸을 가리며, 겇친 좁쌀로 밥을 지어먹고 머위와 콩잎으로 국을 끌였으니"-23쪽


 위의 글은 요임금 시기가 신석기 시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시대상을 끌여들여, 청동기 시대인 주나라의 현실에 대입한, 무리한 주장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군주의 사치와 향략을 경계했다는 점에서 자못 놀라운 내용이 병법서에 적혀있다는 점은 분명히다. 

  지도자의 검소함에 이어서, 임금과 장수의 솔선 수범을 강조한 내용도 있다. 


  "장수가 진흙길을 갈때 먼저 수레에서 내려 걷고, 병사들이 모두 막사를 정해야 비로소 박사에 나아가고 병사들의 밥이 모두 지어져야 비로소 밥을 먹고"-75쪽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노빌레스오빌리쥐'를 강조하는 글이다. 눈이 많이 오던 겨울철에,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던적이있다. 그때 신문에 미국의 경우, 고위 군간부가 출근해서 상황을 파악하고 병사들은 쉬게하는데 반해서, 한국의 고위 군간부들은 집에서 쉬면서 병사들이 모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한다는 글이 보도된적이 있다. 고대의 병법서 '육도 삼략'에 따른다면, 우리의 군대는 지휘관들이 제대로 대처를 하고 있지 못한 경우이다. 


  어떠한가! '육도삼략'이 단순한 병법서로 보이는가? 육도 상당부분과 삼략의 대부분의 내용이 국내정치를 안정시키고 상대 국가를 어지럽게하는 방법을 제시한 치국의 책이다. 태공망은 알았던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가장 중요한 기본은 국내 정치를 바로잡아 안정시키는 것이다. 백성을 보살피고, 장군과 경대부, 그리고 왕이 스스로 솔선수범하며 바른 행동을 할때, 정치는 안정된다. 정치가 안정되어야,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야 국가 경제가 좋아진다. 국가 경제가 좋아져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전체주의 국가 일본이 패망하고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적이 이유는 바로 국내 정치의 안정에 있었던 것이다.!! '육도삼략'은 단순히 적을 속이는 방법을 알려주는 병법서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도를 알려주는 통치술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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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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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탄생하는 것일까? 호치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을 찌라도, 호치민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을 떠올리며, 호치민은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왜? 그 과업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베트남을 부러워했다. 호치민에 대한 제대로된 서적을 서가에서 찾아보았다. 900페이지라는 묵직한 벽돌책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내가 구할 수 있는 제대로된 호치민 평전은 미국인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유일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벽돌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어떻게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그는 만들어진 존재일까? 탄생한 존재일까?

 

1. 호치민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공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이다. 베트남의 적국 출신인 그는 역사학자가 되어 호치민을 연구했다. 아무리 객관적인 시선으로 호치민을 바라본다하더라도, 그가 베트남의 적극 출신이며,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으며, 강대국의 시선으로 쓰여진 구절들이 못내 아쉬웠다.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에필로그는 '신화에서 인간으로'라는 주제로 쓰여 있다.

윌리엄 J. 듀이커의 한계를 느끼게 만든 구절들은 여러 곳이 있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하다보니, 정작 호치민을 1인칭 시점에서 살펴보는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성을 강조하다보니, 호치민의 내면을 서술하지 못한 셈이다. 호치민이 쓴 자서전 또한 1차 사료로서 비중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윌리엄 J. 듀이커의 거리두기의 결과였다.

그래, 역사학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픈, 그의 노력이라고 넘어가자며 위안을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 투쟁한 베트남의 애국자 판보이차우를 "반역자"로 지칭한 것은 나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다. 그는 호치민이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조국 독립을 위한 글들을 저술하는 것조차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다.

