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조금 분절된 이야기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이 정도 글쓰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하기에 우선 남겨놓는 데 의의를 둔다.   

 

 

 

 

  

 

 

 

 

 

 

# 1. 잠깐 딴 이야기  

《이것이 문화비평이다》(2011)(이하 '문화비평')는 《무례한 복음》(2009)(이하 '복음')과 비교해서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물론 이택광은 '복음' 이전에도 왕성하게 자기 주장을 몇몇 단행본으로 해 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메인스트림으로 올려 놓은 책은 '복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복음'과 '문화비평'에는 다리 하나가 있다. 그것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2010)(이하 '인문좌파')이다. 이택광의 글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개념들. 왜 이 사람은 이 개념을, 이 이론을 자주 쓸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인문좌파'는 제목처럼 '가이드'가 되어주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 2. 왜 벌써 베스트 앨범이 나왔지?

먼저 책을 다 읽고 난 후 소감. 짧게 말해서 난 '문화비평'에서 별 매력을 못 느꼈다. 아마 이 글은 왜 내가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가,를 이택광 개인의 잘못이 아닌 이택광이라는 사람을 둘러싼 학문의 구조와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소소한(?)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도를 왜 했는가,를 더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조금 더 '엇박자'를 취한 내 결언을 드러내자면, '문화비평'은 뭔가 피로감을 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뭔가 '자기반복적'이었다. 비유를 들자면 이랬다. 아직 베스트 앨범을 낼 가수가 아닌데, 벌써 베스트 앨범이 나왔네?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앨범이 대략 3집 정도 나왔는데, 그 다음 앨범이 베스트 앨범으로 나왔을 때 뭐야,이거?하는 그 순간 말이다) 

좋게 포장하자면, 이것은 그만큼 이택광 본인의 의지가 '일관된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쁘게 직언하자면, 이것은 그가 보여준 다채롭고 새로운 시선이 과연 '발전하는 세계관'으로 이어졌는가,라는 의문을 주는 계기일 것이다.   

 

# 3. 문화연구는 '문화비평'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택광이 문화연구를 통해 '문화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그가 '복음'의 서문을 통해 이야기한 사실처럼 '문화연구자'가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했던 시도는 많이 죽어있는 상태였다.(2000년대 초반부터였지?) 현실을 신속하게 사유하는 문화연구자는 광장의 언어 대신 학계의 언어를 정식화하는 데 더 큰 힘을 쏟게 되었다. 덕분에 많은 이론들이 학계를 채우고, 논의도 풍성해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문화연구자들은 '잉여'가 되어 갔다. 현장의 급속한 변화에 놀래며 이러한 놀람을 해석하고 싶은 젊은 연구자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지만, '문화연구'라는 제도적 과정은 이 젊은 연구자들의 목을 조르는 딜레마로 작용했다. '이론적 배경'의 엄밀성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한 '이론적 배경'의 엄밀성이  '그럴듯한 논문'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 전락하면서, 문화연구가 활용하는 이론은 '당연한 결론'을 위한 제사물로 헌납되었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이 다루는 '논문'은 점점 경직되어 갔으며, 그러한 경직된 논문은 그 논문이 다루는 주제의 신선도가 더 높을수록 진하게 드러났다.   

 

