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글을 쓰는 데 지친 이유. 직언을 하자면,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다 같은 교양강장제 같은 비평의 언어만이 난무하는 지식인의 그 죽은 언어들에 지쳤고, 그리고 그 언어가 주는 또 다른 상징폭력 속에서, 정치의 윤리적 전환이 강요하는 '의로움의 소비'만이 우리 비평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현실에 개인적으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지식인을 휘감고 있는 그 유럽- 정치철학의 윤리적 소비가, 지식인들의 진정한 언어를 대변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우며, 그러한 언어를 소비하고 있는 대중들의 과장된 환호도 내 안에 어떤 불편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왜 이런 언어를 무시하는가,라고 선전할 때마다, 그들이 들이대는 정치철학을 둘러싼 윤리적 마케팅의 언어는 내겐 너무나 불편하다. 여전히 87년의 '물화된 기억' 안에서 민주주의의 윤리적 언어만이 우리의 새로운 국민교육헌장이 된 듯하여, 숨을 쉬기 어렵고, 우리의 불편한 그 속내 그리고 감정들은 사람들이 오로지 소비하는 그 '정의의 문제' 안에서 다양성이 아닌 이단으로 쉽게 낙인찍히는 현실이 더 두려운 것이다.
진정한 지식의 계보학이 아닌, 날마다 누적되는 '정보-인문학적' 지도놀이에 신물이 나고, 어차피 이 동네 다 알고 아는 사이 아닌가라는 지식인들의 의례. 이 속에 가장 문제 제기되어야 할 진정으로 불편한 문제는 도외시되는 '포장된 정의'에 대해 우리는 정말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이 도전적 위치에 서는 가운데, 동시에 드는 그 과한 윤리적 폭력에 대한 앞선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새롭게 표출하고 싶은 비평적 속내라는 용기에 대해 문득 기록해둔다.
(늘 부족하지만, 그럴수록 들어오는 어떤 긴장감에 대해 쉽게 넙죽 엎드려 항복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