 

"응우옌 아이 쿠옥은 사진 손질을 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121

 

생계를 위해서 사진 손질을 하고, 시간을 쪼개서 조국 독립을 위한 글을 쓰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호치민)"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은 나로하여금 윌리엄 J. 듀이커의 인격을 의심케했다. 아니, 세계 초강대국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로서는 조국 독립 투쟁이라는 거룩한 가시밭길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사용해서,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을 마음껏 해부했다. 그리고 그 해부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을 흠집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한다. 베트남인들이 존경한 판보이챠우가 베트남인의 밀고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베트남으로 압송되었다.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사람을 그의 비서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볼 것인가, 응우옌 아이 쿠옥의 동료 람둑 투로 볼 것인가를 두고, 윌리엄 J. 듀이커는 세심하게 검증의 매쓰를 들이댔다. 어쩌면 응우예나 아이 쿠옥이 범인일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다. 다행히 윌리엄 J. 듀이커는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인물은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결론 내렸다. 객관성, 실증성, 논리성이라는 명목으로 응우옌 아이 쿠옥을 해부했다. 애국이라는 뜻의 응우옌 아이 쿠옥으로 이름을 바꾼 호치민이 독립운동의 선배를 내부 권력투쟁을 위해서 밀고했을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상세히 서술한 윌리엄 J. 듀이커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독립전쟁이라봐야 방임적 통치를한 영국에게서 전쟁한 것이 고작인 미국! 그러한 미국인으로서 가혹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베트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희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불가능함을 응우옌 아이 쿠옥에게 들이대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에게 덧씌워진 '호 아저씨'라는 신화를 깨고 싶었나보다. 이 책의 곳곳에 "호는 인자한 호 아저씨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742)라는 글이 난무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야망과 탐욕을 숨기고 '호 아저씨'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평생을 인자하고 검소하게 살았다면, 그것은 배우로서의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본모습이아닐까? 설령 저자의 말대로 "호 아저씨 역할"을 했을지라도, 평생을 "호 아저씨 역할"을 하며 살았다면, 호치민은 호 아저씨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신화를 깨기 위해서 매쓰를 호치민의 여자문제에 들이댔다. 여기에 주석의 개인 간호사인 수안이라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1955년 국경의 카오 방 성 출신의 한여자가 하노이에 도착했다. 예쁘장한 수안은 곧 나이가 들어가는 주석의 눈길을 끌었으며, 그는 그녀에게 개인 간호사 일을 맡겼다. 결국 수안은 주석의 아들을 낳았으며, 훗날 이 아들은 호의 개인 비서인 부키가 양자로 데려갔다. 1957년 어느 날 수안의 주검이 교외의 한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중략).... "처음에 이 사건은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 죽은 여자들 가운데 한 여자의 약혼자가 국회에 진정서를 보내, 수안 양은 찬 쿠옥 호안에게 강간당했으며, 호안이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다른 두 여자 역시 진상 공개를 막기 위해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진정서 사건은 금방 흐지부지되고 호안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으나......(중략).... 호치민이 이 애처로운 이야기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않지만, 어쨌든 그는 이 일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738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부분을 서술하면서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혹은 "호치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텐데, 굳이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호치민이 수안을 정식 아내로 등록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말대로, 호치민이 "호 아저씨"라는 배역을 강요받았기에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만 했던 것일까? 호치민은 왜? 억울하게 죽은 수안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했을까? 수안 사건은 박정희 정권시기에 있었던 정인숙 사건과 비슷한 사건일까? 숱한 의문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윌리엄 J. 듀이커의 검증의 칼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남자의 가장 약한 급소는 배꼽아랫일이다. 유력 대선후보가 여자문제로 감옥에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청렴결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진보 개혁진영에서 여자문제는 치명상을 입힌다.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급소를 직접 건드린다.

