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문학과사회 신인상 소설 부문 심사를 마치고

(*응모해주신 분들께 위로와 응원의 말 전합니다.)

전반전_난수(random number)의 발생과 조합, 그 확률값으로 조형된 미지를 선보이는 알고리즘아트 같은 작품이 여럿 올라왔다. 김환경과 차양진 등의 응모자들은 특정한 입력값이 뽑아내는 아웃풋으로 소설을 재정의하고 싶은 듯 보였다. 이들에게 소설이란 프로그램을 돌려버리면 나오는 산출물인 걸까. 그 생각이 심사 내내 떠나지 않았다. 낯선 것을 만나면 계보를 신경 쓰는 (나쁜) 습성이 있어서 이들의 참조점을 한유주로, 윤해서로, 김엄지로 간주한 채, 후보작을 기존의 궤도로 눌러 앉히려고 시도했지만, 재차 읽다 보니 그런 시도 또한 찝찝하고 헛헛했다.


외려 이들에게 짙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는 일찍이 난수 발생기로서의 문학을 고찰했던 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았다. 일단 2017년의 기록시스템이 되고자 하는 야심은 흥미로웠다. 한데 작품 속에 언뜻 보이는 ‘앙심’이 문제였다. 의미가 무엇일까, 꼭 주제가 드러나야 하는가, 표현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일까 등으로 정리되는 근본적인 질문을 군데군데 심어놓은 부분이 걸렸다. 이들이 심사자와 문학장을 향해 내보인 가운뎃손가락은 뭉툭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활개 치고 다니는 너드식 유머와 문자의 시각화 실험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메타-’가 든든한 작품설명서가 되리라 쉽게 믿었던 건 아니었는지 되묻고 싶다.


후반전_후보는 이서아의 「홍연」, 김환의 「기계」, 박새롬의 「마사히로의 식탁」으로 좁혀졌다. 어느 미술학원 청소부의 착란을 그린 이서아의 「홍연」은 색깔과 색감을 화살표로 삼아 장면을 계속 이어놓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이야기의 핵심인 화자의 불안을 점점 진공 상태로 가두어야 하는 설정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보통 사람들이 화자의 심리 상태에 부합하기 위한 대비로 너무 안일하게 소모되고 있어 아쉬웠다. 
아울러 심리를 최대한 예민하게 보여줘야 할 테마에서 분노와 무기력, 혐오와 나르시시즘, 무감과 매혹 같은 단어들이 작품 속에 스며들지 못하고 그대로 노출된 것은 약점으로 작용했다.


기계화에 대한 둔중한 고찰을 선보인 김환의 「기계」는 심사자 사이에서 ‘모처럼’이란 표현이 자주 나왔을 정도로 고전적 향취를 풍기는 고뇌가 매력으로 다가왔다. 도주와 추적이라는 구도, 굉음의 공포 아래 화자가 거주하는 공간을 일종의 ‘벙커’로 인식케 하는 긴장감의 유발, 인간이 기계가 되어가는 과정을 치명적인 잠식으로 영상화하려는 시도가 좋았다.
그러나 글쓴이가 중요하게 내세운 고민이 개념과 용어를 통해 제시될 때, 신적 권능·기계적 권능·기계성을 정의하고 싶어하는 의욕이 과연 화자가 처한 서사적 여건 안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진 의문이었다.


가족잔혹극을 표방하는 박새롬의 「마사히로의 식탁」은 동체시력이 빼어난 작품이었다. 마치 인물·동물·사물을 격자에 대고 인물·동물의 동작, 사물의 상태를 샅샅이 훑어내는 듯한 시도가 인상적이었다. 가령 지면을 스크린에 견준다면, 지면을 꼼꼼한 미장센을 올려놓는 곳으로 여기는 글쓴이는 소노 시온의 <노리코의 식탁>, 박찬욱의 <박쥐>에서 나왔던 ‘둘러앉는’ 식구와 그것이 주는 섬뜩한 분위기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하나 소설 속 주요인물 중 한 명인 기상목의 직업을 지리학자로 둔 점을 그냥 지나치기엔 글쓴이가 꽤 자주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 의문스러웠다. 왜 지리학자였는가라는 설정이 학자가 얻어온 명성 수준으로 처리되었던 점은 아쉬웠다. 과도하게 촘촘한 묘사가 소설을 피로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라는 동료 심사자들의 지적도 수긍할 만했다.


