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겨레21에 실린 이동기 교수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라는 글을 읽고 여러 생각이 들어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일단 개인적으로 저널리즘이 무슨 사건만 일어나면, 기자든, 칼럼을 쓰는 학자든 '악의 평범성'을 들이미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글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진 않기 때문에, 이 글의 한계와 별개로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지점엔 동의한다. 


2. 근데 나는 이동기 교수가 역사학자로서 '다른 사료'를 들어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는 식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보는 걸까에는 아쉬웠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제시하려는 그 사료라는 근거로 이 정도 의견밖에 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의 한계를 돌파해보려는 데 있어, 이동기 교수는 흔히 문화연구자들이 능동적 수용자론이 흥했을 때, 그 이후 정치적 연성화를 의심받은 이 학문이 돌연 정치적 강성화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수용자론에 담긴 '문화적/문학적 의미' 동원을 거부하자는 그 제스처와 동일한 논법을 쓰고 있다. 소비의 쾌락과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놈들을 뭐라고 연하고 부들부들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냐, 그딴 거 다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거칠게 말하자! 이게 능동적 수용자론에 대한 정치적 연성화, 그 회의감에서 온 주장이었다. 근데 이러한 정치적 연성화/강성화라는 이분적 구도에 매몰되어 문화연구는 이후 더 퇴보되었다. 



3. 이 논지로 악의 평범성을 보았을 때, 이동기 교수는 자신의 '대안-사료'로 아이히만이 '판단력이 마비된 인간'이 아닌, 능동적 가해자라는 구도로 바로 넘어가버리는 누를 범하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지점에서 우리가 왜 굳이 '주체적 가해자'라는 입장을 바로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입장은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자아가 탈색된 채, 상부의 지시를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 vs 실제로 유대인을 증오하면서 운동으로서 자신의 나치즘을 실현할 마음이 있었던 주체적 가해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구도로 환원될 필요가 있는가. 


4. 외려 이런 구도는 고작해봐야 한 인간이 정치적 사건 앞에서 어떤 윤리/윤리학을 결정한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진정성 게임으로 가는 한계에 봉착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타격을 주는 방식은 고작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에서 비롯된 수동적/능동적 주체의 행위와 그 맥락에 대한 고찰이 아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인기를 끌면서 범람하게 된 '심리적 이력 파악하기'라는 그 '역사적 접근 자체'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동기 교수의 논지 또한 '심리적 이력 파악하기'와 결을 같이 하는 견해일 뿐이다. 


5. 이러한 심리적 이력 파악으로서의 역사적 접근은 지젝이 언급했던 홀로코스트 연구에 대한 '신비화'로 빠지는 귀결과 같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앞에서는 연구자 네가 애써 찾은 그 모든 이야기 닥쳐!라는 경건한 태도. 이른바 지젝이 말한 그 "형언할 수 없는 악"이란 지점 자체가 문제적이다. 그러했을 때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문제적인 것은 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개인의 심리 드라마가 왜 이렇게 '신비스럽게' 대중화되었나 하는 메타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이동기 교수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은 동의하지만, 한겨레21에 소개된 견해는 그렇게 썩 유효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동기 교수의 이런 이분법적 견해는 자칫 교양으로서의 역사에 함몰될 위험이 크다.



 
 
