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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신형철의 [이 사랑을 계속 변주해나갈 수 있을까]와 김소연의 [순교하는 장난]을 읽었다. 두 편 다 김수영에 관한 글이다. 읽고 나서 이 두 편을 중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형철의 글이 김수영에 관한 대서사시라면, 김소연의 글은 단막극 같은 느낌이다. 신형철이 답은 지문 속에 있더군요 하는 그다운 범생이의 마음으로 김수영을 우직하게 계승하려고 한다면, 김소연은 커피에 따라나오는 냅킨에 우연히 적어본 메모들에서 출발한 소소한 선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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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선언이라고 했지만 조촐하진 않다. 김소연은 소소함 속에서 김수영의 감각들을 꼼꼼하게 포착하고 배치한다. 이 시인은 김수영에게 천진성이란 감정을 발견하고 그가 언급한 '와선'에 호감을 느낀다. 부처를 체감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성실한 기운을 내뿜기보다 방구석에 누워 허공을 보며 부처를 느껴보려는, 그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 그것이 와선이다. 와선은 단지 건방짐이 아니다. 김소연에게 와선의 버르장머리 없음과 이에 기인한 천진성은 시대가 강압하는 정서와 맞붙기 위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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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은 김수영에게서 사랑을 끄집어낸다. 그는 김수영이 사랑을 모호하게 다뤄왔다고 말하며 이것은 김수영의 성실한 방황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김수영은 '사랑은 무엇이다' 대신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시를 통해 말해왔다. 사랑이 전자처럼 주어가 아니라 서술어가 됨으로써 신형철은 김수영에게서 어떤 필사적인 기운을 느꼈다고 진술한다. 그 기운은 419에 가닿아 있으며 김수영이 맞닥뜨린 현대사와 관련이 있다. 김수영은 사랑을 통해 절망으로 주변을 다 뒤덮고 싶은 체념 대신 그래도 남아 있는 기운의 긍정을 도모하려 한다. 그리하여 신형철이 주목하는 김수영의 사물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다. 한때 김수영은 이 물 끓음에서 소시민적 안일함을 느꼈다. 시대는 험악해지는데 '나'는 방 안에서 이 '들끓음'을 외면한 채 물 끓음에서 생명의 존속을 확인하는구나 하는 그런. 그러나 시인은 그 생각을 확언하지 않았다. 사랑을 욕망의 자리, 일상의 자리에 한 단계 '내려놓음'으로써 그것이 외려 우리가 다시 한번 시대의 불우함을 뜨거이 이야기하기 위한 예열이자 시작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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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은 오보에와 오케스트라의 음적 조화를 위해 오보에가 반음을 낮추어온 유래를 설명하며, 시인으로서 '낮춤'의 자세가 굴복이 아니라 성숙으로 가길 소망한다. 
김소연이 주목한 김수영의 사물은 '팽이'였다. 팽이를 세차게 돌리는 어린아해.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 풍경에서 낯섦과 그리움을 느끼는 어른. 그녀는 우리는 어른이라서 이미 서럽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천진성을 어른이 되어서도 나이를 먹은 만큼 잘 발휘할 것 같지만 그 기대는 빗나간다. 어른은 자신도 모르게 정돈되어간다. 시대가 요구하는 기운에. 그래서 팽이가 돌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 팽이가 동공 안에 들어와 접착된 상태일 때까지 그 순간에 중독되어보는 장면은 어른에게 남겨진 가냘프지만 붙잡아야 하는 새로운 선언의 동기가 된다.
김소연이 밝히는 선언은 다음과 같다.

"불온이 아닌 악동, 반란이 아닌 반동, 이것이 우리에겐 우리의 악기로, 우리의 음계를 찾는 우리의 주법이다."

신형철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를 듣고 보는 김수영의 옆에 다가가 그 기운에 청진기를 댄다. 정확성과 엄밀함을 목적으로 한 진단이 아니다. 고스란히라는 태도가 담긴 전달이자 공유의 목적이 담긴. 그러했을 때 김수영의 시 <사랑의 변주곡> 속 호소력은 "넉넉한 믿음이 있어서 아들을 껴안는 아비가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믿음을 믿어야 했던 아비"에서 나온다. 

