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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훼손하는 그림, <배심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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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스포일러 유) 근래 본 국내 상업영화 중엔 <배심원들>(2018, 홍승완)에 조금 눈길이 갔다. 그 이유는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나 <12명의 마음 약한 일본인>처럼 배심원제를 통해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을 곱씹을 수 있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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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속 대사와 촬영의 특색에서 강조되는 시각적 요소, 시각적인 것이 비유로 나타나는 요소가 계속 생각났다. 2008년 한국에서의 첫 국민참여재판을 모티프 삼은 본 작품에서 법원장(권해효)은 담당판사 김준겸(문소리)에게 거듭 부탁한다. 이 재판, '그림이 되어야 한다'고(이 대사는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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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용상 18년째 재판을 맡아온 베테랑 김준겸에게 법원장이 무슨 의도로 그림이라는 비유를 쓰는지 파악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다. 김준겸은 첫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법조계가 원한 그림을 그리는 판결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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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나 영화는 8번 배심원 권남우(박형식)의 주도로 법조계가 원하는 속도와 상이 담긴 그림(판결)을 내놓지 않는 설정을 걸어두고, 영화는 무죄와 유죄라는 분명한 그림 대신, 그런 그림을 얼른 그리자고 꼬드기는 때에 "싫어요"라는 선명한 응답을 내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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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조계가 원하는 그림의 완성은 점점 유예되고, 페이스는 배심원들로 향한다. 배심원들은 법조계가 언론을 통해 법조계와 언론계의 구미에 맞는 그림을 그리려 할 때마다 느릿느릿한 숙고와 숙의로 제동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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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판사를 위시한 법조계-전문가들은 일반인들이 그리는 법의 그림(배심원들의 숙의)에 마음을 열게 된다(공교롭게도 배심원 중 유일하게 법 전문성과 친숙한 법대생인 1번 배심원의 이름은 윤그림이다. 윤그림은 시기상 법전문성을 충분히 숙지할 수 없는 애매한 전문가로서 다른 배심원들과 법 전문가 사이에서 그려볼 그림을 위한 절충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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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화의 첫 장면. 법원 바깥이 뿌옇게 처리되다 사진기자들의 무수한 플래시 세례가 나오고, 정작 기자들의 의도와 달리 그 세례를 비껴나간 김준겸 판사의 모습은, 영화 말미 국민참여재판을 기념하고자 법원 내에 걸린 배심원들의 단체사진 중 유일하게 눈을 감은 권남우의 모습과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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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권력과 권위가 부여된 공적 기관이 인민people의 일상엔 아랑곳하지 않는 그림을 신속히 그리려 할 때, 인민은 그렇게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기관의 속보이는 의도에 부응하지 않는다.
아울러 김준겸 판사와 배심원 권남우는 첫 국민참여재판의 결과와 그 의의가 언론을 통해 괜찮은 그림이 될 뻔한 순간, 취재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그림을 훼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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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배심원들>은 사법부를 비롯한 파워엘리트들이 꾀하는 민주주의와 정치적 실천이 정작 우리네 인민과 멀어져온 그림을 주시하면서, 그러한 그림을 훼손하는 그림을 선보인다. 이것은 영화가 당신에게 제시할 수 있는 괜찮은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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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을까

_대중영화, 그 정치적 읽기의 매혹과 한계 


1. 대중영화, 특히 '천만영화'로 비롯되는 작품에서 정권과 정치, 시대/당대의 분노와 좌절을 징후적으로 읽어내려는 건 빠져들기 쉬운 유혹이자 거부하기 어려운 매혹이다. 며칠 뒤 학생들과 '천만영화라는 감정'의 테마로 이야길 나눠야 하는데, 사실 나는 이 확신과 자신이 묻어날 수 있는 테마에서 꽤 오래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지금도 혼란스럽다.


2. 평자가 비평의 초반부에 어떤 무력감이나 곤경을 표하는 게 그리 낯선 일은 아니나, 여전히 완료된(그것이 유사-의 형태로라도) 귀결점(그것이 영화의 의미를 넓히든, 안온한 윤리적 소실점의 제시든 무언가 손에 쥘 수 있는 목소리를 '예리하다'는 평으로 보고 싶어하는 도착지로서)이 익숙한 가운데, 그럼에도 그 곤경과 무력함을 숨기지 않는 쪽은 내게 어떤 모험으로 다가온다.


