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늘 웃고 다녀서 그런지 사람 좋다는 말을 평소에 많이 듣는다(내 입으로 내가 평가하긴 좀 그렇지만 -.-). 그렇다고 삶 자체가 느끼하고 톡쏘는 맛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생각보다 많이 까칠하고 헉헉대며 열불나는 일에는 앞뒤 안가리는 면도 있다. 그리고 자존심도 제법 쎄서 제대로 된 대우를 안 해준다 싶으면 더 과한 친절함을 통해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무엇보다 '격식'이라는 걸 싫어해서 '점잖은' 데를 가야한다고 할 때 갖춰야 하는 드레스 코드 같은 것을 못마땅해 한다. 편한 운동화 한 켤레, 티셔츠 한 장, 슬림한 청바지, 큰 백팩 하나, 검은 모나미 유성펜 가득 담긴 필통과 수첩만 있으면 인생은 그럭저럭 누구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대학 입학 하고 나서 나름대로 내 스스로에게 지켜왔던 어떤 상이었다. 

2  

그런 내가 14년 만에 졸업식에 갔다.(식을 다 참여했다) 중학교 졸업식을 1997년 2월에 했으니 14년 만에 갔다. 여기서 '갔다'는 의미를 '식의 모든 참여'로 뜻을 바꿔보자면 중학교 졸업식 이후 내가 이 세레머니에 제대로 참여한 적은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없었다. 원래 이번 대학원 졸업식도 가지 않으려 했다. 경상도에 계신 부모님이 30분 짜리 졸업식 하나 보러 오려고 먼 고생을 하는 게 싫었다는 것은 원래 이런 식에 참가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대는 표피적인 그리고 진부한 이유일테고, 그것보다는 내 스스로가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철칙을 한 번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철칙 준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친구에게 졸업식을 가기 싫다고 하니 "인생을 모나게만 사는 것도 좋지 않다'면서 적극적인 참여를 권유받았다. 결국 그 친구의 도움으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정장이라는 것을 장만했다.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ㅁ' 아울렛에 들러 나는 내가 입을 정장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소비와 선택, 특히 나를 위한 소비와 선택에는 참 취약점이 많다. 종교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 가족의 생활 형태로 인해 정작 우리 가족은 우리를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오랫동안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들어오는 '선물'이 있다면 그 선물은 이미 우리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할 무엇이었다. 그래서 난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선물을 준 사람을 무안하게 할 때가 많다. '내가 받을 방법'에 대해 난 생각보다 이 사회에서 나타나는 '친절함'의 기준에 미달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무엇을 선택해보라고 하면 '다 좋다'고 한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아무거나'가 주는 역효과와 유사하게 '다 좋다'는 누군가와 좋은 것을 사러 갈 때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나는 나에게 무엇이 잘 어울리는지 잘 알면서도 이상하게 처음은 늘 거부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나를 아는 사람들은 두 번을 묻고, 어쩔 때 세 번을 물어준다. 그때서야 나는 "이게 조금 낫긴 하겠다 그지?"라는 말을 살포시 꺼낸다.  

삶을 살면서 한 편으로는 뾰족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여린 면이 섞이다 보니 겉으로 나오는 것은 착한 미소. 이것이 내 삶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지 거의 20년이 넘었다. 이런 복잡한 측면을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 14년 만에 간 졸업식이었다. 졸업생들이 전통적으로 하는 '학교를 떠나며'라는 1분 스피치 시간에 나는 원래 '떠나는 마당에 대학원 욕이나 실컷 하고 가자'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이 블로그를 들린 이들은 알겠지만 대학원에 다니면서 내가 받았던 상처는 매우 컸고 나는 이 분노로 인해 이 곳을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막상 마이크 앞에 서니 역시 마이크라는 것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착한 말'들이 나오고, 내가 그동안 대학원 게시판에 쏟아 부은 분노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이 있다면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나왔다. 

부모님이 다시 내려가시고 집에 혼자 있는 시간. 나는 이런 '훈훈한 결말'을 원치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학의 몰락>이란 책의 서평을 부탁받아서 읽고 있는데 문득 지금까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 생각은 본 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수록 이 생각이 떠나가지 않았다. 졸업식장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말했던 '착한 사람'들만이 있었는데 나라도 못되게 굴 걸..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졸업식을 한 번 더 할 수도 없고 말이지. 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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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3-0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되게 구는 나쁜남자'에 대한 진지한 연구인가요?^^ 오랜만에 들러 마음의 한 조각 읽고 갑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3-07 21:13   좋아요 0 | URL
재습격님 오랜만입니다. 블로그 가보니 블로그의 두께가 멋지게 두터워지고 있던 걸요~ 저는 논문 쓰는 동안 감을 잃어서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냥 요즘 워낙 글이 안 써져서 하나 남겨봤습니다. 깔깔^^)
 