 이런 맥락에서 이택광이 문화연구 안에서 강조하는 '문화비평'이라는 시도는 내가 보기엔 90년대 문화연구의 복권으로 더 강하게 다가왔다. 서동진, 노염화, 김수기, 강내희, 조한혜정, 이재현, 정윤수, 이윤호, 신현준, 김창남 등등 현실에 대한 색다른 해석과 신속한 사유를 제시하는 문화연구자들의 언어는 1990년대 대중문화의 급속한 변화에 놀라며, 그 놀람의 이면을 들쑤시고 다녔던 글쓰기의 시대를 대변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동인'들. 문화를 통해 공유점을 만들어가며 비평집단이 형성되고, 그 비평집단의 모토는 경쟁하듯 표출되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덧 일상은 '공부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고, 무엇보다 일상의 테이블에서 '재미있게 갖고 놀 수 있는 문화적 안주거리'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택광이 문화연구 안에서 문화비평을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절단과 파격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의 주장이 뭔가 새롭게 느껴질 정도의 착각을 느끼게 하는 데,  학계의 몽매함도 있었음을 나는 주장하고 싶다. '문화연구'라는 판은 이리저리 다른 학과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래도 어떤 제도적 힘을 갖고 '문화연구'를 주창하는 몇몇 학과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언론학회를 통해 움직이는 문화연구자들이다. 이들은 '미디어 /문화연구'라는 명칭을 통해 문화연구자의 '양육과 성장'을 나름 시켜주고 있는 제도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앞에 붙은 '미디어'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그래서 늘 문화연구를 '언론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남모를 압박을 받는다. 여기서 좀 편하게, 넓직하게 자유로이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곳이 중앙대 문화연구학과나 연세대 문화학 협동과정 등이 있다. 어느 집단이 더 이론이 강하다, 현장기술이 강하다, 분류할 수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언론학에서 나타난 '미디어/문화연구'의 경직됨보다는 조금 더 학문적 분위기가 자유스럽다고 할까? 그런 게 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화연구라는 제도권 안에서 이택광이 문화비평이라는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늘 그는 '라깡 전도사'로 소비되거나, 문화연구의 사회학적 사고에 치우친 사람들에게 '정신분석학적 사유', '정치철학적 사유'를 들이대는 '화성인' 문화연구자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그가 라깡 전도사로서 문화연구를 라깡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의 깊이를 따지는 만큼이나, 이택광이 논문 이외의 글쓰기라는 채널을 통해 갖는 '시도'. 그 시도의 의의를 오늘날 문화연구자들이 함께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점. 이것의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택광의 시도를 공론화함으로써 나는 문화연구자들이 현실에 대해 기계적인 이론의 대입과 반면 현실을 통해 이론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를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문화연구자들은 '관성적'으로 기계적으로 이론을 찾고 그것을 논문이라는 양식으로 맞추기에 급급하다. 고로 늘 현실에서 이미 많은 담론은 생산되었는데, 반 박자 수준이 아니라, 두 박자 정도 늦게 열을 올리는 것이 오늘날 문화연구자들의 현실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이런 현실이 곧 '학문적 깊이'를 위해 필요한 침착하고 차분한 연구자의 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은 결국 당연한 말들의 정리안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정리안으로 희번덕거리며 자족하는 문화연구자들의 테이블에 그들이 연구하는 대중이란 없다. 오직 기계적으로 끼워 맞춘 이론의 그늘에 가려진 '구성된' 대중만이 있을 뿐이다. 

 

# 4. 이택광의 글도 뭔가 지쳐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문화연구의 안타까운 현실과 대조되는 이택광의 문화비평에 대한 열정이 뭔가 지루하고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나는 여기서 이택광의 문화비평이 갖는 시도를 둘러싼 뜨거운 피드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그는 다양한 사건이 담긴 그만의 '신화들'(바르트가 쓴)을 쓰고 있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이러한 시도들이 환영을 받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의 열정적 외침이 '무궁무진'의 세계이기보다는 지나친 메아리로 들려온다. '쾌락의 평등주의', '중간계급' 등등 그가 늘 강조하는 한국 사회를 꼬집는 어떤 개념이 자주 나타남에서 오는 피로감 수준을 벗어나, 이것은 어쩌면 90년대 참 다양한 문화연구자들이 참여하여 만들어냈던 '문화비평'의 판에, 이택광 혼자 분투하고 있는데서 오는 피로감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 피로감을 덜어내기 위해 문화연구라는 학문에 그리고 이 세계를 뭔가 다르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책에 스며든 다양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해석 a에 대한 반론이자 반응일 것이다. 이미 이러한 반론과 반응은 이택광의 블로그에서, 그리고 그 블로그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정작 '문화연구'를 한다는 사람들, 자신이 '힙'하다고 자랑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시도에 가장 둔감한 점은 학문 사회의 암울함을 보여주는 단면일 것이다. 지금 문화연구자들이야말로 '논문중심주의'를 벗어나 다른 채널로 더 대중에게 다가가야 할 때가 아닌가!

 

(덧붙임) 책의 짜임새로 보자면, 개인적으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가 제일 낫고, 그다음 《무례한 복음》, 이번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가 제일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나는 자음과 모음이 시도하는 '하이브리드 총서'라는 기획도 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편집부와 저자의 쿵짝이 뭔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 읽는 내내 들었던 것은 왜 일까.

 



 
 
게슴츠레 2011-07-26 00:42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를 읽으니 격하게 말하자면 광인들 속에서 스스로가 미친 건 줄 알았다가 아 그래도 정상이 이게 맞긴 맞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군요. 이론이라는 종교가 논문에서 딱딱하게 굳고 웹에서는 되도 않은 입장들을 정당화(결국 타인에게는 안 되고 자기 집단에만)하는 상황 속에서 짧기만 핵심만 담은 단상 공감하고 갑니다. 저 역시 한 때 이론의 자식으로서요.

