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후배님의 문화연구에서 이론에 대한 심화 연구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보면서 오랜만에 학교 다닐 적 생각이.

 

 

1. 현실적으로 봤을 때 문화연구는 학계의 '아싸(아웃사이더)'로 계속 남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연구자는 내가 보기에 부르디외의 '성찰 세포'를 잘 살리면, 문화연구자가 속한 학계 내부의 건실한 비판자, 속된 말론 영양가 있는 '뒷담화쟁이'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2. 지금 문화연구가 학계라는 구조 속에서 '아싸'를 유지하는 건 학계라는 구조 자체가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성찰성' 혹은 '메타적'인 측면을 '전시 도구'로 삼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을 고민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연구는 지금의 아싸를 유지해야 '문화연구'처럼 보이는 위치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조금 열려 있는 학자들이 이른바 우석훈의 88만원세대 구도처럼 젊은 연구자들 짱돌 들어!를 좀 도와주면서, 학계의 성격 변화를 유도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젊은 세대 연구자들이 학계의 생존성을 감안할 때 문화연구를 배척하는 상황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3.문화연구는 어떻게 이론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을까. 문화연구자들이 할 수 있는 위치를 현실적으로 보면 1) 학계 내부의 이론 소비 속도와 수용 형태의 부작용 비판이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이기에 자신들이 속한 주류 학회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 2) 1)을 심화시켜 건설적인 대안을 내어놓는 것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게 사실 이게 아니었어"식의 이론 연구를 통한 발견. 사실 문화연구에서 이론의 깊이 있는 연구를 원하는 분들은 2)에 중점을 둔다는 생각이. 1)은 내가 일찍이 '문화연구의 실패한 성찰게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2)의 고민은 그렇다면? '문화연구적' 이론이란 존재하는가? 대답하기 어렵다.

 

4. 문화연구자들이 귀가 얇다는 건 일장일단이 있다.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그런 건지, 그런 사람들이 문화연구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문화연구자들은 뭐 하나를 하면 잘 꽂힌다. 그리고 잘 식기도 한다. 그래서 이른바 '문화연구의 실패한 성찰게임'에서 잘 나오는 논리가, "야 이제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해" "야 랑시에르가 문화연구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는 거야"라는 식. 좀 시기가 지나면 마르크스는 다른 누구로 바뀌어 있고, 랑시에르도 다른 누구로 바뀌어 있다.

 

5. 그런 면에서 무슨 이론이 문화연구에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선에서 이론 연구가 이뤄지는 것보단 차라리 그런 거 아예 구애받지 말고 그냥 뭔가 필이 팍 오는 그 이론만 꾸준히 버티고 오래 보면서 자기 길 가면,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문화연구자였네?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해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긴 글을 꾸준히 못 쓴 지가 2011년 2월을 마지막으로 1년이 지났다. 중간에 서평 요청을 받아 겨우 숨을 돌렸지만, 불만족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또 긴 글을 못 쓸지 모른다. 그래서 긴 글을 못 쓰는 이유와 슬럼프에 대한 긴 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

사실 편집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자신감은 잃은 부분은 문장이었다. 더 나아가 자신감을 잃은 부분은 '문자'였다. 글자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면서, 계속 내 마음속의 생각이 붕붕 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이는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자신감을 잃는다는 건, 글을 쓰면서 손이 떨리는 데 있지 않았다. 글자를 쳐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이건 분명 편집이라는 내 밥벌이가 된 행위의 숙련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글자에 대한 확신은 글을 잘 쓰냐, 못 쓰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글을 잘 보냐, 못 보냐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글들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나는 정녕  글자를 정확하게 보면서 쓰고 있는 것일까.

 

#2

 

이 생각의 과정은 원고나 책을 읽는 행위의 자기분석을 요구했다. 글을 읽는다-글자를 본다의 연결성 속에 읽는다/본다로 일단 내 행위를 쪼개어보았다. 읽는다는 본다를 포함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두 행위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 혹은 괴상한 추락.

 

#3

 

조절되지 않은 찝찝함 속에서 글자는 떠돌고, 떠돌았다. 140자의 감옥 속에 유랑하는 글자를 잠시 가두어,  생각이라는 놈과 대면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엉덩이에 낀 팬티 만지듯, 부자연스러웠다.