Agalma 2015-01-29 15:00   댓글달기 | URL
속은 건 속은 거지만 아렌트가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고 보는 지점에 아이히만을 둔 것인데, 이동기 교수 주장은 공격의 단순성이 되버렸네요. 기사 제목부터 그런 무모함을 여실히...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역시 그 당시 전체주의에 물들었고, 뇌과학과 심리학에 가까운ㅡ전체주의에 빠진 개인의 내부까지 파헤쳐가면 `악의 평범성`이란 城조차 과연 굳건할까도 의문입니다.
강성화/연성화, 수동성/능동성보다는 복잡성과 공격성이 모이는 집단성으로서의 욕망자 그들로 더 논의를 펼쳐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새벽숲길 2015-01-29 17:51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얼그레이효과님..~~
제 개인적으로는 `환원될 필요가 있는가?` 라기 보다는 `환원될 수 있는가? `의 문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수동성은
`악의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저 생각없이 (수동적) 으로 동참했다` 의 이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때의 생각없음은 타인에 대한 입장의 고려, 상대에 대한 인간적 이해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컨데 능동과 수동..... 당시 나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저항과 순응, 지지 등을 오가며 회색지대에 머무르기도 하는 모순적인 것이었지요.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은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니 결론이 아렌트의 논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흘렀지 않나 ?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같은 그러한 사람들은..아예 그 어떤 생각도하지 않거나 못하는, 바로 이 의미에서의 수동성.. )광인들이거나 괴물들 일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라는 문제제기를 밀어부쳐서, 아이히만의 개인의 경우를 통해, 어쩌면 * 역지사지 할 수 있는 생각의 능력이 없이* , 오로지 자신의 이익, 혹은 집단, 우리 의 이익에 적극적 소극적, 혹은 그어느 방식으로든 목적을 달성해내는 우리내 인간의 사악함을 본 것이고, 그것으로 악의 평범성을 논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이히만의 이기심, 역지사지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그것이 자신의 이익추구를 위해 철저히 무시될만큼의 무지) 를 확인한것이지, 속은 것이 아닐테니까요. 단지 광인일 것이라는 자신의 가정에 배신당했을 뿐

《그녀가 가정한 악과 아이히만을 보고 도출한 악 의 사이 .. 그 간극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이끌어 낸 과정인데, 교수님은 후자의 악의 개념을 잠시 혼동하신것이 아닐까》
아마도 기고하신 교수님 께서는 작금의 현실, 수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저질러지는 악(?)이 아닌 너무나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푸른집 아래의 개인들에 대해, 한말씀 하시고자 했던 의도이셨는데 글의 내용이 미끄러져버린것이지 않을카 싶습니다.
˝너희는 적극적 동참가들이다. 직업, 밥줄 운운하지마라. 어리석은 척도 하지마라. ˝

판을 펼쳐보면 프랑스 사건도, 전세계 많은 문제들도 결국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의 문제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단촐한, 거친 ? 틀이라도 요즘 같아서는 `그 악의 평범성을 왜 《 나》에게는 묻지 않는가?` 가 두려워집니다.
오히려 가장 많이 자문 자답할 시기가 아닐까? 우리가 상대라 칭하는 저들에 대한 / 이편과 저편에 대한 group 을 정의하는 원소들에 대한 물음까지. 《물론......저 역시 그 누구보다도 ..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입니다. 악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두서없이 조금 긴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
 

 

 

 

 

1914년. 전직 연극기획자이자 배우들의 매니저였던 한 남자가 영화사 책을 썼다. 그는 책이 나오기 4년 전부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미국 공연업계에 대한 많은 기사를 써오던 터였다. 이 남자의 이름은 로버트 그라우. 그는 최초의 미국 영화사 책으로 평가받는 《과학의 극장》의 저자다.

 

비록 '위인'의 관점에서 영화계의 발전을 이끈 인물들을 조명했단 한계는 있지만, 참고할 만한 기존 문헌이 없었음을 감안할 때 저자의 역사쓰기는 의외로 빈곤치 않았다고 후대의 영화사가들은 평한다.

 

이 책은 제도권으로서의 영화학이 없던 시기(전공교재로라도 팔 수 있는 환경이 없던 시기), 영화서적의 출판 행태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과학의 극장》은 3000부가량 찍었는데 책은 '예약구매'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예약구매란 책을 미리 살 사람들을 정해 주문을 받아 일정 부수만 출판을 했다는 뜻이다. 방문판매원이 있었지만 그라우는 직접 판매에 나섰다고 한다.

그 당시 영화배급업자인 조지 클라인은 아직 출판되지도 않은 책을 주문하라고 하는 그라우의 행태에 아쉬움을 표했다.

 

고백하건대, 만약 당신이 보낸 모든 편지에 대해 구매예약서가 동봉되지만 않았다면 나는 당신 책에 개인적으로 대단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책을 사기 시작하면 나도 살 마음이 생길 것이란 정도의 관심만을 당신 책에 대해서 갖고 있습니다. 책 구입요청서가 이런 식으로 모든 편지에 동봉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조지 클라인의 편지

 

그라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클라인을 꼬드겼다. 앞으로 발간될 서적엔 클라인이 운영하는 영화관을 다루는 내용이 많을 거라고. 그러나 정작 《과학의 극장》엔 조지 클라인을 다룬 비중은 적었다고 한다.