3.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나는 최근에 영화평론가 김경욱이 쓴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 '국제시장'에서 생긴 일》을 읽고 많이 실망했다. 쉬이 정의하기 어렵지만 소위 '정치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최근 대중영화의 한 장르에서 정작 '정치적 탈색'이 일어나고 있음을 논하는 이 비평집은 평자가 대상으로 삼은 너무 쉽게 정치를, 사회를 들이미는 요즘 영화들만큼이나 비평 또한 그러했다. 차라리 신중함 측면에선, <부러진 화살> <도가니>를 통해 고다르의 관점 "정치에 대한 영화"/ "정치적인 영화"를 숙고해본 남다은의 옛글 <정치영화는 정치적인가>(《에프》기고)가 나았다.


4. 하나 남다은 또한 예술=이데올로기라는 투박한 관점의 개입으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대중적 "분노의 드라마"를 고찰하는 데 대한 허술함을 잘 털어놓았으면서도, 자신이 대안적 모델로 삼은 영화들에 내재된 실험성과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신하고, 그 목소리를 영화의 정치적 실천으로 내세운다. 남다은은 '불온한 실험성', 그 또한 글에서 경계하려 하지만, 여전히 매혹될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 특유의 '유사-멸망'의 정서에서 오는 답없는 공간들의 은근한 자기 확신에 대해 쉬이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 물으면서 나는 또 방황하는 내 마음을 확인했다.




5. 그리고 여기 노무현을 관통하는 두 영화평론가의 글이 있다. 하나는 <변호인>을 다룬 허문영의 <살균과 표백>이고, 다른 하나는 김선일 피랍 영상을 논한 정성일의 <영화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다. 두 글 다 비평가로서 어떤 곤경과 난색, 괴로움을 표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두 글은 토로로 시작하면서 자신이 무얼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은지란 고백이 예상외로 평문의 열쇠가 된다. 어떤 불안과 무력감으로 시작하는 두 글은 결국 선명한 정치적, 윤리적 결단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비평의 테크닉이기보단 둘 다 쓰면서 작동하는 감정들에 자신을 내맡긴 결과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6. 다만 허문영의 글은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가 실화 속 인물을 신화로 가두게 되는 사회적 단계가 어떻게 정치를 삭제할 수 있는가란  차원에서, 정성일의 글은 윤리적으로 역겨운 것을 봄으로써, '봄(seeing)'이 어떻게 정치적 타개책이 아니라, 더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는가, 보기를 수행하면서 정치를 행한다고 확신하는 눈이 실은 '탈정치적 눈'이라 주장한 점에서. 여전히 영화와 정치적 독해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곤경은, 정치에 대한 살균과 표백이 일어난 영화상의 '재현, 선택, 배제'의 문제임을 의도치 않게 제시해버렸다. 그나마 정성일이 '보지 않음'이란 실천을 정치적 행위이자 윤리적 결단으로 확언하는 바는 투박했지만 필요로 한 지점이긴 했다.


7. 그러나 정성일이 피랍된 김선일의 비디오 영상을 보지 않음을 외치는 것과 다른 맥락일지라도, 여전히 볼 수밖에, 아니 보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보지 않음'이란 이 정치-윤리적 실천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야구팀을 향해 무관중 시위를 보여주자는 헛헛한 결의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8. 지난주 샹탈 애커만의 회고전을 다녀와서 마음에 남는 한 작품으로 나는 조금 생각을 정리해보는 중이다. 1999년 발표된 <남쪽>이란 작품이다. 텍사스 주 캐스퍼 시에서 일어난 '인종 차별 범죄'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류의 '법의학적 눈'으로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사건 이후, 보통 영화들은 사건을 다시 재현하고자 노력하며, 그 가상의 세심함으로 관객 앞에 '사실이란 허구'를 내놓는다. 그러나 애커만은 재현하기 위해 단서를 찾지 않으며, 증언의 목소리는 관객의 울분과 애도를 동원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애커만이 집요하게 잡아대는 이 '트래킹 숏'에서 비춰지는 길에 백인들에게 죽임당한 제임스 버드 주니어라는 인물을 둘러싼 흔적은 없다. 영화는 속된 말로 '그것이 알고 싶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인다. 여기서 밀어붙이는 어떤 무심함에서, 그것을 정치적으로 읽고 싶은 유혹과 아니, 삼가야지 하는 유혹이 서로 스며들며 마음을 어지럽힌다. 