 

 

대학원 탈출! (기념으로 '차도남'설정 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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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1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2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7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2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2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7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 쓰는 동안, 알라디너 이웃들의 혜안으로 인해 많이 얻고, 깨달았습니다. 정말 부족하고 못난 글이지만, 대학원에 오면 누구나 다 쓰는 논문이지만 '나왔다는' 사실에 오늘은 나 스스로에게도 고마운 하루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죄인처럼 여기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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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1-18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하루 2011-01-1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드립니다. ^^

마노아 2011-01-1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어요. 축하해요.^^

Ritournelle 2011-01-1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

2011-01-18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드디어 끝나셨군요..!! 정말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과 키보드로 지샜을 지... 저도 1년 차에, 아주 걱정이 늘어나서 올해는 휴학 모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논문을 완성시킨 '선배'들을 보면 얼마나 부럽고 대단해 보이던지요. 정말 축하드려요!^^

비로그인 2011-01-19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바라 2011-01-19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제목만 읽어도 뭔가 정말 재미있는 논문일 것 같네요^^

2011-01-19 0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1-01-19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덕분에 저도 재밌는 추억을 많이 떠올렸더랬어요.

2011-01-19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1-19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겠어요~ 축하드려요.

수리 2011-01-19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축하합니다. 고생 많았어요 ^^

수양 2011-01-19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얼그레이효과 2011-01-2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 밀린 리뷰랑 페이퍼 좀 써야겠어요^^!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마늘빵 2011-01-2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1-26 16:09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 고맙습니다.^^
 

중앙도서관 4층에 들러 가지런히 꽂혀진 졸업논문들을 보면 그 '곤색찬란'한 풍경이 주는 묘한 감정들이 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감정들이 논문 속 본론에 있다기보다는 서론보다 먼저 등장하는 저자의 생각, '감사의 글'에 있다. 이 '감사의 글'이라는 공간은 사람을 참 착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게 자기 논문 쓸 때 제대로 안 챙겨준다고, 교수에게 으르렁대다가도 결국 마무리는 '급훈훈'해진다. "교수님,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저 이 대학원 안 왔을거에요.." 같은.  

한때 문학판을 휘감았던 '주례사 비평'만큼이나 '감사의 글 비평'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솔직히 논문을 쓰는 데 교수들이 그렇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는 혼자 하는 거다,란 말은 정말 맞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 공간이 오히려 한 텍스트를 완고한 자신을 격려하는 공간으로 채워지는 상상도 해 본다.  

철저한 학문 사회 비판을 매우 식상하게 만드는 건, 묘하게 이 판을 까는 이른바 '유사 - 감사의 글'들이다. 감사합니다,라는 마음 속에 담긴 어떤 응어리. 그렇게 내 논문이 마음에 안 들었냐와 같은 시선을 슬며시 비치는 '분노형 감사'의 글들을 볼 때면 이상한 쾌감이 느껴진다.   

이 시간에도 탈모를 고민하며 공부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여. 감사의 글을 분노의 글로 활용하기를. 아니면 자신에 대한 자화자찬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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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1 0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오후 졸업논문 예심을 봤다. 생각보다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는 좋았지만, 처음 느껴 본 당황스러움이 그 좋음을 상쇄시킨 것 같다. 많은 반론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제가 받은 지적은 그만큼 제 글이 못났다는 것이니, 글로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아마, 나같은 경우를 많이 봐서 그런지, 교수님들은 웃음으로 대응하셨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좀 '무서운(?)'말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 

오랜만에 찾아 온 여유. 친구들 안부도 묻고, 예전부터 나를 챙겨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람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만 지나면, '한국'에서의 대학원 생활도 끝이 난다.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할 기회는 시작인 듯하다. 이제 남은 인생은 그 기회를 위한 것으로 채워질 듯하다.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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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2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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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6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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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2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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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6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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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10-11-1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한숨 돌리고 다시 시작이군요. ^^

얼그레이효과 2010-11-29 18:12   좋아요 0 | URL
네..그렇습니다. 아프락사스님. 자주 블로그 들려야 할 터인데, 요즘 워낙 블로그질을 안 해서리.흐흐. 추운 날씨 건강하시고, 하시는 출판기획일도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루 2010-11-2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시 글이 보여서 이렇게 좋을 수가. :)

얼그레이효과 2010-11-29 18:13   좋아요 0 | URL
아이고,,^^고맙습니다. 저야 말로 좋을 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