믿음을 필사적으로 믿어야 했던 김수영은 신형철이 보기에 사랑을 필사적으로 사랑했던 시인이다. 그는 그가 체험한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자 충성, 성실, 헌신의 윤리를 보였다. 물론 이 글 말미에 바디우의 사도바울론을 끌어들여 기념하는 신형철의 태도는 그다우면서도 그답지 않은 '물끓음'이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김수영의 존재 의의에서 유훈을 이어받고 싶은 건 아니니까. 바디우를 '교훈적'으로 전유했던 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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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필자가 시도한 김수영의 조망 속에서 다시 한번 예술에게 아니 실은 내 자신에게 부탁하고픈 문장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을 느꼈다. 김수영이라는 인물을 사건을 기념하고 싶은 문장이 아니라 김수영의 감각들을 끄집어내고 해체하고 새로이 공유하고픈 문장 그리고 문장에 도취되지 않는 사유.
그러기 위해 이제 필요한 건 감각하다, 즉 계속 김수영을 '덜어내는' 시도일 것이다. 덧대려는 기운은 끌리지 않는다. 내가 우리가 보고 싶은 건 기념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이니. 다시 김수영처럼 턱을 괸 채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복사 씨 살구 씨의 존재인 인간을 믿어보려 한다.






 
 
 




"그의 말은 무조건 아양 일변도이다. 그래서 호감이 안 가는 걸까? 그의 그런 말이 나로 하여금 무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드니 말이다. 더구나 나는 대답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고맙게도 그가 내게 선택의 자유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런 자유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난감하게 만드는 귀찮은 선물일 뿐이다."

                                                                          - 롤랑 바르트, 「파리에서의 저녁 만남」



『작은 사건들』에 수록된 「파리에서의 저녁 만남」은 롤랑 바르트의 '저녁 일기'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기라는 형식을 고민했던 한 늙은 게이의 일기에 관한 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글이 일기란 무엇인가에 관한 특색 있는 아포리즘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바르트는 '나'의 취향, 기분, 조심성을 고려하면서 충실한 관찰자로 활약한다. 
이 늙은 에세이스트는1979년 8월~9월 파리에서의 '저녁들'을 기록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뿜어대는 열의의 출처와 기원을 의심하면서, '그다지 볼 품 없는' 식의 표현을 서슴없이 기록한다. 그가 간 식당, 그가 만난 사람들, 그가 참여한 저녁 모임, 그런 사람들이 읽어보라고 한 책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간혹 가다가 입을 싱그럽게 만드는 음식들만이 위로가 될 뿐이다. 

그는 만난 사람들이 주는 무례의 자극을 진찰하며 따가운 말들을 하는 이의 사연을 상상해보거나, 모임에서 나오는 장광설에 피곤함을 느낀다. 
롤랑 바르트가 '나는 ...이다'로 시작하는 타인과 사회가 잘하는 이름 붙이기의 유혹에 걸려들 표현을 일찍이 싫어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래서 그가 그냥 '나다'라는 단언에서 오는 그 불확실과 불안에서 하나의 저항적 의미를 구축해가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면. 아울러 그런 단언이 타인에게 쾌/불쾌의 경계를 주어 오해를 사지나 않을까의 염려로 이어진다는 걸 미리 감안한 섬세함의 소유자란 걸 안다면. 
그가 이 일기에서 보여주는 툴툴거림은 자연스러운 내뱉음과 의도된 실천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나는 뭔가를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대화중에 그것에 대해서는 정작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야 겨우 단 한 문장으로 줄여서(대화 내내 주제로 삼았어야 할 문제를) 할 뿐이다."

그에게 오직 호감의 대상은 젊은 게이의 신체,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의 그 어색하지만 순수한 장면이다. 자신에게 다가온, 자신이 느끼고 싶어하는 쾌락에 대해서는 온순해진다. 
때론 연약함을 자청하는 듯한 인상도 보인다. 바르트는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옆사람을 유혹하고 싶은 용기를 못 내는 늙은 자신에 대한 초라함, 사랑의 재판관 같은 시선으로 자신에게 애정을 표하는 사람에 대한 부담감을 고백한다. 그는 일기의 마지막에 '어떤 자신'으로 돌아오면서 침참한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한다.
타인을 떠나보내는 것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자신을 떠나보내는 듯한 중의의 풍경은 그가 주는 선물이다. 아프지만, 도움이 되는. 삶.

