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소망 없는 불행 - 세계문학전집 65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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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_조르조 아감벤, 「마술과 행복」


작년,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속에 담긴 윗 문장을 적어놓고 여러 번 곱씹었더랬다. 그리고 최근 이 문장 속 벤야민의 통찰력을 자주 곱씹어본 듯한 페터 한트케의 「아이 이야기」를 읽었다. 쉽게 가보자. 아이가 등장하는 작품은 늘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려는 음산함을 동반한다. 아, 하는 과장된 감탄에 휩쓸리지 말자 경계하면서도 아이는 어느새 나이 든 나를 꾸짖고 있다.

아이의 꾸짖음은 엄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다. 그래서 읽고 있는 나이 든 나는 아이에게 질투심마저 느낀다. 글 속의 아이가 나를 꾸짖는다 느낄 때, 그 아이의 머리를 능글맞게 만져줄 나를 상상하며, 나에 대한 역겨움도 느낀다. 나는 왜 능글맞음으로 나의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했는지, 자책하면서.


아, 하는 과장된 감탄에 휩쓸리지 말자라는 경계심이 무너짐과 동시에, 왜 한 아이가 나 스스로를 역겨운 존재로 만드는지 한트케는 작품을 통해 작가인 남자와 그의 아이에 관한 '사회학적 풍경'을 조성해낸다. 여기서 '사회학적-'이란 흔히 학문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술성에 담긴 묘사의 둔감함을 자책하며, 쉽사리 그들의 학문을 비하하는 데서 오는 흔한 수사가 아니다. 한트케는 독자로 하여금 사회에서 '학學'의 면모를 뽑아내는 출중한 능력이 있다. 이 출중함은 큰따옴표로 처리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얼른 올려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픈 문장의 빈번한 출현이 아니다. 


한트케의 출중함은 작품 속 인물을 탁월하게 몰아세울 줄 안다는 것이다. 몰아세워서 거기서 오는 밑바닥의 자잘하고도 얕은 피해의식 같은 심리를 축축하게 늘어놓지 않고, 한트케는 거기서 더 한 번 인물들을 건조한 상태로 몰아세운다. 몰아세운다는 것이 더 이상 몰아세운다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한트케의 인물들은 몰아세움에 대해 기본적으로 냉랭하고 담담하다. 

자신을 몰아세울 줄 아는 인간들이 벌이는 고찰은 중립성을 담보한 '성찰' 같은 영역에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뻔하게 여기는 장면, 그리고 이 뻔하게 여기는 장면을 덜 뻔하게 보려는 인간들이 예상하는 장면을 폭로해 자신을 한 번 더 건조시키는 한트케의 인간들. 


본 작품에서 주인공인 한 남성 작가는 아이를 공동체 속으로 집어넣어본다. 기본적으로 극도의 예민함을 안고 사는 한트케의 캐릭터가 여실히 구현된 이 남성 작가는 아이를 향해 폭력, 냉대감, 쓰라림 등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시도를 분석해본다. 이 작가는 자신이 예전부터 강조해온 '모험심'이라는 가치가 자식을 갖게 된 이후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신경 쓴다. 세상에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작가의 정서를 이어받은 듯, 아니 더 어쩌면 뭔가 더 빼어난 감정을 갖고 있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작가는 묘한 폭력적 정서, 질투심, 그리고 안쓰러움을 느낀 채 아이를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는 자신인가, 아이는 자신이어야만 하는가, 아이가 자신이어야만 할까라는 복잡한 마음속에서 작가는 아이를 아이들의 세계에 둔 채, 자식을 관찰하고 자식의 반응을 챙긴다. 참고로 이 작품에선 '조숙하다' 같은 표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는 그냥 무섭다. 여기서 무서움은 어른을 부끄럽게 하는 아이의 어른스러운 말 한마디의 차원이 아니다. 또래를 사귀고, 학교에 들어가고 거기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의 행동을 보며 우리가 으레 예상하는 '반항적' 캐릭터가 주는 그 냉소적인 힘이 이 작품을 이끄는 무서운 기운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이 기운을 형언할 수 없었다. 아니 말로 표현하면 뭔가 그 기운을 갉아먹는 듯해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묘한 이미지로 가둬놓자고 생각했다. 물론 한트케는 이 작품에서 거창하거나 장황한 선택을 귀결로 삼진 않는다. 자신이 싫어하는, 격언이 씌어진 가방을 자식은 메고 다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서 모호하게 처리된다. 