기술이 곧 미학임을 믿던 미국의 당시 분위기가 반영되어, 영화사의 발전을 이끈 기술의 발명과 인물 위주의 역사서이지만 영화의 기술적, 미학적, 산업적 측면은 한 덩이임을 표명한 중요한 책.

 

*영화사에 대한 영화사인 로버트 앨런&더글러스 고메리의 《영화의 역사: 이론과 실제》& 영화사가 루크 맥커넌의 초기영화사아카이브 <바이오스코프>를 참고.

 

 



 
 
 


















“품격 높은 전문가라면 마땅히 감사의 말도 능숙하게 작성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집필을 마치고 나서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설령 그게 사실일지라도 누구에게든 빚을 졌다고 꾸며대야 할 일이다.”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서문을 쓰는 방법」 중에서



*아래의 트윗은 사실이라 믿어도 좋고, 허구라 믿어도 좋다. 근데 어찌 되었든 진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신식 @jjcrowekr 9월 3일

논문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중앙도서관 4층에 위치한 논문보관소에 갔다. 정작 본문은 반도 쓰지 않았는데 감사의 말을 어떻게 쓸지 고민이다. 다른 사람들은 감사의 말을 어떻게 썼을까. 학과를 불문하고 천편일률적이다. 정말 그렇게 고마운 사람이 많나.(139/140)


김신식 @jjcrowekr 9월 3일

드디어 음흉한(?) 감사의 말을 찾았다. 유 씨의 감사에는 분명 뼈가 있다. 지도 교수를 향해 ‘고…맙…습…니…다.’ 입을 앙다문 어떤 분노가 느껴졌다. 유 씨에겐 미안하지만 150쪽이 넘는 본문보다 감사의 말 1쪽이 훨씬 재미있었다.(*134/140)


김신식 @jjcrowekr 9월 4일

원래 학위논문 주제는 「한국의 비디오문화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VCR 수용자의 가정 내 영화 소비를 중심으로」였다. 마음이 흔들렸다. 「감사의 말을 통해서 본 학술계의 감정」으로 바꾸고 싶었다. 지난 학기 날 잡아먹을 듯한 심사자 때문만은….(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6일

사회학자 패멀라 리처즈는 하워드 베커에게 보낸 답장편지에서 심사자인 동료와 선배들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두 개의 꿈을 고백한다. 하나는 대학원 시절 절친이 자신의 초고에 신랄한 비판을 하는 꿈, 다른 하나는 초고가 잘 써지는 꿈.(135/140)


김신식 @jjcrowekr 9월 6일

허나 패멀라는 현명했다. 자신의 생각을 달달한 온기로 지지해줄 동료부터 의심해보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설익은 초고가 완성된 논문 직전의 글이라고 쉬이 판단해버리는 학술계에서 그녀는 좀 더 유연하고 냉정해져야 한다고 결심했다.(136/140)


김신식 @jjcrowekr 9월 6일

패멀라의 이 진솔한 답장편지 전문은 그녀의 어느 책에 감사의 말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적어도 ‘익명의 세 심사위원에게 감사함을 표한다’는 형식적인 말보다는 나은 듯하다. 답장을 받은 베커 또한 말한다. 그녀의 느낌이 대다수의 학자를 괴롭힐 거라고.(138/140)


김신식 @jjcrowekr 9월 9일

학술에서 감사와 겸양은 늘 따라다닌다. 허나 안다. 겸양은 가면이라는 것을. “난 학자가 아니니 잘 모르겠습니다만”이라고 운을 뗀 다케우치 요시미. 그를 연구한 쑨거는 말한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사상의 독창성이 없는 현대 학술계에 대한 반감이라고.(139/140)


김신식 @jjcrowekr 9월 9일

비슷한 맥락에서 “익히 알다시피”란 표현도 있다. 허나 안다. 이 관용구는 내 논문을 읽을 당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길 한다는 게 아님을. 실은 이제부터 당신들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힙한’ 이론을 소개하겠다는 선언임을. 겸양은 학술을 잠식한다.(139/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3일