얼그레이효과 2011-07-27 05:43   URL
게슴츠레님, 오랜만입니다. 정신없이 써서, 글이 좀 그렇죠? ㅜ.ㅜ 좀 더 가지런한 글로 또 한 번 생각나누자구요~

2011-09-02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 1. 내 '밥상'에 죽음이 찾아온다긔?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모비, 박지연 외, 현암사, 2011)는 '비건'(쉽게 말하면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들의 생활 제안서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사회 보고서라고 거칠게 그 내용을 줄여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찌들게 만드는 증거들을 만나게 된다. 이 증거는 " 아니, 이 기업이 이런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단 말이야?"와 같은 '폭로'의 방식이거나, 아니면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화장실보다 더러운 것은 사실 부엌입니다"와 같이 상식을 뒤집는 설명으로 나타난다(흔히 통계적 수치와 함께). 이를 통해 우리는 아무렇게 방치해둔 우리네 삶의 모양을 점검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우리네 삶의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의 관심 분야를 서적 분야의 장르 선호도로 따질 수 없지만, 사람들의 우선순위에서 생태와 환경을 다룬 서적은 '재미없는' 분야, '밍숭맹숭'한 분야,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호들갑스러운' 분야로 인식되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책을 통해 '밥상'에 놓인 것은 반찬이 아니라 '죽음을 앞당기는' 반찬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쳐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바쁘게 살기도 벅찬데, 이런 문제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라는 취급을 받기 쉽상인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윤리적 소비'를 연구하는 동무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이런'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지적인 지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2. '이런 책'을 읽는 방법 1 -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책'은 환경문제부터 노동의 가치까지 '윤리와 경제'의 접점을 찾으려는 자장 안에서 읽어보면 그 연결고리가 맞아 들어가는 사례들이 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제시되는 열쇳말 중 하나가 '지속가능성'이다. 저널리즘에서도, 기업 홈페이지나 자체 운영 경제연구소 사이트에서도, 정부 보고서에서도 보듯, '지속가능성'은 하나의 트렌드 / 국가 전략 / 기업 전략 등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환경사회학이나 생태경제학 등(최근에는 인문지리학까지)의 학술 담론이 경제와 엮이면서 '지속가능성'은 뜨거운 개념이 되었다. 이 개념은 우리의 후손이 더 건강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소중한 정신, 가치가 동반된 실천을 지금 이 세대가 지향하는 태도라는 지극히 규범적인 정의 차원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적극적인 비판을 시도해보는 ‘견해들 간의 영역’으로 관심 받고 있다. 가령, '지속가능한 개발'이라고 하는 용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속가능'과 '개발'은 서로 어울리는 걸까? '지속가능'이 강조되려면 '개발'은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래도 우리의 지금 삶을 유지하는 건 '개발'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잖아, 지속가능이 좋다고 해도 '개발'이라는 초점을 흐려선 안 돼 등. 환경 / 생태 문제가 '자본주의'와 엮이면서 생기는 모순에 대해 깊이 사고하고 의견을 제시하려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지속가능성’은 뜨는 이슈로 자리 잡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당신이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앤서니 기든스의 『기후변화의 정치학』(홍욱희 옮김, 에코리브르, 2009)를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3장 <녹색운동과 그 이후>는 ‘녹색’과 ‘성장’, ‘생태’와 ‘자본주의’ 등과 같이 과거에는 접합하기 어려웠던 개념이 ‘녹색 성장’, ‘생태 자본주의’(혹은 어떤 책 제목처럼 ‘자연 자본주의’) 등의 정책으로 제시되면서, 그것이 갖는 아이러니라는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저자인 기든스가 “여러분, 지구가 아픕니다. 이 지구를 위해 우리 모두 재활용에 동참해요! 우리 건강을 다 해치는 악덕 기업을 몰아내요!”와 같은 견해를 책 속에서 펼쳤다면, 이 책은 어느 녹색운동가의 강건함이 담긴 (그러나 외면받기 쉬운) 에세이 정도로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든스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진다. 