"섬세하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을 지닌 그. 온순하면서도 동시에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피아노를 연주한 다음, 일할 것이 있다는 말로 그를 돌려보냈다. 이젠 끝났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도 함께 끝났다. 젊은이와의 사랑이 끝난 것이다."





 
 
 

















순수증여라는 환상과 괴로움에 대해선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가 소개했던 시가 나오야의 「어린 사환의 신」을 최고로 쳤는데, 오늘 전상국의 단편 「달평씨의 두 번째 죽음」을 읽으면서 나오야의 작품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전상국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을 입체적으로 다루면서 볼프강 슈미트바우어가 연구했던 '조력중독증'의 세계를 블랙 유머로 다루고 있었다. 아울러 '미담의 사회학'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 에피소드를 통해 미담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에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도 아닌 인간이 전혀 보답을 바라지 않는 순수증여를 '흉내'내는 경우, 그것은 종종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타인의 상찬을 받곤 합니다"라고 말한다. 「어린 사환의 신」은 초밥을 먹고 싶은 가난한 저울 가게 소년 센키치를 본 국회의원 A가 센키치 몰래 돈을 내고 도망가 센키치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초밥을 먹게 해준다. A는 그날 이후 마음병이 걸린다. 그냥 도우면 될 걸 왜 내가 계속 타인에게 내가 도운 사람이라 인정을 받으려 하는 거지? 내가 행여 신이나 부처에게 내 선행을 인정받고 싶어했던 건 아닐까?라는 괴로움에 휩싸인다. 결국 그는 답답한 마음에 아내에게 신도 아닌 소심한 내가 괜히 그런 짓을 한 것 같다며 자책한다. 센키치에게 A는 '어떤 정체 모를 고마운 사람'이며 이 고마운 의혹은 A가 혹시 신이 아니었을까라는 상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상국의 작품은 조력 중독에 걸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가장 가깝고 친밀한 이들의 영역을 황폐화시키는지 보여준다. 곰국으로 유명한 보은식당(상호도 보은이다)의 사장 달평씨는 속사정을 모르는 바깥 사람들이 보기엔 천사이지만, 이런 선행을 지탱해주는 그의 안 사람들은 서서히 버거워한다. 식당을 관리하다가 은근슬쩍 사라지는 달평씨는 선행이라는 테마의 여행을 떠나는데, 주변 사람들과 그를 평소 존경하던 아들딸도 달평씨의 행적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고3딸은 심지어 아버지가 구렁이과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를 향한 아들딸의 존경이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로 해석될 수 없는 건 아버지의 행적과 실제 삶에 대해 아들딸이 접할 수 있는 정보라곤 아버지의 선행을 실은 신문기사와 묵묵한 어머니의 단조로운 답변뿐이기 때문이다.

달평씨가 원치 않게 미담 기사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보은식당은 이 미담 기사를 읽고 저 사람이 날 몰래 도와준 사람이구나라고 느낀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가게가 더 잘 되어야 정상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찾아올수록 식당의 사정은 더 나빠졌다. 덕분에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라는 감사인사를 받고 예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하는 말로 돌려보낼 순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선행의 금고 역할이었던 아내는 달평씨의 마음을 알고 슬그머니 돈봉투를 쥐어준다. 달평씨는 점점 이상해졌다. 미담 기사가 나간 이후 그는 처음엔 예전처럼 자기겸양을 표하다가 달평씨의 선행을 듣고 싶은 각종 공공기관에서의 강연 등을 통해 '편집된 미담' '부풀려진 미담'에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어갔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신조는 무너졌다. 자신의 선행을 알리기 위해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제 어린 시절 가난이라는 불행이라는 테마를 그는 나름 계발하기 시작한다. 작품 말미. 이미 제정신이 아닌 달평씨는 혼란스러워하는 가족을 향해 털어놓을 게 있다며 주변 사람을 가슴 졸이게 한다.
그리곤 말한다. 아들딸아 실은 너희들 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보은식당은 멘붕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유일하게 이 식당에서 냉정했던 한 사람이자 늘 묵묵하게 남편의 선행을 도왔던 아내가 한마디한다
"여보, 이젠 당신 자식들까지 팔아먹을 작정이에요?"