인저리타임_심사를 마치고 응모작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보았다. 혹시 내가 '문지적인 소설'이 무엇이라고 기출문제를 나누듯 주변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면, 그 감정은 무엇일까. 그리 들은 이후 과연 나는 어떻게 했을까.

오늘날 '문지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김신식 



(17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심사평 중에서. 《문학과사회》 2017 여름호 수록. 다른 분들 심사평은 《문학과사회》여름호에. 소설과 평론 부문 당선작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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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낯선 물체

1.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를 읽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정오의 낯선 물체>가 떠올랐다. 어떤 톤이. 
그 다큐는 한 소년과 여교사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데, 그 이야기는 주민들에 의해 B란 이야기로 변하고, C란 이야기로 변하다가, 끝난다. 실은 그러다가 꼬맹이들의 공 차는 장면이 건조하게 나오면서 끝나는데, 그 건조함에서 드럼세탁기에서 빨래하면 나는 어떤 냄새가 느껴진다.


2. 떠올랐다는 게 어떤 시너지의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박솔뫼의 소설과 위라세타쿤의 영화엔 묘하게 친할머니보단 외할머니 냄새가 나는 듯하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외할머니 냄새가 좋고, 그래서 두 사람의 작품에서 매력을 느낀다.


3. 박솔뫼는 지도와 약도에 관심이 있고, 주전공은 여름이며, 도미와 다미라는 이름을 좋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커피와 맥주를 자주 언급하지만, <수영장>의 다미처럼 보리차에도 관심이 있으며, 얼음이 녹는 소리를 '꺅꺄'라고 표현하는 귀가 예민한 사람이다.


4. 《귀신, 간첩, 할머니》에 실린 위라세타쿤의 영화노트는 박솔뫼의 기운과 닮았는데, 나는 박솔뫼의 소설에서 '분미'들이 숨어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고, 그녀는 부산이나 오키나와나 사쿠라이 다이조 같은 인형을 실은 뽑을 줄 알지만, 뽑아서 자기 쪽으로 가져가다 말아서 인상적이다.


5. <정오의 낯선 물체>엔 몸속에 구슬을 지녔다 몸밖으로 뱉는 이의 설화가 나오는데, 박솔뫼의 인물들도 그래서 다들 구슬이 있을 것 같고, 구슬을 지녔다는 것 혹은 구슬을 뱉는다는 것에 속으론 신경쓰지만, 그 결론이 무심해서 좋다.


6. 당신이 에어컨을 옵션으로 한 원룸에 산다면, 밤 10시쯤 에어컨 실외기쪽 창과 방 입구를 열고 선선한 바람의 통로를 만들자. 다행히 박솔뫼는 커피와 맥주를 글자에 많이 심어두었고, 아핏차퐁은 조금 습하지만 우리를 어떤 숲속으로 데리고 간다. 물론 돌아오는 길은 모른다. 그저 맡길 뿐이다. 오늘은 그러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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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은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소설가다. 이력에 대한 흥미. 문화연구자 출신의 소설가란 이력이 끌렸다. 최근 나온 10명의 작가가 참여한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착하게>란 작품을 거기에 발표했고, 칼국수면을 이로 끊어먹는 아이의 도입부 묘사가 좋아서 페이질 끈질기게 잡았다.


그녀의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를 샀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대체로 좋은 몸살 기운을 안고 돌아온다. 한데 그러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시달려야만 하는 기운이었다. 좋다 나쁘다기보단 내가 휘말려서 뭔가로 빚어내야 하는 기운이었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를 볼 때 그랬다. 보고 와서 몸져 누웠다. 비슷한 기운. 소설집의 표제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가 그랬다.