 

#4

 

글자를 제대로 보지 못하니, (이 말은 곧 단순한 오자 수정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를 대하는 내 마음의 부실함과 가장 긴밀하게 만나는 글자 스스로가 구현해내는 개념이다) 또 하나의 구멍인 입에서 냉기가 마구 나온다.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냉기, 직관에서 나오는 얄팍한 튀는 시선의 냉기. 닿으면 얼어버릴 것 같다.

 

#5

 

손은 뜨겁다, 다만 눈이 차갑다. 눈이 차가워지니 글이 안 써진다.



 
 
후와 2012-03-24 05:08   댓글달기 | URL
한동안 한글로 된 책을 못 읽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교정을 계속 보면서도 책은 읽지 못하겠더군요... 힘내세요!! 오랜만에 들러서 별 영양가도 없는 댓글만 남깁니다^^

얼그레이효과 2012-03-26 06:08   URL
후와님, 오랜만입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1

『서울대 명품 강의 2』(글항아리, 2011)는 두 번째 책임 편집을 맡은 책이었다. 이 책을 편집하면서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 '대학출판부의 현실'을 깊이 생각해봤다. 솔직히 말해 출판계에서 '하버드빨'은 존재한다. 에이전시에서 몇몇 외국 유명 대학 출판부의 카탈로그를 보내주면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선 어떤 책을 냈는지 챙기게 되는 건 시장의 수요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빨'이라는 표현이 지적 속물 같은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이야기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진부한 이야기만 쏟아져나올 것 같아 싫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동경하는 대학교와 그 대학 사회가 만들어가는 지식 생산과 소비 과정의 책임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관점에서 현실을 돌아보면, 한국 대학교 출판부의 현실은 꽤 열악하다. 대학교 출판부에 잠깐 몸을 담았지만 출간 도서의 뚜렷한 맥락이 없는 건 정말 문제다. 편집진이 주도적으로 자신들이 낼 '지식의 컬렉션'을 대중에게 적어도 출판부가 속해 있는 대학내 학생들에게라도 전해야겠다는 강한 의도가 있어야 하는데. 짧게 말해 '주먹구구식' 출판의 흐름으로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교수들이 자신의 강의로 쓸 교재가 주를 이루고, 가끔 언론 등에서 다룬 "대학 출판부도 상업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다"란 소식은 그냥 단막극 수준의 제스쳐로만 보인다.

 

 대학 출판부의 '상업 브랜드' 출범이라는 건 간단하게 '대중 취향'이라는 개념으로 허투루 묶을 순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사회적 주제를 좋아하며, 그것을 하나의 좋은 지식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까, 라는 문제와 이를 독자들이 알기 쉽도록 짠 구성(목차)이 필요하다.

 

 

#2

출판계에서 '-강의'라는 컨셉이 유행한 지 꽤 되어간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이 주최한 시민교양강좌 2011년도 내용을 '단행본' 형태로 변환시킨 『서울대 명품 강의 2』는 1권보다 필진은 줄어들었지만 무엇보다 '요즘 사람들'이 갈구하는, 그리고 일상에서 반드시 챙겨봄직한 주제를 '언급'해보자라는 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흔히 '-연구원'하면 대중과 괴리되었다는 생각이 많은데, http://css.snu.ac.kr/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챙겨 읽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논쟁이나 학문 이슈들이 제법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제 좀 도전해보고 싶은 성격은 좀 더 '하드한' 책이다. 그린비나 길 같은 그리고 문학동네 인문팀이 내는 컬렉션에서 조금 더 친절한 책들. 물론 친절=쉬움이라는 성립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친절이란 책의 목차에서 드러나는 구성이다. 각각의 쉬운 문장도 중요하겠지만, 책을 이리저리 챙겨봤을 때, 사람들이 이 책 읽어야겠다는 목차. 무엇보다 하나씩 '범주화'시켜주는 목차이면서 저자가 자기도취에 빠져 각각의 글에 심혈을 기울이되 전체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는 목차.

 

그리고 이 목차의 범위를 확대시켜 각 대학이 만들어가는 '지식의 목차'가 분명 있어야 한다는 생각. 이 일을 대학교 출판부가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책을 '내버리'는 일이나 '내주'는 수준이 아니라 지식을 적극적으로 조립, 조합, 변환시키는 과정을 대학교 출판부가 더 고민해줬으면 하는 생각. 그리고 여기에 단행본 출판사와의 협업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박효엽 선생님의 『불온한 신화 읽기』(2011)는 엄밀히 말해 내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에 인도 철학의 '인' 자도 몰랐던 내게 이 책의 내용은 큰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이젠 내용의 옥석을 가리며 비평의 시선을 견주는 일에 대한 비중 만큼 '물질'로서의 책을 만드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독자들은 어떤 글자를 썼을 때 이 책을 술술 잘 읽을 수 있을까? 책을 손으로 잡았을 때 판형은 어떤 게 적당할까? 기본 먹색(검은색)과 잘 어울리는 별색은 무엇일까? 등 이 일은 내용을 잘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스타일의 테크놀로지'였다.