한트케는 「아이 이야기」에서 자신만큼 스스로를 잘 몰아세울 줄 아는 인간이 있었나 하는 쾌감 섞인 자만심으로 살아가던(허나 그 자만심을 내향적인 사색에 감처둔) 한 어른이 자신의 아이가 그런 자만심을 붕괴시키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천연덕스럽게 몰아세우는 것에 대해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마지막은 결국 어느 정상적인 운명의 굴레에 아이를 집어넣은 어른의 '이것이 결국 삶인가'하는 진부한 고백보다는, 자신을 너무 이른 나이에 잘 몰아세울 줄 아는 아이에게 당황스러움을 느낀 한 어른이 비겁하게 내놓은 달달한 패배감 같았다. 이 패배감은 결국 글을 통해 자신의 세계감을 표현해야 하는 작가 자신에 대한 예리한 타격으로 다가온다. 덕분에 우리는 그 타격으로 인해 어른과 아이 사이에 놓인 또 다른 세계를 곱씹어볼 기회를 얻었다. "그땐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아버지가 벌인 시도를 평하는 아이의 툭 내뱉은 말은 이 기회의 소중함을 좌우하는 양분이다. 


이렇게 '성장'이란 말은 우스워지고, 우리 앞엔 먹먹함만이 남았다. 허나 이 먹먹함은 그 어느 감정보다 요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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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잠의 종말
조너선 크레리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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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트렌디한 학술서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책의 참신성을 부정해야 한다(이는 이 책을 다룬 국내 언론의 서평 기사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꿈과 각성': 변증법적 이미지 프로젝트의 리메이크이며, 편곡은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론'이다. 그리고 샘플링은 수전 벅 모스의 「파사젠베르크」분석이라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자가 주장하는 이 책의 '공상론'은 그가 오랫동안 집착해온 연구 테마다. 고로 이 책은 시각문화연구에서 꽤 이름을 알린 연구자가 벌인 뜬금없는 변화의 지점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1. 꿈 없는 잠, 잠 없는 꿈


꿈 없는 잠은 이해가 가지만, 잠 없는 꿈은 과연 가능한가. 후자를 문학적인 방식으로 탐구한 사람이 카프카다. 카프카의 꿈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면, 잠에 들어 꿈을 꾼다는 순차적 과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꿈은 꿈 자체로서 가상/ 현실의 구분선을 지우며, 인간 앞에 선다. 문학적인 방식으로 '잠 없는 꿈'을 다룬 카프카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몸소 체험한 이가 발터 벤야민이며(그의 『1900년경 베를린 유년시절』을 보라), 사색과 이론으로 성장하고 무장해간 벤야민은 '잠 없는 꿈'의 상태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논리적으로 읽어내는 시도를 벌인다.


벤야민에게 근대성이란 곧 '꿈나라'였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고 쌓아가면서 꿈을 실현시켰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안녕을 위해 질서의 변화를 꾀할 여지가 있는 꿈을 은폐해버린다. 그리하여 벤야민은 자본주의체제를 간파하고자, 상품에 담긴 꿈의 이미지를 불러내 글로 보여주었다. 이는 곧 꿈의 이미지를 각성 상태로 끌어오는 것이었다. 깨어난 인간은 이로써 부르주아가 어떤 꿈을 은폐하려 했는지 알게 되며, 자본주의적 사물 속에 은폐된 꿈을 소생시켜 혁명을 꿈꾼다. 이것이 곧 자본주의적 꿈, 상품화가 된 꿈을 '꿈의 이미지'로 드러냄과 동시에, 자본주의에 복속되지 않을 역사적 시간의 꿈을 소망한 벤야민의 '꿈의 이중 이론'(수전 벅 모스)이었다. 


변증법이 가미된 벤야민의 꿈에 대한 이론은 조너선 크래리가 『24/7 잠의 종말』에서 깔아놓고 있는 큰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크래리는 이 책에서 잠과 꿈의 식민화를 우려하면서 아직 복속되지 않은, 침범받지 않은 '꿈의 시/공간'을 모색하는데, 이는 신자유주의체제가 꿈의 자유를 상품화시켜, 권력의 기술로 쓰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장치가 되어버린 꿈  