몸살의 연원이 잔인, 잔혹에서 오는 묘사의 수위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럴 것 같으면 전아리 작가가 더 셀지 모른다. 뭔가 마음을 툭 건드리는 표현이 맴돌고 그게 속에서 밍밍하게 돌다가 돌덩이가 되는 그런 경우.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엔 '부산물'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게 속을 밍밍하게 했다.

낙태의 경계에 있는 아이를 의미하는 그 표현은 '실토'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작품의 미묘한 잔혹함을 뒷받침하는 핵심어다.

형과 동생이 등장한다. 기이한 형이 있고 세상의 여자들은 그 형을 사랑했다. 화자인 동생은 병약한 병신이라 불리운다. 형만이 동생을 병신이 아니다라고 해준다. 온화는 불화를 조장한다. 작품은 이 불화를 형과 동생의 직접적인 갈등으로 넣지 않는다. 그사이에 형을 좋아한 그녀가 있다.

병신인 동생은 병신이 아니야라고 해주는 형을 위해 뭔갈 해야 했다. 형은 동생에게 형의 그녀가 있는 곳으로 잠입하라고 시킨다. 그녀가 부산물이라고 하는, 존재의 상태. 아이를 지우기 위해서다. 동생은 형의 그녀와 살면서 그녀를 병신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순간을 노리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작품은 그 죄책감을 페이지의 분위기로 끌어낸다.

사람은 악취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그것을 사랑한다는 귄터 그라스의 말이 이 작품에 인용되는데, 작품엔 정말 악취가 난다. 비린내에 가깝다.

소설집 속 해설이 추려주는 관점이기도 하지만, 박민정 작가는 '가족 불능'을 시인해버리는 '고의적 미성장'이란 지점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도 해당된다.

인물들은 성장과 성숙에 관심이 없다. 아니, 아예 그것을 '놓아버리는' 인물들이다. 놓아버린다는 건 지쳤다는 것이다. 혹은 부러 놓아서 누군가 자신을 지치게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고단함이 자신의 악취미가 된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는 고단함이 악취미가 된 이 세상의 세태를 묻는다. 악취미는 튼튼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비릿한 게임 언어가 되어 누가 더 잘 지치는지 시험한다. 누가 더 잘 이 세상을 '놓아버릴 것인가' 대책도 대안도 없다. 통제불능의 상태.

저는 짐승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 글러먹었으니 제가 당신을 안 잡아먹기보단 차라리 당신이 제게 안 잡히도록 도망가세요란 '미안함'은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에서 느낀 몸살 기운이었다.
오늘날 미안하다는 말은 악취미적 인사가 되었다. 


시달릴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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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리버 색스의 유머를 좋아한다. 그는 의사이면서 실인증 환자였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에 구슬퍼 하진 않았다. 외려 자신과 반대 증상을 보이는(올리버 색스가 사람의 얼굴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의 아버지는 아무에게나 아는 체하는 신경질환에 걸렸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낙천적으로 그려내며 타인을 이야기한다는 것의 분량을 세심히 챙길 줄 알았다.



2. 그렇다고 그를 마냥 유머러스한 '의학 에세이스트'로 두기엔 그 공로의 범주가 좁은 듯하다. 나는 갈수록 유머가 더해지고 그 유머에 깔린 인간에 대한 집요함이 돋보이는 후기작도 좋아했지만 《편두통》 같은 다소 건조한 아카데미 스타일의 초기작에 애착이 간다. 흔히 아우라 하면 발터 벤야민을 떠올리지만, 《편두통》에는 올리버 색스식 아우라의 해석 영역이 있다.



3. '언젠가'란 단서를 붙일 수밖에 없지만 내게 르포르타주를 써보고 싶게 만드는 이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 그리고 올리버 색스였다. 이 노인의 재치는 생사의 문제에 잠겨 있다. 그래서 더욱 눈여겨보게 된다. 죽는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깎을 타이밍을 놓친 길이의 손톱으로 노트를 북북 긁어대는? 색스는 부지런히 죽음의 느낌을 살폈고 이를 떠벌리는 전개 방식보다는 논거와 위트로 독자들이 그 느낌에 마냥 허우적거리지 않게 도왔다.