70대의 할아버지가 된 호치민은 중국의 당 지도자 타오 주가 하노이를 공식 방문했을 때, 벗을 삼으려하니 중국 광둥성의 젊은 여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타오가 베트남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호치민은 "모두 나를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생을 혼자 살아야했던 호치민! 그는 너무도 외로웠을 것이다. 조국과 결혼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그런데, 호치민은 그의 아우라 때문인지, 윌리엄 J. 듀이커의 말대로 호 아저씨의 역할을 강요받아서인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윌리엄 J. 듀이커가 들이댄 검증의 칼날을 보며,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호치민을 위선자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고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은 평범한 남성의 바램을 느낄 수도있다. 나는 그를 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호치민은 여러차례 유언장을 수정했다. 전쟁 이후,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며,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흩어 뿌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를 뿌린 장소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정치가들은 호치민의 바램을 짓밟았다. 권력을 잡은 레 두안은 호치민의 시신을 방부처리했다. 유언장에서 세금 감면과 소박한 장례식을 요청한 부분을 삭제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호치민을 신격화했다. 그렇게 그는 신화가 되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책에서 끈질기게 호치민의 신화를 해체하려했다. 그러나, 그도 결론에서는 "호는 전세계의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주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했던 혁명적 영웅의 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840)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치민의 신화는 지구상의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화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호치민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2. 그는 가능했고, 우리는 불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은 독립과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것도 국제 정세를 기민하게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뤄냈다. 우리는 강대국들에 의해서 독립을 했고, 그들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다.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김구와 여운형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호치민이 있었다.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호치민을 탐구하는 것이 유용한 방법이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던 판보이 차우와 판쭈친의 영향을 받으로 성장했다. 독립 정신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호치민이라는 거목이 자라났다. 호치민의 형 응우옌 신키엠과 누나 응우옌 티 타인 또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반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한그루의 거목이 자연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듯이, 베트남 식민지배라는 상황속에서 수많은 애국지사의 영향을 받으며 그는 혁명가로 자라났다.

예수가 광야를 헤매고,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달련했듯이, 호치민은 프랑스로 가는 배의 주방보조역할을 하며 세계를 탐방한다. 인도차이나를 비롯해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는 프랑스와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 식민지배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프리가 등지를 전전하며 견문을 넓힌다. 이 시기가 그에게 국제 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게했다. 호랑이가 사냥감을 기다리며 엎드려있듯이, 그는 조국 독립을 준비하며 조용히 세계를 여행했다.

어떤이는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되었기에 우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20년대 베트남에는 3개의 공산당이 존재할 정도로 공산주의 세력은 분열되어있었다. 또한 이들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대립했다.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호치민이 공산주의 보다는 민족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처럼 민족을 우선시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권력의 핵심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호치민은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면서도 소련에게 그의 공산주의 사상을 의심받을 정도로 민족을 계급투쟁보다 중시했다. 그가 소련과 친밀했던 이유는 베트남의 독립을 도와줄 나라가 소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19241월 레닌의 죽음과 1925년 쑨원의 죽음, 1920년데 판보이 처우와 판쭈친의 죽음, 그리고 그후, 베트남 국내에서 활동하던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가 죽음으로써, 사실상 베트남 독립을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호치민밖에 없었다. 1940년 봄 베트남으로 귀환한 그는 "아시아 혁명은 자기 나름의 역할이 있으며, 볼셰비키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다."(392)라고 말하며 자신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해 나갈 수 있어다. 그랬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았기에 민족을 우선시한 그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둘째, 기민하게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했다. 몽양 여운형이 국내에서 다양한 세력을 끌여들여 조선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백범 김구가 광복군과 미 OSS와 손을 잡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지만, 일본의 빠른 패망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베트남으로 잠입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다가오는 조국독립의 때를 준비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고 프랑스가 아직 베트남에 들어오지 않은 절묘한 기회를 틈타서 전국적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달성한다. 다른 민족주의자들이 중국 남부에 그대로 남아 연합군이 일본을 물리쳐주기를 기다린 반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서 도전했다. 그리고 다가온 기회를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피를 흘리며 댓가를 당당히 요구한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독립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지만, 남이 대신 피를 흘리기를 기다린 그의 경쟁자들은 결실을 얻을 자격이 없었다.