 마지막이 씁쓸하고 웃프다.

"가속으로 무너져내려 더 어찌할 길 없는 남편의 그 두 번째 죽음의 순간에 이처럼 거연히 부르짖고 일어선 그네의 외침은 우리의 달평씨를 다시 한번 살려낼 오직 한 가닥의 빛이었던 것이다."



 
 
 













이번 《말과활》4호에서 인상 깊게 본 글은 사진비평가이자 출판인인 김현호의 <언젠가 우리는 모두 CCTV가 될 거야>였다. 간혹 CCTV라는 기계-기능의 주시, 그 시각성이 과한 의인화에 기대어져 전형적인 파놉티콘의 논리로 가는 어떤 한계에 늘 아쉬웠는데. 필자는 여기서 CCTV의 감시 기능과 그 공포만을 열거해 뻔한 경각심을 도모하는 한계를 극복한다. 필자는 '식별'이라는 시각적인 행위- 아직까진 인간이 필요한 행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분별할 수 있는 카메라, 해석의 가능성이 도입되는 카메라가 가져올 우울을 진단하고, 안전이라는 가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납부'하는(그냥 제공이 아니라 납부라고 표현하고 싶은 게 아무래도 필자가 우려하는 자발적 정보 제공자로서의 시민과 그 구조에 대한 우려를 잘 드러내주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사회 현실을 우려한다.

필자의 글을 보고 번뜩 연관짓고 싶었던 책은 라깡 연구자 다리안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였다. 거기 2장에 '빅 브라더라는 신화'라는 챕터. 리더는 오스트리아 예술가 아니타 비텍의 작업을 소개하는데, 비텍은 집에서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그녀의 동선을 다양한 CCTV 카메라로 기록했다. 리더가 비텍의 작업을 분석하면서 가장 먼저 부탁하는 것은 이런 장면을 보고 바로 빅브라더라는 측면으로 해석하진 말자는 것이다. 저 카메라가 나를 감시하고 있어, 라는 측면이 중요한 게 아니라 리더가 보기엔 "카메라들은 그것들이 기록하는 대상들은 안중에도 없다" "우리를 보는 것이 항상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카메라에게 본다는 기능을 되돌려주는 비텍이라는 인간이었다.

CCTV를 둘러싼 안일한 논의에는 인간이 배제된 채 CCTV에 인간성을 부여하여 외려 인간미의 존속을 예찬하는 이야기가 있다.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나면 "우리 괜히 사람 의심하고 그러지 말죠"라는 겉으로 볼 때에는 우리 인간이잖아, 우리 인간으로서의 관계는 유지해야지라는 말을 잘 지켜줄 신뢰의 도구로 CCTV를 자연스레 선택한다. 허나 이는 '나'가 곤란하기 싫다는 것일 뿐 나와 너의 상호성이 성립되는 단계로 나아가진 않는다. 즉 CCTV는 관계의 불편을 예방하는 단계에서 그 기능을 멈출 뿐 실제론 과오를 잡아내는 데는 관심이 없는 기기일지 모른다. 어쩌면 CCTV에 대한 인간의 기대 또한 그럴 것이다.
CCTV를 통해 사건의 해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해소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재발되었을 때 CCTV는 걱정과 불안이라는 정서, 나와 관계된 이들과와 안전한 관계 추구와 동반된 묘한 쾌락을 동반한다. 물론 이를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다. 이 심연은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가 기꺼이 CCTV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그 심연을 남들과 함께 확인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리안 리더의 말처럼 "CCTV 카메라들은 보지 않는다." 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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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판계에서 도드라진 움직임 중 하나를 꼽자면 시대의 어른을 찾으려는 것 같다. 사실 찾기도 하지만 이는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현국 효암고 이사장의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라는 발언이 담긴 인터뷰를 비롯해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가 큰 히트를 치면서 이런 움직임의 의도가 보이는 서적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이 새삼 새로운 기획 작업은 아니다. 최근의 분위기가 갖는 차별점에 대해 '인문적-'이라는 성격 부여를 꼽고 싶지만 이는 그 분야에 심취한 사람들의 시선에 지나치게 기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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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려 마음이 가는 쪽은 '꼰대포비아'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확인받을 수 있는 영역을 만났다는 것 아닐까 싶다. 꼰대라는 적대적 표현 속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동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 보기에 꼰대라고 예상했던 쪽이라면 그 확인 속에서 피어나는 희열은 좀 더 클 것이다. 여기에 '늙음'이 주는 잔잔함과 온기가 더해짐으로써 존경이라는 정서는 보다 굳건해진다.