 

이 스타일의 테크놀로지가 꾀하는 건 결국 유인誘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인에서 표지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 표지의 변화를 간단하게 살펴볼까.

 

 

 

 

 

 

 

 

 

 

 

 

 

 

 

 

 

 

 

 

 

 

 

 

 

 

 현재 표지로 오기까지 몇 차례 수정이 있었다. 제목 또한 『세상의 눈으로 바가바드기타를 읽다』『신화의 거짓말』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불온한 신화 읽기』를 택했다.

 

이 제목은 이중적이다. 인도 최고의 경전이라는 여겨져온 바가바드기타 자체가 '불온한 신화'라는 것 그리고 경전 자체를 선의에만 입각해서 읽는 것을 경계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살리고자 '신화 읽기의 불온성'을 강조하려 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다는 건 불온한 신화를 만나는 일이자, 신화 자체를 불온하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용어를 쓰자면 이 책은 바가바드 기타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이 책은 다행히 서로의 멱살을 잡을 필요도 없고, 트위터로 날을 세울 필요도 없다. 오히려 느긋하게 한 장씩 넘기며 책을 더욱 예리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분위기의 책이다.

 

 

 

이런 분위기가 필요한 건 무엇보다 이 책이 '생각과 여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가슴도 중요하지만 머리도 중요한 것 같다. 머리를 통해 장면을 상상하는 것. 인도에 가면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바가바드기타의 주인공 크리슈나 신과 아르주나의 그림 속 배경을 그려보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이 책에 담긴 글자는 허공에 있지 않고, 땅에 있게 된다. 어떤 책이든 그렇지만, 이 책은 더욱 그렇다. 몰아치고 계속 몰아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나 여전히 하늘만이 아니라 땅 냄새를 챙기고, 땀 냄새도 챙긴다. 사람의 가치를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화를 통해 신에 대한 추앙을 무조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속살과 속내를 본다는 소위 '불경한 자의 독해'가 오히려 신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게 저자의 논지이다.

 

이 책의 장점은 저자의 머릿속에 짜여진 한 편의 희곡 같은 구성이다. 누구든 보이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서 춤을 추거나, 어제 봤던 드라마 속 캐릭터를 따라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은 잘 쓰다가 내버려둔 메모장을 챙겨 자신만의 이야기를 끄적거린 경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선보이는 희곡적 구성은 '단독의 방'에서 시작된 느낌을 준다. 오직 들숨, 날숨의 낌새만이 채워진 방 속에서 저자의 머리에만 소음이 부풀려져 있는. 그래서 이 소음이 자아내는 요란함은 불온하게 신화를 읽는 원천이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문화 연구를 전공했기 때문에 편집을 하면서 닫는 글 <기타>라는 상품이 덜 팔려야 <기타>가 되살아난다, 가 가장 흥미로웠다. 이 챕터는 저자의 철학적 시선이 '정신의 자본주의화'라는 지점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요가는 어떻게 우리에게 철저하게 유익한 상품이 되었는가. 저자는 바가바드 기타를 통해 신의 섭리만을 좇던 관습적 독해 대신 우리 시대의 신이 된 '자본주의의 섭리'를 파헤쳐보려 한다.

 

이 책을 통해 인도는 누구나 한번쯤 다녀와서 자신의 여행 경험담을 전파하는 나라가 아니다. 역사적인 치밀함, 사회에 내재된 쟁투가 도드라진 나라다. 신화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결국 그 신화가 '만들어진 '사회의 마음'을 읽는다는, 이젠 제법 상식적인 시선의 기본기를 갖춘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의 부제를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로 지었다. 이유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을 종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화와 신비화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다. 한 글자 차이로 우리는 신화를 통해 위험에 빠질 수 있고 때론 그 위험이 위기가 되어 이 시대를 성찰하는 데 필요한 사유의 주요 수단을 챙길 수도 있으리라.

 

다시, 생각이다. 



 
 
 

새로 만들려던 둥지에 썼다 망한 글.