크래리가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술을 분석하기 위해 논법의 전개상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에 대한 분석을 끌어오려는 것은, 인간과 접속되어 있는 장치들을 체제 안에서 올바르게 사용해보자는 헛된 희망과 결별하려는 시도(아감벤이 그대로 말했던)이면서, '주체화'를 실현하는 장치의 속성이 오늘날 사회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있는지 입체적으로 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다만, 크래리가 푸코가 권력의 자유/통제를 바라보던 관점, 들뢰즈가 권력의 자유/통제를 바라보던 관점을 비교해가면서, 권력이 마냥 유연하지만 않다고 보는 부분까지 도달하는 내용은 논리적으로 튄다. 즉, 아감벤의 장치론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정신의 병리화를 꾀하고, 꿈마저 장치로 만들어버리는 시대를 기술하면서, 아울러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술을 조망하는 근래 논의들에 대한 비판도 가미가 되는데, 후자는 그리 설득력 있게 제시되진 못한다(그는 권력의 유연한 제스처에 심취한 비판이론가들을 비판하고 싶어, 권력의 억압적 속성을 다시 역설하는데, 사뭇 감시와 통제에 관한 교훈적인 도덕극으로 오늘날의 권력술을 스케치하는 데 그치고 만다). 


3. 유령에 관한 이론: 잠과 꿈의 상호성은 가능한가


저자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신자유주의적 시간, 24/7 시간과 단절하기 위해, 잠과 꿈의 복원을 꾀하는데, 무엇보다 꿈을 통한 '공상'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것은 고도의 자본주의가 뻗치고 있는 꿈의 세계에 잡히지 않고, 근대의 유령들을 불러모으는 실험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유령들이란 근대화가 전개되면서 인간들이 구상했던 꿈이 '강력한 신화'가 되어 체제에 복속되는 것을 막는, 공상의 구현물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이 유령은 애초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밝힌 '유령에 관한 이론'과도 접속한다고 보는데(본 책에 직접 언급되진 않는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유령을 죽은 자 / 산 자의 구분을 없앤 채, 역사를 추방하는 권력에 대항할 개념으로 보았다. 


허나 역사를 앗아간 채, 자신의 영원성을 주장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술로부터 꿈과 잠이라는 개인 영역이 어떻게 변화의 계기로 쓰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크래리는 꿈의 상호적인 기능을 뜬금없이 내어놓는데, 여기서 크래리의 논리적인 명석함은 미학적이며 문학적인 찬가로 봉합된다. 아니. 사실 미학적이며 문학적인 관점이 어떻겠냐마는 실망스러운 점은 크래리가 고수하는 꿈 더 나아가 공상의 상호성이 '시각문화 연구자'들이 겪는 정치적 실천에 대한 사유, 그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 때문이다. 


시각문화 연구자들  특유의 '심미적' 해석에서 발견되는,  한 작품을 통해 사회를 조망하고자 할 때, 즉 '작품 해석의 심미적 특성'과 그 해석을 발판 삼아 내놓는 사회비평의 메시지를 놓고 볼 때, 후자의 경우 시각문화 연구자는 '커뮤니케이션 윤리학' '미디어 윤리학'류의 사회비평으로 빠지고 마는데(매체를 사유하는 정치철학자들이 기본 수준으로 언급하는 매체의 지배에 대한 윤리적 비판), 크래리도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잠과 꿈의 상호성을 강조함으로써 외려 크래리는 자신의 정치적 실천에 대한 강박을 책 말미에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고로 잠과 꿈의 개인 영역을 공동체적 협력, 사회적 유대로 이어가보려는 시도는 잠과 꿈을 잠식해버리는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술에 대한 괜찮은 해부를 상쇄시킨다.


* "스위치가 꺼지지 않는 사회", 즉 "절전 대기 상태"에 있는 24/7사회 속에서 저자는 잠과 꿈을 일상의 과한 자극을 제어하는 장치로 낮춰보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유지를 위해 끝없는 낭비와 동원령을 발휘하는 자본주의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공상의 가능성을 여러 번 강조한다. 물론 저자가 후반부에 보여준 정치적 실천에 대한 강박을 꼬집어, 대안의 부재 등으로 쉽사리 비하하는 건 외려 이 책의 깊은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라 본다. 다만, 우리는 앞에서 말했듯 벤야민이 시도했던 꿈과 각성의 기획을 통해 어떻게 은밀히 쌓여가는 자본주의의 신화를 '중단'할 수 있을 것인지, 단순히 방법이 아닌, '작동방식'과 '배치'의 효과를 성실하고 섬세하게 간파하는 그 길을 이 책을 통해 한 걸음 이제 밟아보았을 뿐이다. 저자가 한 걸음 내딛은 우리에게 주는 힌트는, 잠의 종말은 곧 '깨어남(각성)'의 종말이라는 역설이다. 