 

 

  

 

“우리는 자연을 신성시하거나 자연에 경외감을 갖는 태도 역시 거부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가치의 중심을 인간으로부터 지구 자체로 옮겨가고자 하는 관점도 포함된다. (중략) 녹색운동은 그 배후에 중요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기후변화를 완화하고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경제 성장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중략) 우리는 녹색운동에서 나온 개념들이 과연 얼마나 유용한 지에 대해서도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개념들에는 사전예방 원칙, 지속가능성, ‘오염자 부담’ 원칙 등이 포함된다”(87~88쪽)

 




기든스는 인용된 위의 세 개념들을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 그 중에서 ‘지속가능성’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용례 속에서 각 주체들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 설정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환경주의자라면 ‘지속가능성’에, 정부와 산업계는 ‘개발’에 더 집중하기 마련(96)이라는 식이다. 기든스는 특히 이런 개념들이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그 상황이 불가피하게 묵인하는 권력 관계는 없는가 묻는다. 이미 ‘개발’을 통해 높은 / 강한 자리에 있는 선진국, 그리고 그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이 있다고 쳤을 때, ‘지속가능한 개발’이 ‘개발’의 중요성을 희석시키고 이미 누릴 것은 다 누리는 선진국 중심의 전략으로 나타난다면 개발도상국은 이 상황을 그냥 순전히 받아들여야만 할까?라는 점은 도덕적인 비난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기든스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일정 수준의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이 발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든스의 이와 같은 주장은 호불호가 분명 갈리지만 적어도 ‘지속가능성’을 둘러싼 ‘이견’들이 우리에게 깊고 큰 고민을 준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 이를 통해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에 등장하는 저자의 시선을 단순히 삶의 보호, 환경 보호, 생태 보호라는 덕목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을 살펴볼 가능성을 열어두면 좋을 듯하다. 


  

# 3-1. '이런 책'을 읽는 방법 2 - '투명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책’을 읽을 때, ‘지속가능성’과 함께 살펴볼 또 다른 열쇳말은 ‘투명성’이다. ‘지속가능성’이 정부/ 기업 등의 논의를 통해 다분히 거시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운 듯한 인상을 준다면, 오늘날 ‘투명성’은 시장 질서 안에서 정부를 비롯하여 기업과 시민사회가 맺는 특정한 관계를 읽어내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최근 ‘윤리적 소비’가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과 소비라는 행위의 접점, 그것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2008년 사회학과 학회지 <한국사회학>에 발표된 <한국사회 투명성 패러다임의 전환>(장용석, 송은영 저)이란 논문을 보면, 한국의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투명성’이라는 개념이 어떤 변화 과정을 거쳤는가를 알 수 있다. 연구자들은 한국 사회가 ‘기술적 투명성’에서 ‘문화적 투명성’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적 투명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정보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이윤을 창출하는 과정 가운데서 그 이윤을 내기 위해 사용한 정보를 공개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기업과 일반 시민들은 정보를 둘러싼 비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행여 이런 시민들의 투명성을 향한 요구가 적극적인 기업 내 정보 공개로 이어져도, 그것은 기업이 저지른 비리 혹은 환경 오염과 같은 문제들이 ‘이미’ 일어났을 때 뒷수습 차원에서 만들어 낸 제한적인 정보 공개 수준에 머물렀다(회계 감사는 대표적인 기술적 투명성의 실천 전략이다). 그래서 이런 ‘기술적 투명성’은 ‘결과적 투명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것을 ‘과정의 투명성’으로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업은 투명성을 적극적인 기업의 전략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늘날 ‘윤리 경영’, ‘책임 경영’, ‘지속가능한 경영’ 등의 이미 유행이 된 전략적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투명성’은 기업의 열린 이미지를 통한 이미지 신장 차원과 동시에 기업의 이윤 생산 과정에 ‘시민의 목소리’를 참여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문화적 투명성’이라고 부른다. 

  
 

 

 

# 3-2. '이런 책'을 읽는 방법 3 - ‘과정을 소비하기’ / ‘투명성’을 요구하기

이런 개념의 설명과 설정이 기업 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와 같은 책을 여러 권 읽어보면 ‘문화적 투명성’을 일반 시민인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도 구상해볼 수 있을 듯하다. 최근 ‘윤리적 소비’에 관한 여러 기사들과 연구 자료들을 읽어보면서 나는 ‘자본주의와 창(窓)’이라는 설정을 생각해 봤다.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를 단순히 ‘채식주의자’의 파격적 폭로로만 치부하지 않기 위해서는, 책 속에서 주장들을 제시하는 용법과 그 용법을 시도하게 된 맥락, 그리고 그 맥락의 효과 같은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책’에서 우리가 얻는 지식은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는 몰랐던 ‘상품 생산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산 과정을 소비자인 ‘나’가 밝혀냈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윤리적 소비’가 흔히 ‘과정을 소비하는 것’으로 소개되는 것도 이제 사람들은 “이거, 중국산이잖아, 에이 안 사”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 소비를 둘러싼 ‘과정의 맥락’,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생산과정의 정치경제적 맥락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어낸다는 특성 때문이다.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이나 예전에 나온 『죽음의 밥상』 같은 서적은 ‘소비’는 포기하지 않되, ‘어떤 소비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랬을 때 “당신은 채식주의자니까. 그런 주의를 따르는 일관된 삶을 사시오” 혹은 “에이 그렇게 나보고 살라고?”와 같은 심심한 이분법보다는 ‘채식주의자’라는 주체로 자신을 선언하게 된 용법을 파악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 용법을 요구하게 된 다양한 맥락을. 그랬을 때 책 속에 등장하는 저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체제가 주는 폐해를 꼬집는다. 무엇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드는 상품의 이면, 그 이면을 ‘생산 과정의 윤리’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분석에서 우리는 ‘투명성’이라는 개념을 기업이 소비자에게 떳떳하고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민인 우리가 그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생산과정의 ‘창’을 더 투명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과정을 소비한다는 것’에서 오는 윤리의 만족감이, 실제 과정을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 4. 채식 '위주'냐, 채식 '주의'냐  