4. 그는 시각적으로 예민했지만 그 예민함을 과신하지 않았다. 인간의 장점과 매력을 찾아보려 노력했으며 그 노력은 확신이 있는 밝은 곳보다 존재 증명의 불안을 느끼는 이들의 어두운 곳에 가까이 있었다.



5. 비판이론은 사라지고 고통과 상처에 대한 감각적 진단이 그 자리를 꿰차는 시간 속에서, 올리버 색스의 기록을 읽는다는 건 왠지 비판적 지성을 예열하기 위한 휴식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고인을 기리면서 범할 쉬운 무례일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자신이 처한 싸움을 선명하게 인식했고 미셸 푸코와는 다른 스타일로 의학이 우리 삶의 투쟁 영역임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의 담백한 유머가 그 지점을 잠시 잊게 해준 것은 그의 천성에서 나온 선물이자 이 생을 살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안고 가야할 실천의 과제 부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별은 지지만 밤은 아직 있다. 그리고 내일 밤을 기다린다. 하루의 간격을 그렇게 측정하면서 이 연약한 인간은 살아낸다. 올리버 색스가 남긴 '고맙다'는 말에 인간으로서의 믿음을 덧대고 싶은 이유다.


올리버 울프 색스

Oliver Wolf Sacks (1933~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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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인의 《눈앞에 없는 사람》을 읽었다. 벤야민적 자아를 가진 시인은 걸으면서 표지판을 본다. 첫 표지판인 <말들>에서부터 마지막 표지판인 <사랑은 나의 약점>까지, 시인은 비뚤어진 표지판을 바로 세우거나 매우 올곧은 표지판은 쓰러뜨려 놓는다. 

시 속 산책자는 '시달리는 인간'이다. 이런 그에게 심장이란 설렘이기보다는 권태다. 하품이야말로 인간의 심연을 열어준다는 벤야민의 규약을 지키는 시인은 심장박동수를 세면서 하품을 한다고 고백한다(<심장은 미래를 탄생시킨다>). 

시달리는 인간은 <운명의 중력>을 통해 뒤늦게 인간의 능력이 중력을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운명에 속한 것과 운명에 속하지 않는 것 사이를 끌어당기는 힘을 깨달은 시인은 수줍게 묻는다. 자신에게 운명을 바꿀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수줍게 말한다. 자신에게 그 능력이 있다고.


시달리는 인간은 '그때'라는 진공의 영역을 나약하게 만들어놓은 채, 이별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며 인연의 쓰라림에 대해 작은 데시벨로 절규한다. 시달리는 인간은 자신의 절규가 소요 속에 묻히길 바라면서도, 고요 속에 드러나길 바란다. <사랑은 나의 약점> 속에서 시인은 노인의 이미지에 소요와 고요가 정확히 반이 갈린 시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노인의 미세한 절규를 듣는다. 자신의 그림자, 남보다 특색 있는 그림자를 이야기해줄 수 있겠냐는 절규를.

시달리는 인간은 시달림이 준 시련의 숙달 속에서 당장 맹세하지 않고 잠시 그 절규를 숨겨놓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불현듯 절규의 비밀을 신중히 속삭인다. 

시달리는 인간에게 태어난 것도 죽은 것도 별스럽지 않다. 그래도 시인은 시달려보았기 때문에 이방인의 심장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의 심장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부인당해왔다는 비극을 소란스럽게 전달하기보단, 한 사람의 심장이라도 부인당하지 않게끔 단어의 가장자리를 부여잡는다. 

그래서 시인이 전하는 희망의 변증법은 조심스럽다. 큼지막하고 헐거운 것들을 건드린 것에서 시달림을 느꼈던 인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들에서 큼지막한 개념의 발명을 추구하기보다 이미 태어난 것들에서 비루한 현실의 소묘를 추구한다. 
시로 이뤄진 소묘는 시인이 줄곧 이야기하는 죄의식과 그 부채감에 대한 고결한 청소이기보단, 자신이 어쩔 수 없었던 여백들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데 방점이 찍힌다. 

이것은 곧 시달리는 인간이 심장을 부인당한 자들을 위해 준 선물이다.
덕분에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이생에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이 생에서 이야기해도 될지 조심스러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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