셋째,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떤이는 베트남의 상황보다 한국의 상황이 매우 나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5년의 상황은 베트남이 더 나빴다. 북부는 중국군과 프랑스군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남부는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때, 미약하게나마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미국은 베트남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호치민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베트남으로 돌아모며 신생국 베트남에 대해서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우리한테는 기계도 없고, 원료도 없고, 심지어 숙련된 노동자도 없다. 우리 재정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 조국에는 산과 숲, 강과 바다가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 동포는 결의, 용기, 창의성이 강하다."-565

 

빈약한 무기로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호치민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희망이다.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다. 이를 통해서 베트남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3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쳤고,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물러나게했다.

세계적 초능력자 유리겔러에게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방법을 묻자. "한국사람 모두가 한마음으로 통일을 외친다면, 그때 통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에게는 호치민이라는 탁월한 리더가 있었고, 그 리더를 믿고 한마음으로 독립과 통일을 외쳤다. 우리에게는 탁월한 리더가 많았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해서, 백범 김구 등등... 수많은 탁월한 리더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중심으로 한마음으로 외치지 못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아직도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려는 세력이 존재하는한, 우리의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900페이지의 벽돌책을 내려 놓으며 새해를 맞이했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배라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봄이 오기를 기다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한 베트남인들은 호치민을 만들었다. 그들의 영웅을 만들었다.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이라는 리더를 믿고 희생하지 않았다면,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리더십보다 팔오우십이 약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되려했지, 현명한 팔로우가 되려하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전쟁(1차 인도차이나전쟁), 미국과의 전쟁(2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국과의 전쟁(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리더 호치민이 죽었으나 베트남이 쓰러지지 않은 것도, 베트남인들의 탁월한 팔로우십 때문이다. 호치민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며, 호치민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윌리엄 J. 듀이커는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호치민 신화는 베트남인들에 의해서만들어진 것이기에, 베트남이 다시 위기에 빠진다면, 그들은 호치민 신화를 소환하거나, 새로운 신화를 만들것이다. 신화는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 신화는 다시 한번 베트남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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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2-03-08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사실 듀이커는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을 비판적으로 봤던 학자죠. 호의 가족 및 청렴 문제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점들 보단, 듀이커가 인간 호치민의 혁명적 생애를 보다 조명하는데 더 시간을 할애했다는 생각이 책을 읽으며 들었었죠. 아이러니 하게도 예전에 미국서 만난 베트남계 미국인 하버드 대 교수는 저랑 대화하면서, ˝듀이커의 호치민 전기는 좋은 책이지만, 호치민의 과오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PBS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 시리즈가 명작임에도 미국 위주의 편향성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듯이, 듀이커도 그렇겠죠. 저는 베트남 여행가기 전인 2020년 1월에 다시한번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었었는데, ‘실패한 사회주의‘라는 듀이커의 표현이 다소 불편했습니다. 베트남 도이모이의 배경에는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제재가 분명히 있는데, 듀이커는 이에 대해 입을 닫았죠. 서방학자가 가지는 한계랄까요.

뭐 그래도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훌륭한 역작이고, 지금까지 나온 호치민 주석 관련 책들 중에선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봅니다. 강나루 님의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22-03-08 21:48   좋아요 1 | URL
듀이커에 대한 정보와 개인적으로 만난 학자와의 대화 내용이 흥미롭군요. 호치민에게 관심이 많은 NamGiKim님의 견해 잘들었습니다. <<호치민 평전>>에 많은 기대를 했기에 몇몇 부분에서 실망을 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한글로된 호치민에 대한 책이 희소한 현실에서 <<호치민 평전>>은 소중한 책이라는 견해는 동의 합니다.

NamGiKim 2022-03-08 21:58   좋아요 1 | URL
하버드 대 교수로 호치민시와 미국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었죠. LA에서 인천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죠. 그래서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 제가 베트남 역사를 제법 아니, 반가웠는지 명함도 주더군요. 호치민 보다 응오딘지엠을 긍정적으로 말했었죠. ˝응오딘지엠은 애국자지만 잔인하기도 했다.˝고 ㅋㅋㅋㅋㅋㅋㅋ

보트피플의 태생적 한계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