 

최근 이효리가 한우홍보대사 계약이 끝나자마자 채식 위주로 식단을 조절하겠다는 내용이 기사로 공개되었다. 기사에서는 (내 표현으로) ‘언론스럽게’ “이효리, 채식주의자 선언”과 같은 제목으로 사람들을 흥분한 생선마냥 낚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연예인 생활에 이리도 관심이 많아”같이 평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상도덕에 어긋난 처신을 했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기사와 그 반응들을 읽어보면서 제법 재치 있는 덧글 하나를 봤다. “채식 위주랑..채식주의자랑은 그 차이가 큰데..”

오늘날 우리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진지한 일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별난’ 일이다. 과거 무슨주의자는 진중한 선언을 대변하는 사람을 나타냈지만, 이제 무슨주의자는 그냥 형형색색의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는 한 범주로 취급받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건 혼자 지키고 싶은 일이지만 찬사와 희화화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가엾은 존재의 현실을 보여준다. 차라리, 희화화라도 한다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와 대단하시네요” 같은 찬사는 내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오, 남들에게 깊은 관심 받을 사안도 아니란 걸 보여주는 비극의 답례일 것이다.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타인이 꾸준히, 그렇지만 티는 나지 않게 던지는 의문과 엮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보여준다. 당신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당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당신의 일관성을 의심하기. 이런 의심은 이제 ‘경제 인간’이라는 제법 철지난 개념어를 둘러싼 거부할 수 없는 시장 체제가 무슨주의자의 일상 생활에 더 깊이 관계맺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징후다. 어떤 면에서 이효리가 어겼다는 그 상도덕의 문제는 이효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지른 경솔함을 지시하는 비난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무슨주의자로 살았을 때 다가오는 어려움을 바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에 있다는 것이리라. 그랬을 때 ‘채식주의자’로 간주된 이효리의 삶보다 더 곤란함을 겪고 있는 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있는 채식주의자들이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건 사실 채식만 한다는 ‘별종’으로 분류된 시선이 아니라, “너 그것만 먹고 힘이 나겠어” 뒤에 생략된 표현. “너, 그것만 먹고 힘이 나겠어. (사회 생활하려면) 고기 먹고 힘내서 돈 벌고 계속 노동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야지”라는 일상 속 사람들이 쏟아내는 규범적 시선이 아닐까. 고로 우리에게 ‘채식 위주’로 산다는 것과 ‘채식 주의’로 산다는 것의 간극은 더 멀다. 쉽게 말해서 ‘채식주의자’되기는 곧 당신을 순수한 선언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 사회를 살아낼 만한 경제적 자격이 있는가라는 여부를 판단하는 시험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채식주의자는 한편으로 ‘대단한’ 취급을 받는 이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단한 취급이 진정한 찬사인지, 아니면 당신이 이 자본주의적 삶을 지켜나갈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섞인 의문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육식주의자'라는 언급이 더 이상하다는 것에서 오는 '채식'주의자의 이질감과 함께)
그런 면에서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는 ‘별종의 채식주의자’들이 건네는 ‘순수한’ 에세이가 아니라, 채식주의자라는 주체 되기를 통해 자신들이 겪어낸 이 사회의  자본주의적 시선을 향한 셀프 르포르타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채식 자본주의'라는 신조어도 얼마 안 있으면 등장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 신조어 앞에 어떤 것에 더 방점을 찍을 것인가? 혹은 그것을 요구받게 될까? 둘의 공생을 도모할 수 있을까?  

 

아직은 덜 여문 생각. 생각은 각자의 몫으로.

 


 
 
여강여호 2011-05-02 18:02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책들 소개 잘 보았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육식의 종말>이라는 책이 생각나는군요.
저도 판단이 쉽지가 않네요...좀 더 내공을 쌓은 후에...ㅎㅎ..