덧붙임) 

1) 이 책을 소위  '피로사회'류로 접근해서만 본다면, 얻어가는 게 생각보다 없다. 조너선 크래리가 시각문화연구자였던 맥락을 존중해, 관련된 텍스트를 두텁게 붙여 읽어나가면, 우리는 잠-꿈-각성의 오랜 비판이론 기획을 이 책이 편집해놓았구나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여기서 편집은 이 책의 주장에 대한 참신성 여부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2) 이 맥락에서, 나는 폴 비릴리오의 '운동학' '리듬학'을 통한 속도의 문제,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광학적 미디어』에서 밝힌 매직랜턴 에피소드를 권한다. 후자가 특히 흥미로운데, 키틀러는 귀족과 종교계가 쓰던 야간조명이 어떻게 부르주아에게 내려와, 야간조명의 일상화가 일어났는지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이러한 변화는 어스름함을 만들어내고, 권력에 대항할 비밀결사체가 과연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아리송하게 만들었지만, 역사는 이러한 야간조명의 일상화를 통해 부르주아가 자본주의의 장사꾼으로 가버렸음을 키틀러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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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로야 2015-01-29 14:40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흥미로운 책을 알게 되었네요. 더듬더듬 읽겠지만 제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구관조 씻기기 -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89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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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는 '마름'과 '젖음'을 다루고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해 축축한 상태, 젖은 상태를 계속 신경 쓴다. 황인찬은 이 습성濕性의 사운드를 통해 우울을 만드는 인간을 조망한다. 더 자세히 보자면 그의 시엔 우울을 만드는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 우울을 키우는가라는 고민이 담겨 있다.


우울의 인간은 젖어감으로써 습기를 받아들여 "몸이 자주 부었다"(<유체>). 습기는 황인찬의 시에서 상태가 아닌, 동작이다. 자아를 말리거나 젖게 내버려둔 시인에게 이제 세상은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베란다의 바닥이 젖어 있었다"(<면역>)는 고백이 가능한 장소다.

상태가 동작이 된 그의 시는 세상은 어쩌면 행동과잉=정지, 정지과잉=행동의 습성習性으로 이뤄진 곳이 아니었을까란  이 습성에 중독되어 피곤함과 노곤함 사이에 놓인 인간의 세상은 관찰 대상이자 시를 쓸 수 있는 조건이다."저녁인데 아직도 밝아"(<속도전>) 낮을 고찰하고, 낮인데 아직도 어두워 밤을 복기한다. 속도전을 감행하는 우울의 인간은 "혼자 집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한 번 마시면 멈출 수 없었다"(<물의 에튜드>)그리하여 우울의 인간은 습기를 보충함으로써 "물 없는 물병"(<물의 에튜드>)의 상태까지 나아간다.


습기와 건기를 오가는 동안 혼잣말과 중얼거림이 늘어나고 우울은 (시인의 말을 전유하자면) 나무로 서 있는 줄 알았으나 실은 나무의 그림자가 되어 떨고 있는 게 인간임을 증언한다. 《구관조 씻기기》는 마른 사운드에 향기가 나기 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몸부림친(그러나 이 몸부림은 정지였음을 깨달아가는) 젖은 성질의 사운드를 가진 시인의 b-side다. 젖은 사운드로 우리의 몸은 붓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구관조 씻기기》는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에 수록된 작품 <선원>을 떠올리게 한다. '정지극'을 표방하는 이 작품에서 야경꾼인 세 여성은 이야기를 해보자, 이야기를 하는 게 옳은 걸까, 누가 이야기를 하라고 부추기는 걸까를 두고 '변덕 게임'을 벌인다. 많은 말이 움직인 것 같지만, 결국 움직이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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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 넘치는 생각 때문에 삶이 피곤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처방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이세진 옮김 / 부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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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몇 년간 '내향성의 장field of introvert'으로 불릴 만한 책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내향성 전문가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가 나와 큰 주목을 받은 것도 있지만, 그전에 나온 '내향성 연구의 선조' 일레인 아론이 쓴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이 갖는 의의를 지나칠 순 없을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사회공포증(social phobia)이라고 하는, 타인과 부대끼고 살아가는 사회 현실 속에서 내가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과하게 두려워하는 증상을 되짚어보는 책들 또한 눈에 띄고 있다. 그 대표주자로 우리는 심리학자 크리스토프 앙드레의 여러 책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태어나서 누구나 겪게 되는('-하게 되는'보다 더 심리적인 부분이 들어간다고 보는 표현이기에) 대인 활동 가운데 생성되는 자존감 대 모멸감이란 구도를 조망하면서 심리학자들은 관계에 억눌려 있는 이들을 위무하는 해결책들을 꾸준히 내놓는다. 