출판의 사회사를 연구했던 존 맥스웰 해밀턴은 ‘감사의 말’만 모아 연구한 적이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예전에는 감사의 말만 써주는 업이 흥했다. 잘 나가는 이는 300만~500만 원 정도를 벌었다. 새뮤얼 존슨도 그중 한 명이었다.(132/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3일

‘acknowledgement는 주로 외서에서 볼 수 있다. 국내에선 주로 서문에 감사의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또는 ‘외국 책에선 acknowlegement를 자주 볼 수 있다. 국내에선 주로 서문에 감사의 표현이 들어 있다.’ 학자는 감사의 말에서 섬세함과 유머를 실험한다. 평생 연구실에 틀어박힌 이에게 유머란 위험한 시도라 따뜻한 호명이 일반적이다.(138/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8일

감사의 말은 특히 학자들의 가족애가 발산되는 공간이다. 아내와 아들딸, 심지어 장모까지 등장한다. 9·11 이후 뉴욕의 도시재개발 논쟁을 연구한 도시사회학자 그레고리 스미스사이먼은 감사의 말에서 초교 교정을 봐준 장모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한다.(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8일

감정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쓴 감사의 말은 남편 애덤을 향한 러브레터다. 혹실드의 고백에 따르면, 애덤은 혹실드가 힘들어할 때마다 그녀의 책상과 초고에 재치 있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녀는 말한다. 남편의 사랑이 책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고.(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8일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 감사의 말에서 동료애를 천명한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동료들이 있는 한 이기심을 일으키는 유전자 따위는 없다”란 표현은 나름 센스가 있다.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위트를 시도했다.(140/140)


김신식 @jjcrowekr․9월 19일

연구실 복도에서 교수님과 마주쳤다. 교수님은 엷게 웃었다. “얘 준비는 잘 되가나.” 하고 싶지만, 부담 줄까 싶어 인사만 받아주신 듯했다. 재심사가 다가온다는 고요한 경고장 같았다. “교수님, 저 요즘 관심사가 바뀌었어요.”라 말하고 싶었지만….(138/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9일

뭔가 찔려서 논문보관소로 향했다. 물론 감사의 말을 읽으려고. 본문은 조금 썼는데, 감사의 말부터 쓰잔 생각이 들었다. 골랐다, 적합한 말을. “○○에게” 이 학자들의 진중하고 내밀한. 그래, 나도 바르트가 되어보자. 실명을 쓸까, 애칭을 쓸까.(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25일

실명을 혹은 애칭을? 고민하다 6일을 보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자 감사의 말들을 읽었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의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감사의 말은 책 기운대로 뭔가 꼬인 게 있을까. 허나 시시했다. 그야말로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이었다.(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25일

입을 앙다문 분노를 위트로 전환한 감사의 말을 찾았다. 시인 E.E. 커밍스는 헌사에 자신의 시집 출간을 거절한 출판사 14곳을 적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300달러를 빌려 인쇄업자 친구의 도움으로 자가출판을 했다. 시집 제목은 『감사할 것 없다』였다.(140/140)


김신식 @jjcrowekr 9월 26일

내 논문에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을 써보기로 했다. 키보드로 치면 맛이 살지 않아 만년필을 꺼냈다. 새 노트의 비닐을 뜯었다. 쓰면서 마음에 물파스를 바른 기분이 들었다. 물론 공부 안 한 과목의 시험지에 ‘선생님 사랑해요.’를 쓰는 기분도 함께.(137/140)


김신식 @jjcrowekr 10월 5일

지도교수 연구실 앞. 심사를 미루고 싶다 말해야 하나, 사실 새 주제에 관심이 생겼다 말해야 하나 고민 중. 마음은 후자에 가 있다. ‘선생님, 학계가 자신의 격정을 온화함 속에 묻어놓는 게 마뜩잖아요. 그 고분고분한 온기에 제동을 걸고 싶어요!’(138/140)


김신식 @jjcrowekr 10월 10일

며칠간 몸살이 나 아팠다. 그날 일이 떠올랐다. 교수님은 말했다. “신식아, 논문 잘 써가지고 이런 논문 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 들어보자 생각한 적은 없니?” 잽 정도 맞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묵직한 훅이 들어왔다. 뭔가 말린 기분이었다.(137/140)