얼그레이효과 2011-05-03 12:18   URL
여강여호님 반갑습니다.^^ 판단이 쉽지가 않다는 견해부터, 바로 여강여호님 고민의 훌륭한 성과가 나타날 기분이 드는데요!

후와 2011-05-03 03:06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읽는 방법'을 앞으로도 계속 써주시면 안 될까요? 저 같은 사람에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암튼 고맙게 잘 봤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03 12:19   URL
후와님 오랜만입니다.^^ 힘이 닿는데까지, 질리지 않을때까지 한 번 이런 컨셉으로 계속 나가보죠 뭐! 저도 후와님의 글 통해 많은 도움 얻고 있습니다. 감수성의 팽창이라고 할까요*_*

노이에자이트 2011-05-03 17:10   댓글달기 | URL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이라는 기든스의 발상이 눈에 들어옵니다.선진국과 후발국의 이런 갈등은 늘 논란과 쟁점의 장이 되더군요.너희는 다 재미 봐놓고 우리가 해보려고 하니까 왜 나쁜 놈 만드느냐는 항변에 뭐라 뾰족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달까요...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 논리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1-05-03 17:14   댓글달기 | URL
이효리의 채식주의 선언은 따로 글을 써주셔도 좋겠습니다.예전에 개고기 민족주의자들의 논리가 '왜 개만 불쌍하냐.돼지 소는 먹으면서'였는데 채식주의자들에겐 '식물도 죽여서 먹는 거야'하는 공격이 들어오더군요.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채식주의를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냥 또라이로 보는 사람이 많죠.

얼그레이효과 2011-05-04 10:31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반갑습니다.^^ 관련 논의들을 최근에야 좀 읽고 찾아봤는데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더군요.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 흥미로운 표현만큼이나 씁쓸한 현실이 더 복잡하게 얽혀있어 안타깝습니다. 이효리글은 조금 더 치밀하게 접근해서 다음에 한 번 더 꺼내보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04 16:39   URL
기대하겠습니다!
 

 

 

 

 

 

 

 

 

김 원 선생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이 이매진 출판사를 통해 다시 나왔다. 2001년, '새내기'란 이름으로 이런저런 형님, 누나들의 '열혈 투쟁기'에 이끌려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고자 애썼을 때, 당시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당시 함께 꽂혀 있던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이란 책과 함께) '열혈'이 늘 가까이 하고 있던 좌절에 대한 이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혈'을 더 키우고자 했던 의지에 대한 이해에 대해. 1999년 이후의 컬리지언 총서 시리즈 중 하나였던 본 책은, 한때 학술계 내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했던 '학생운동'에 관한 거대 담론에 대한 연구들이 가려놓은 '일상의 문제'들을 추적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여기엔 문화연구가 주목하는 '일상생활'의 문제에 대한 두터운 시선, 그리고 그 시선으로 인해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에 대한 문화적 조명이 동반된다.   

 

 

 

 

 

 

 

 

 무엇보다 한국의 학술 연구 성과에 대한 '대중적' 틀을 함께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부실한 현 출판 상황에서 국내 연구자의 좋은 성과를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점에서 기쁘다. 지금은 많이 확산되었지만, 본 책의 원재료인 김 원 선생의 석사 논문 <광기의 시대 :1980년대 한국 대학생의 하위 문화와 대중정치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사례 연구>가 나온 1995년 당시만 해도, '구술사'라는 연구 방식은 학계 내에서 그리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본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연구 방식이 가져다 준 '사람들의 목소리 전하기 / 기록하기'는 사건 그리고 역사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노동사 연구를 비롯해 학생운동을 새롭게 조망하고자 했던 후속 연구자들에게 많은 참조가 된 김원 선생의 연구 성과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이야기하기 위한 재료로 반영되길 희망해본다( 개정판에 추가된 보론이 기대되는 이유다).  이 책의 테마가 마음에 드는 분은 전희경 선생의 <오빠는 필요 없다>와 오하나 선생의<학출>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 싶다.