 

 

 

 

 

 

 

 

 

 

 

 

 

 

 

 

 

 

 

 

1. 재판장의 극장화 

 

사실 <부러진 화살>에서 눈여겨볼 점은 김경호 교수(안성기 역)나 신재열 판사(문성근 역) 간의 줄다리기가 아니라, 그 줄다리기를 관람하는 법정 내 방청인들이다. 방청인들은 재판을 관람하면서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영화는 사운드 처리를 통해 희미하게 그리고 서서히 재판에 대한 방청인들의 개입을 시도한다.(그리고 끝내 방청인들의 개입은 시각적으로도 분명한 소동으로 이어진다.) 이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김경호 교수가 벌이는 투쟁에 점점 동참하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만약 이 영화가 시종일관 판사, 검사, 변호사, 피의자의 '진술'로만 진행되었다면 영화적 재미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김경호 교수가 맞닥뜨린 사법 권력의 부조리함을 법정 내부에서 영화 관객과 같은 처지에 있는 방청인들의 시선과 병렬 배치시키는 것. <부러진 화살>에서 방청인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큰 기능과 효과를 갖는다.

 

법정의 질서와 극장의 질서는 닮은 구석이 있다.  두 공간 다 '침묵'을 지켜줄 것을 요구한다. '소리의 개입'은 영화를 보는 자를 향한 방해이자, 이는 곧 영화에 대한 방해로 여겨진다. 법정도 마찬가지다. <부러진 화살>에도 종종 나오는 장면이지만 판사는 부단히 법정 내 방청인들에게 침묵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방청인들의 소란은 곧 법 집행의 방해로 간주된다. 그러나 영화사를 잠시 뒤져 보자. 극장에서의 침묵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영화사 초기, 기차가 달리는 장면을 본 관객들은 놀람을 어떻게든 감추지 못했다. 영화에 대한 신체적 반응은 주위 사람들이야 어떻든 상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 보기는 '소리'의 측면에서 침묵에 대한 동의를 뜻했다. 초기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의 신체적 반응을 통해 영화 속 장면의 '사실'을 인식했다. 소스라침은 영화적 장면과 사실로서의 풍경 그 자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하나의 징표였던 것이다. 그 후 영화 관객의 침묵은 근대적 징표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근대인으로서의 문화적 기준이 세워지고, 그중 영화 보기상의 침묵 행위는 자신이 근대인이라는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잠시 점핑. 법정과 극장은 '근대적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해왔다. 그런 점에서 <부러진 화살>에서 인상깊었던 법정 내 소란 장면은 근대화라는 체제가 가진 인간이 만들어온 어떤 엄밀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가진다. 법정 내 방청객이 보여주는 재판의 부조리함에 대한 적극적인 / 즉흥적인 '반응'은 영화사 초기의 '전근대적'인 영화 관객의 반응으로 간주되어온 신체적 반응(소스라침을 비롯한 이외의 표출 행위 등)과 만난다. <부러진 화살>에서  이러한 '전근대적 효과'는 '근대성'의 모순을 폭로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듯하다. .(김경호 교수는 영화 속에서 법과 수학은 문제가 분명하면 답도 분명하다며 체계의 엄밀성을 강조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외려 법이 갖고 있는 온전함/엄밀함의 이미지를 향한 비판적인 메시지로 전환되는 듯하다.)

 

 

2. 극장의 재판장화

 

이제 영화 바깥 이야기. 하지만 영화 안 이야기이기도 한. 나는 사실 이런 류의 영화가 나올 때마다 '영화적인 것'을 탐문하고 싶다. 이 영화 속 내용이 얼마나 사실이고 허구냐를 가르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 최근 불고 있는 '사법 권력 비판'의 테두리에서 이 영화를 계속 교과서적으로 만들려는 언론의 제스쳐를 비롯한 여러 반응은 사실 점점 '영화적인 것의 퇴보'를 재촉하고 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좋은 작품이란 것은 한 소년이 사법 제도의 틀 속에서 죽어야 하는지, 아니면 살아야 하는지를 고심하는 '토론 내용'자체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화적 장치였다. 밀폐된 공간을 상징하는 각 인물들의 얼굴 표정(더운 날씨에 못 견뎌 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선풍기 등. <부러진 화살>도 이런 식의 감상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극장의 안과 밖은 영화 속 재판장을 방불케 하는 것 같다. <부러진 화살>이 갖는 사회 고발의 기능도 중요할 테지만,  우리는 이제 영화를 하나의 '사회 교과서'로 삼아버리는 시대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