하지만 황현산 이후 시도되었던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그 성공의 여부를 평가하자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정일의 최근 책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을 통해 해석의 열림보다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에 더 가닿은 듯하고, 김우창의 『깊은 마음의 생태학』은 이 책을 만든 자들의 지나친 고개숙임이 페이지 내내 느껴져 부담스럽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국 인문학의 기념비적 사유라는 호칭을 두른 건 책 내용을 읽어보건대 김우창의 지난 공로를 생각하더라도 과한 호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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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속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우리 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이 우리 편이네?' 하는 시선을 주는 흔적의 모음이다. 이 흔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요즘 인기 있는 구호와 잘 맞물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하는 통쾌함을 주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볼지에 대한 고뇌의 영역은 주지 않는다. 속은 시원하지만 이 시원함을 넘어선 찝찝함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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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찝찝함의 영역을 고민하게 된 건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으면서였다. 사이드는 일찍이 말년성lateness을 고민했던 아도르노의 작업을 해부하면서 말년성이 오늘날 사회에 던지는 가치를 모색한다. 양해를 구하고 책의 내용을 조금 소화해보면, 말년성이란 인간이 시간을 통해 맞춰갈 수밖에 없는 신체-정신-건강의 영역이 문학-예술과 결부되었을 때 전자의 영역이 슬그머니 협상하는 인간의 한계에 맞선 '화해불가능'의 예술적 태도를 말한다. 더 나아가 '화해불가능성'이란 사람들이 뻔히 예상하는 처음과 끝이 선명한 통일된 큰 그림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붙일 수 없는 예술 작품 속 단절의 상태를 뜻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를 초월해 뭔가 극도의 숙성된 느낌을 보여주리라 예상된 노령의 솜씨에 "야 이거 내가 한번 만들어도 이것보다 잘하겠다"라는 격한 반응이 동반된 아마추어리즘이 발표된다면 우리는 이를  그냥 "이 사람 이제 예전같지 않구만 그래"라고 쉬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도르노의 해석에 탄복하면서 그를 범상치 않은 말년의 사상가로 위치짓고 싶은 건 바로 이 문제의식이었다. 이 문제의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사이드의 해석은 그런 말년성을 실천한 사람들이 세상에 아예 무관심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세상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을 갖고 이 감각을 곧이곧대로 쏟아붓는 게 아니라 조금 비틀어버리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예민함을 둔감함으로 포장해버리는 단계는 말년성의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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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와 아도르노가 주창했던 말년성을 실천했던 이들은 세상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고스란히 옮기지 않았다. 그들은 쾌 대신 불쾌를 택했다. 그럼으로써 주변에 머물렀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택한 불쾌의 전략은 오늘날 그들을 계승하려는 후예들이 고스란히 학습해 써먹고 있기에 그들이 마냥 외롭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과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로 뭔가 움츠렸던 울분의 해소 정도로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비판의 복잡다단한 결이 윤리의 호소로 환원되었으며, 이런 형식은 기껏해야 온화함 속에 묻어난 단호함 혹은 김구라 같은 직설/독설이란 형식을 빌려 빚어내는 통쾌함의 도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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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더 찝찝한 어른이 보고 싶다. 그가 대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대하고 싶은 인문적 아포리즘 따위가 아닌 살면서 부대낀 그 나름의 경험담이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골계로 표현되었음도 싶다. 이를 위해선 '꼰대'라는 표현이 이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한 평어로 작용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피아를 식별하는 격분의 언어로 전락하진 않았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랏 이 정도면 나 이 사람이 준 의외의 면에 감동받아 이 사회 그래도 아직 살만해'라는 정서에 만족하지 않고 '아 근데 이 사람 이 정도면 해주면 됐지. 아 이 이야긴 왜 꺼내? 사람 불편하게'의 정서를 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정서의 형식성을 고뇌 끝에 이미 내놓은 어른들에게도 우리는 주목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