 



 
 
루쉰P 2011-05-13 15:30   댓글달기 | URL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개인적으로 노무사를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노동사에 대해 제가 읽을만한 책이 있을까요? 비정규직으로 생활하며 지금은 아파트 경비실에서 근무를 하는 32살 노총각인데, 사회의 현실과 뭔가 전문적인 것을 해보고 싶어 노무사 공부에 도전을 하고 있거든요. ^^ 부끄럽지만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무뢰한에 가까워서요. 제가 좀 식견을 기를 수 있는 책을 좀 알고 싶어서요. 왠지 얼그레이효과님이라면 아실 것 같아서 수줍게 질문 드려요. 제가 좀 예의가 없죠? ^^;;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17   URL
아..저도 사실 문의하신 관련분야(노동사)로 상세히 읽은 책은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정도밖에 없네요. 노동사 분야로는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소에서 몇 년 전에 '노동사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들을 해왔고. 그래서 그 성과물들이 있을 거에요. 제 포스트에 있는 김원 선생님도 노동사 연구에 주력하시는 분인데, 아마 그 분 블로그(네이버에 있습니다)에 '노동사 연구'에 대한 성찰이 있을 겁니다. 성찰이니, 아마 노동사 연구가 원래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소개가 있겠죠? 김원 선생의 글이 예전에 좋았는데, 도움이 되셨음 좋겠네요.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22   URL
그 외 읽지는 않았지만, 이영석 교수라고 이분도 경제학사 연구하시면서 아마 외국 노동사 쪽으로 공부하시면서 노동사 쪽 책들을 내셨던 것으로 기억이 나네요. 아,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란 책도 있는데, 그건 어떤지 못 읽어봤네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책도 노동사 책이 있을 건데,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요. 책 이야기는 늘 좋아합니다. 얼마든지 대화해요~! 도움이 못되서 죄송합니다.

루쉰P 2011-05-15 07:47   URL
오~~이런 고급 정보 감사합니다. 김원 선생님의 블로그를 좀 가봐야 겠네요. ^^

노동자로 살아 온 세월이 있다보니 기계처럼 쓰여지다 버려지는 인생이 한심스러워 저 공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근데 이왕이면 그 공부를 하면서 노동사에 대한 부분도 정확히 알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서요. ㅋ

저도 책 이야기는 엄청 좋아합니다. 사실 사회학 서적은 읽는 것은 두려워 하는데 꽤 많이 사는 편이에요. 뭔가 지금 내 인생을 분석해 줄 지침서 같아서 말이죠. 헤헤

얼그레이효과 2011-05-15 22:57   댓글달기 | URL
학문이 힘을 떨어지게 한다는 시대에, 루쉰님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공부를 했던 사람으로서 기쁘네요.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1

 요즘 책 한 권의 완독이 버겁다. <모나리자 훔치기>를 읽다가 접고, 읽다가 접고 하다가 내일까진 다 읽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2  

최근 문화 분석(문화연구를 포함한) 경향들을 국내외 논문들을 살펴보며 정리해보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하나의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연구들이 늘고 있다. '감정사회학'은 지금은 소수 영역이지만 앞으로 꾸준히 관심가질만한 관점이며,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일찍이 '감정 구조'라는 개념을 통해, 감정과 사회의 연관성을 강조해왔지만, 이것을 현상 분석에 끌어왔던 연구자들은 '감정 구조'를 수사로 쓴 경우가 많았다.  이제 그 감정 자체를 사회의 큰 구조 속에서, 미디어 담론의 틀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문화 - 시민권 - 민주주의에 대한 문화연구적 접근도 국내외적으로 계속 시도되고 있다. - 문화연구와 정치 의식에 대한 성찰, 그 방향의 선상에서 문화연구자들이 현실에 개입하여 내놓으려는 대안적인 탐색인 것 같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오늘날 대중 지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이론화 작업도 (국내와 달리) 국외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는 듯하다.   

 

정체성 (동성애 문제를 포함하여)/ 다문화주의 / 국가 브랜드- 글로벌 체제 / 경제위기의 사회적 구성..등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였지만, 계속해서 단골 연구 주제로 나올 듯하다. (생각이 더 여무는대로 추가를..) 

 

## 요즘 둥지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 이름은 '페북'(facebook). 책 읽으면서, 영화보면서 기록하고 싶은 생각들을 순간순간 남겨놓는 재미에 빠졌다. http://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707348473#!/profile.php?id=100001707348473 

(성의있는 글이 아니니 주목할만한 포스트에 올리지 말아주세요~!) 



 
 
고고씽휘모리 2011-01-31 09:01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페북을 그런 단상을 올리는 용도로 사용해봐야겠네요.
메인이미지가 아주 멋진데요 ㅎㅎ

얼그레이효과 2011-02-03 11:03   URL
고맙습니다.^^ 친구가 아이폰으로 그려준거에요.ㅋ 휘모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욧!
 