김신식 @jjcrowekr 10월 10일

나는 머리에 전구가 켜졌다는 모양새를 담아 정신 차리겠다는 요지의 약속을 소심히 뱉었다. 학술계가 잘하는 ‘깨달음의 연극’이었다. 미련이 남았는지 오늘도 감사의 말을 연구했다. “따라서 내용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이다.”류의 감사와 겸양에 대해.(137/140)


김신식 @jjcrowekr 12월 13일

@kiman 아, 네 오랜만이에요, 빵 님. 저 논문 쓴다고 트윗을 통 못했네요.^^; 그때 긴히 여쭌 주제는 접었습니다. 그놈의 ‘논의의 배경’에서 막혀서요. 그냥 지금 주제 빨리 써서 졸업하려구요. 돈 벌어야죠?! 흐흐흐….(120/140)



 
 
 

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온라인 공간에 <김신식의 외서통신>이란 코너를 연재하게 되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가끔 들려주시길..


1회는 사회학자 니나 엘리어소프의 『자원봉사자의 형성: 복지의 종말 이후 시민적 삶』이란 책 소개.



누가 행복을 책임지는가. 국가는 무너지고 남은 것은 시민의 힘!이런 익숙한 구도 가운데 상향 권력의 한계를 짚어보는 책들은 단순히 ‘비평을 위한 비평’ ‘연구를 위한 연구’라는 명목을 넘어선다. 『자원봉사자의 형성: 복지의 종말 이후 시민적 삶Making Volunteers: Civic Life after Welfare’s End』도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참여, 행동, 헌신이란 가치가 넘실대는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정치적 무관심을 꼬집었던 사회학자 니나 엘리어소프는 한 중소 규모 도시에서 일어난 자원봉사의 물결에 의문을 표한다.

익히 알다시피,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이 주창한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담론은 국가가 행해야 할 복지를 시민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의문 대 사회적 기업 등을 위시해 시민의 자치 영역을 공고히 하는 상향 권력에 대한 인정이라는 구도로 양분되어왔다. 이 책은 이런 거시적인 입장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자원봉사라고 하는 실천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해부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엘리어소프는 도시 내 공동체 활동에서 자주 강조되는 ‘역량강화empowerment’라는 개념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5년간의 참여관찰을 통해 빚어진 예리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원래 역량강화는 사회학이나 정치학, 여성학 쪽에서 자주 쓰였다. 시민들의 권리 확장, 노동조합의 설치, 흑인 투표에 대한 보장, 성해방에 대한 인식 확산 등에서 주창된 이 개념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이 일어설 능력을 부여하는 실천을 지칭했다. 그러다가 이 개념은 현대 사회복지학을 설명하는 근간이 되었고, 경영 이론에서도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한 이론적 매뉴얼로 전유되어왔다.

전문은 여기에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취향은 자신의 문화적 선호를 분명히 밝히는 용어가 아닌, 그러한 선호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불안과 그 방어에 가까운 용어임을 우리는 이미 실생활에서 느끼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취향을 밝힌다는 것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일이다. 물론 이는 내가 어떤 영화를, 음악을, 회화를 보고 공유하는 것에 대한 설렘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이런 걸 밝힘으로써 누가 날 공격할까?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생겨버린다. 

이번 《문학과사회》 여름호 기획 ' 취향에 대해 논쟁할 수 있는가'에 참여한 필자들 또한 이런 시선의 바탕 안에서 흥미로운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오늘날 '취존(취향을 존중합니다)'이니 '개취(개인의 취향이 있는 거니까요)'라는 표현은 곧 진정한 상호 존중이 아닌, 사실은 내가 당신과 더 이상 이 문제를 두고 깊은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소, 라는 단절과 폐쇄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처럼 취향을 밝힌다는 것의 피로감은 별것 아닌 듯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취존과 개취는 곧 취향을 두고 정서적 에너지를 쏟기 싫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서동진 선생은 "사악한 윤리적 기회주의"라는 강도 높은 표현으로 "취향 없는 취향"(정성일)의 시대를 우려한다. 정성일 선생은 오늘날 취향이라는 말 자체는 취향이라는 그 말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시장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취향을 둘러싼 윤리적 풍경에 부정이란 없다. 오직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무엇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타인과의 쟁투로 이어지기에 이를 애써 막을 방도는 "좋아요"이다. "그 영화두 좋아요" "그 음악 괜찮죠(각자 다 즐기는 기준은 다르니까요)"