9. 그렇다면, 이 어지러운 마음, 뭔가 정의하기 어려운 이 마음은 정치적인 것일까. 다시 돌아와 <국제시장>에서 덕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절삭된 한국 현대사를 비판하며, 여전히 국가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세대론의 헤게모니 각축전 으로 대중영화에서 정치를 읽어내며, 탈정치적인 것을 색출해내는 이 확신 어린 비평은 정치적인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정의할 수 없는 아니, 이 좀비 같은 현대인에게서 함부로 읽어낼 수 없는, 아니 읽어내기가 두려운 영화의 실험성과 그 비서사적 제스처들, 거기에 내재된 세계관의 징표를 우회하는 비평은 과연 정치적인 것일까.


10. 여전히, 그 어느 쪽이든 확신에 찬 말들 속에서 나는 <남쪽>의 집요한 트래킹 숏이 담아내는 길을 떠올리며, 우리가 알아야 할 일들에 대해 '그것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일까?'라고 묻는 영화의 질문에 대해, 영화로 행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이 무엇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해본다. 본다,  보려고 만든 영화에서 그녀는 정작 보여주지 않고 있으며,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만든 영화에서 그녀는 정작 아는 것에 무심하다. 괘씸하지만 고마운 영화다.  그 괘씸함을 통해 나는 다시 영화를 통한 정치의 발견을 더듬거려본다. 물론 더듬거리기 때문에 확신에찬 대답은 금물이며, 이미 실패를 예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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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6-03-15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호인].. 인상깊게 봤던 영화에요. 내용들이 떠올라서 VOD 사진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네요.(웃음)

얼그레이효과 2020-02-28 16:21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래되어 이 덧글을 보실진 모르겠지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시리즈 네번째 작품인 <만월의 밤>(1984)은 '영역과 성격'에 관한 이야기다. 


A 실제로 영화의 실내디자인을 책임지기도 한 주연배우 파스칼 오지에는 루이즈란 디자이너로 나온다. 현실 속 오지에의 미적 취향은 주인공 루이즈의 취향이다. 


B 삶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는지 신경쓰는 루이즈. 그러나 루이즈를 독점하려는 남자들인 도시건축가 레미, 작가 옥타브는 그런 루이즈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관계맺음을 자기 영역 안에서만 잘 발휘하려 한 채, 타인의 영역에 발들여놓는 걸 어색해하는 모습들을 그려낸다 


C 특히 레미와 옥타브는 자신의 실내 공간에선 기가 살지만 바깥에 나가면 사람들을 힘겨워한다. 루이즈는 그들을 간파하고 변화를 줄 것을 제안하지만 레미는 거부를, 옥타브는 외려 자신이 실은 사교적인 사람임을 강변한다 


D 영역을 확보한다는 건 일과 여가 사이의 균형, 삶의 패턴과 그 배치이기도 한데 본작에서 이를 인상적으로 연출한 장면은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될까'라고 묻는 대화씬이다. 영화에선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받고 그 누군가의 취향을 구경한 뒤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간다. 이때 자신이 늘 해온 삶의 패턴이 있는 주인공들은 상대가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냐고 말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영화에선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냐는 질문이 세 씬에서 꼭 한 번씩 등장한다) 


E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과연 서로의 영역을 확보해준다는 건 가능한가란 질문을 시종일관 던진다. 


F 영화엔 시적인 영화가 있고, 소설적인 영화가 있으며, 에세이적인 영화가 있는 것 같다. 로메르의 영화는 아마 에세이적인 영화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의 영화엔 아주 세심하고도 인상적인 말들은 없지만, 우리가 늘 쓰는 말들의 산문적 배치 속에서 곱씹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다. 