  

  

 

 

 

 

 

  

영화를 좀 '의미있게' 보고 싶은 사람들, 영화보다 '영화-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조금씩 내가 걸어온 여정을 나누고자 한다. 이러한 여정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수도, 또 그런 이야기들을 조금 더 깊이 판 사람들의 이야기일수도, 아니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딴 세상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밝히자면, (영화 연구라는 자장 안에서) 영화를 '사회학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이것은 오래 전 문화연구의 영향을 받아온 덕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나는 문화연구가 이제는 '미학'에 다시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미학은 어두운 시네마떼끄 안에서 고립된 영화적 묘미를 즐기는 영화광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이자 현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주장한다. 

이번에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사회학적 시각이 영화의 미학, 특히 영화의 존재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다. 앙드레 바쟁은 문화연구자들의 적이 아니며, 오히려 바쟁의 '완전영화의 신화'와 같은 글들은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시 해독해봐야 할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영화 연구를 한다는 것은? 영화학자 패트릭 필립스의 이야기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하고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영화 연구의 역사는 사실 이게 전부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충돌, 결합되어 왔고, 우리는 수혜자로 살아가며 새로운 길을 모색할 기회를 잡았다. 

영화 연구는 장르, 텍스트, 스타, 산업을 비롯한 다양한 대상들을 연구 과제로 삼아왔지만, 무엇보다 '관객성(spectatorship)'을 둘러싼 견해의 충돌, 누적은 영화 연구가 걸어온 여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영화 이론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관객성 연구'는 스크린 이론을 둘러싼 순응과 저항, 그리고 그 틈을 벌려 보다 문화적이고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고안된 '영화 수용자 연구'로 전개되어 왔다. 

학문을 '잘'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필요한 건 언어에 대한 민감함일 것이다(나는 아직도 모자르지만). 영화 관객과 영화 수용자는 그래서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 개인의 시각일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학문적인 검증 안에서 공개된 견해이기도 하다. 이 견해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다양한 책이 있지만, 비교적 쉽게 이 개념을 정리해놓은 패트릭 필립스(phillips,1996)의 <spectator, audience and response>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필립스의 의견에 따르자면, 영화 관객성 연구는 어두운 극장에 들어선 개인이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에서 위치지어지는 방식을 탐색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영화적 장치'라고 하는 스크린 이론의 강령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하는, 구조주의적 접근과의 만남을 선언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개인 - 영화'의 만남, 그러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영화에 대한 감정은 영화를 '시네마'라는 명칭 안에서 특별하고 위대하게 만들어보이도록 했다. 영화는 일상생활과 격리된 경험 그 무엇이었고, 그러한 특수성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영화 연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영화 수용자라는 것은, '수용자(audience)'라는 명칭을 자주 쓰는 문화연구의 탐독을 필요로 한다. 수용자라는 개념을 자세히 그리고 역사적으로 알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데니스 맥퀘일의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거칠게 정리해보면, 영화 + 수용자의 결합은 영화의 특권적 경험 대신 '일상 안에 놓여진 영화의 위상과 그것을 규정하는 사람들의 소비 행위'를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화 소비'(film consumption)'는 영화 수용자를 연구할 때 애용되는 개념으로써, 극장 이외의 경험, 특히 '가정'에서 어떻게 영화가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설명할 때 요긴하다. 이것은 VCR,DVD,케이블 TV, VOD, 다운로드 등의 소비 경험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영화 관객'에서 '영화 수용자'로 전환되는 과정은, 영화 연구에서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 보는 것과 함께 가는 다양한 실천들이 고려된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수용자의 실천은 '애매모호한 자유'와 맞닿아 있다. 이것은  영화 수용자의 행위를 다른 한 편에서 규정하는 시장의 힘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영화 수용자의 다양한 영화 문화를 생산해 내고, 그것에 민감하게 접근하는 기업의 행위는 한편으로 새로운 영화 수용자 연구의 딜레마로 작용한다. 

시장의 엄청난 조사 능력은 영화 수용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듯 하지만, 그 자유는 사실 진정한 수용자의 자유는 아닌 상황. 디지털 시대를 맞아, 영화의 존재론을 영화 경험과 함께 사유하는 유명한 학자, 토마스 엘세서 같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동료들을 모은다. 가령 앨세서는 DVD의 서플먼트가 보여주는 풍성한 정보, 영화 잡학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려는 이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 테크놀로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화에 대한 소유'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 안에서 영화의 미래를 모색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영화는 '핫 미디어'이기 때문에, 그 참여도가 적은 매체라고 했지만, 시대는 맥루언의 의견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하는 중이다. 

영화를 접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지성의 망안에 포획하려는 것이 나 같은 놈의 일상사지만, 결론은 결국 내 망에 가두어지지 않은 이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자유를 보존해주는 것이리라. 이번 논문에 담긴 내 신념이다.



 
 
2010-12-14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1 0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