사실 가장 점잖은 것 같지만 도발적인 언사를 표하는 글은 이상길 선생의 <취향, 교양, 문화>다. 이상길 선생의 글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이미 부르디외가 될 채비를 갖추고, 이를 잘 써먹는다. 아 이 계급이면 이런 문화를 좋아하지, 아니야 이 계급이라고 해서 이런 문화를 반드시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지? 하는 마인드로 문화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상길 선생의 진정한 관심사는 이러한 사회학주의가 아니다. 사회학자인 그가 보기에 오늘날 문화, 예술을 다루는 관점은 지극히 사회학주의에 치우쳐 있다. '나'가 이러한 문화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외부의 결정적 요인을 자연스레 이어보고자 하는 태도, 이러한 사회학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오늘날 취향-교양-문화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푸코의 '자기 배려' 개념을 검토하며 주체의 능력에 주목한다. 그는 언뜻 오늘날 주어진 교양의 일반적 규범(가령, 이런 정도는 읽어줘야지 않겠어?란 말이 따라오는 하나의 문화적 위계라고 한다면)을 습득해가는 사람을 향해 '교양의 몰이해''줏대 없는 시류의 영합과 편승'이란 쪽으로 몰아가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자기 계발'이라고 하는 표현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듯하다. 어떤 인문주의와 교양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채, '나'가 자기 배려라는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이 합의해놓았지만 '뭐 그게 중요한 텍스트이긴 한데, 편한 것부터 읽어, 그게 그리 중요한가'라는 태도로 그 합의를 은근히 숨겨놓은 듯한 문화적 환경에 주체적으로 설 수 있는가. 이상길 선생은 그 문제를 건드리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쉽진 않겠지만, 이란 말과 함께.  

서동진 선생(<이토록 아둔한 취미를 보라>)은 개취, 취존의 인류학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합의의 풍경을 우려하면서 '합의'의 공동체가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지향해야 할 공동체는,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주창하는 이의의 공동체다. 정성일 선생(<21세기 신사숙녀 '反' 매너 가이드>)은 취향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풍토를 걱정하면서 취향이 불안과의 모험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영화를 통해 취향을 밝힌다는 것에서 영화는 없다. 오직 (취향을 밝힘으로써 나타나는 불안감을 감지한) '나'만 존재할 뿐이다. 

세 필자의 글에서 두 가지 특성을 발견해보았다. 서동진 선생과 정성일 선생의 글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인류학/인류학자'라는 표현(이상길 선생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부르디외의 인류학적 접근이 들어간 《구별짓기》의 마인드를 체득한 소비자-시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 필자 다 그 용례는 미세하게 다르지만, 사람들은 이미 문화를 소비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반응을 챙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견해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고로 '나'는 영화를 보지만,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반응과 무의식적인 교류를 챙긴다. 컴컴한 극장과 스크린에서 압도되어진  '집중'(흔히 극장주의자들이 잘 썼던) 대 이 산만하고 할 일 많은 가운데서 여러 개로 발산되는 듯한 가정 내 '분산'이란 구도는 어찌보면 다시 한번 관에 들어가야 한다(많은 영화학자가 밝힌 것처럼).

다른 하나는 아쉬운 점이다. 세 필자 모두 '존취(당신의 존중을 취향합니다)'란 이 비문적 실천을 챙기진 않는다. 존취라는 용법은 아직까진 남녀의 외형적 매력에 국한되어 있는 듯하다. '아니 저런 남자가 잘생겼어요?' '아니 저 여자가 정말 예쁘다구요?' '당신 눈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요?'라는 뜻이 한꺼번에 담긴 이 익살스러운 '존취'는 허나 정작 문화적 취향의 전쟁터인 영화나 음악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쩌면 존취는 취존이 갖고 있는 '취향을 밝힌다는 것에 대한 불안'을 더 떠안은 표현일 것일까. '취향 없는 취향'의 시대를 사는 '자신의 자신 없는' 상태를 극도로 방어하기 위한 용법일까. '존취'의 인류학이 궁금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