G <만월의 밤>하면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두 여성을 가진 자는 영혼을 잃고, 두 집을 가진 자는 이성을 잃는다"는 로메르 본인이 지은 격언이 유명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과 영역을 늘 고민하는 여성 루이즈가 카페에서 처음 만난 이에게 듣는 어떤 한마디를 더 좋아한다. "동전을 던져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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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매체는 발전하지만, 매체에 대한 성찰은 외려 과거를 참조해야 할 때가 많다. 매체에 대한 성찰은 다종다양한 테크놀로지의 존재, 능수능란한 수용과 지식에 있는 게 아니라, 매체가 희소했던 시대에 사람들이 보여준 감정, 유령 같은 행위에 내재된 당시엔 해석할 수 없는 어떤 깨우침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B. 버스터 키튼의 <카메라맨>(1928)은 이를 입증하는 영화다. 1919년부터 미국에선 뉴스릴카메라가 활용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 뉴욕은 사건과 사람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든 사진가들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버스터 키튼은 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을 찍어주는 사진사인데, 우연히 언론인 샐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샐리가 다니는 언론사에 입사하려 한다. 그는 오디션을 거치면서 '정지된 사람의 모습'이 아닌,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찍는데 <카메라맨>은 이 오디션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연발의 해프닝을 담은 작품이다. 


C. 이 영화의 공동감독이기도 한 키튼은 사건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사건을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드러낸다. 영화는 사진의 시대에서 영화의 시대로 신체와 그 감각을 안정적으로 옮겨가는 미국 사회의 풍경 속에서, 결국 좋은 사건(으로 인정받는 것)이란, 누군가의 모습이 있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사건이 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D. 사건이 중요해지고 그만큼 이를 담아낼 매체의 발전과 엘리트, 대중의 호기심도 커지는 시기. 그러나 이 영화는 오늘날 대중이 사건에 느끼는 피로감을 예언이라도 한 듯,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 사건과 특종, 카메라맨들의 활력이 두드러질 시기에 <카메라맨>은 사건에 대해 어떤 허무함을 강조한다. 


E. 그리고 그 허무함은 "스톤 페이스"란 별명답게 무표정이 자아내는 버튼의 유머로 인해 도드라진다. 이는 며칠 전 별세한 움베르토 에코가 좋아했던 개념인 "우모리스모", 즉 희극에서 어떤 비극을 아울러 느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이어진다. 


F.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지만, 나는 자기 예언적인 실현을 담은 영화에서 어떤 매력을 느낀다. <카메라맨>은 카메라, 사람, 눈, 시각성, 보는 대중에 대한 미래를 스스로 내장했던 작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키튼은 희극이란 도래하는 비극을 감지하는 예술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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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이후_아케로 마냐스의 <노벰버>(2003)를 봤다. 재미란 말이 재미가 없는 것처럼(이는 금정연이 어느 글에서 썼던 표현이다), 시도란 말에 '시도스런' 기운은 없다 


A 시도란 것에 시시함을 느끼고 있음을 표해야 우리는 그 동여낸 마음을 갖고 그나마 상처를 덜 받고 살겠거니 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어쩌면 방금 꺼낸 그 말을 괜시리 왜 하냐고 이죽거려야 하는 단계까지 와 있는지 모르겠다 


B <노벰버>는 '선언'과 '시도'에 관한 영화다. 작품은 순진하고 우직하다. 그래서 더 생각할 거리를 준다. 


C <노벰버>는 '수행성'에 관한 영화다. 언어는 표현될 때 그 자체의 힘으로 인간을 얼마만큼 움직이게 하는지, 더 나아가 고뇌에 빠뜨리게 하는지 영화는 그 곤경을 그려낸다. 어떤 강제와 어떤 자율이 이상하게 섞인 상태에서 '노벰버'라는 극단의 인물들은 수행성의 덫에 갖히고 만다 


D 애초에 자신들의 시도를 견고히 해줄 극단 내 '약속의 언어'가 자유 대신 감옥이 될 때, 인간은 예술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E 우리가 한 번쯤은 들은 대답일 수도 있겠으나 이 영화가 후반부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공연 씬은 , 왜 인간이 '시도 이후'의 예술에도 결국 '시도'를 찾게 되는지를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요즘 시대엔 점점 찾아보기 힘든 어떤 대의를 위한 자기 희생적인 우스꽝스러움을.


 F 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서 숙연해지거나 혹은 야유를 보내거나. 이 틈을 비집는 새로운 질문을 여전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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