그 누구보다 섬세한 성격을 갖고 신중한 사교성을 발휘하며, 번잡한 환경 속에서 정서적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을 경계하며, 자기 삶의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내향성 인간은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의 견해에 따르면 현대형 개인주의가 낳은 산물이다. 심리치료사이자 본 책의 저자 크리스텔 프리콜랭은 '지나치게 섬세한 인간'에 주목하면서, 특히 마음속에 생각의 다발을 늘 형성하는 이들에 주목한다. 프리콜랭은 지나치게 섬세한 탓에 생각의 주머니를 제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고 명명한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감각 과민에 처한 사람들이다. 평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세상물정에 대해 그들은 관심이 많고 에너지를 쓴다. 물론 이들은 자신의 성향에 대한 괴로움을 알지만 자기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늘 속상하다.


사실 이러한 감각 과민이라는 개념이 프리콜랭의 독창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일찍이 사회를 상호작용의 과정이라고 본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 같은 글 등을 통해 대도시가 쏟아내는 감각과민, 신경과민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과민을 감지하고 있기에 되도록 타인을 건드리지 않으려 하며 이는 둔감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둔감함은 타인과의 접촉과 만남에서 필요로 하는 센스의 결핍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자극에서 예상 외의 정서적 에너지를 소모할 것을 두려워하는 예방의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짐멜은 이러한 감각과민 혹은 둔감함의 상태가 시민사회의 한 형태라 보았다.


무엇보다 내향성의 장에서 내향적 인간을 규정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감수성의 과잉이다. 이는 곧 타인의 고민에 대해 감정을 이입하는 강도가 세다는 것과 연결된다. 프리콜랭의 견해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타인의 말에 집중하려는 태도, 즉 '경청'이 과하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프리콜랭은 "감정이입은 공감이나 연민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침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힌다. 사실 프리콜랭뿐만 아니라 내향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경청의 태도를 지닌 내향적 인간이 타인에게 귀 기울이며 쏟은 에너지가 제대로 회수되지 못했을 때의 상처였다. 프리콜랭 또한 정신적과잉활동인의 "자신이 남들에게 기울이는 관심과 이해를 언젠가 자기도 받게 될 거라는 기대는 무참히 박살 난다"라고 언급한다.


자, 이런 책에 자주 빠져 사는 이라면 연구자들이 '꿍꿍이'라는 것에 연구상 애착을 보인다는 것을 익히 알 것이다. 내 안에는 진실된 자아와 거짓된 자아가 함께 살고 있지.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내가 만난 사람들을 VIP로 모시기 위한 '접대용 자아'가 발동이 된다고. 그리곤 집에 들어와서 녹초가 되지. 사회는 곧 연극이란 무대임을 역설했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의 충실한 후예들은 디테일한 심리학적 서사를 통해 개인 안에 깃든 꿍꿍이 읽기에 집중한다. 좀 젊잖게 표현하자면 의중 읽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프리콜랭의 분석을 따라가보면 이런 의중 읽기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 매우 즐겨하는 행동이다. 이 완벽주의의 그물망에 복속된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타인의 의중 읽기에 재미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의중 읽기에 대한 결과를 발표할 때 매우 예민하다. 그런 예민함이 간혹 우연히도 타인을 향한 배려 없음으로 나타날 때 그들은 그것을 미리 감지하고 사과를 한다. 허나 대부분 사과를 받는 입장에선 '이런 걸 가지고 사과 씩이나'라는 말풍선을 그릴지도 모른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 늘 마음속에 갖고 다니는 평가안 중 하나인 "창피해서 죽을 것 같은 당신"(이는 실제로 사회공포증을 연구한 책 제목이기도 하다)을 연상하면서 오늘도 그들은 당신의 마음을 읽으려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다.


혹 이러한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당신은 별로 힘들지도 않고 무덤덤한 일상을 보내는데, "요즘 힘든 것 없니?"라며 카톡으로 물어보는가? 그렇다면 실제로 별일이 있으면서도 "그럭저럭 지내"라든지 "응 좋아 요즘"이라고 보내보라. 그리고 상대방이 "응 다행이다:)"라는 답변이 온다면, 그는 당신의 일상이 왜 이렇게 평평한지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 당신과 같은 사람이 정신적 과잉 활동인에게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임엔 분명하다.


나는  그들은/우리는-으로 시작되는 치료의 단계까진 부러 읽지 않았다. 저자가 밝히듯 "정신적 과잉 활동의 소유자들이 책을 건성으로 빨리 읽어버리기 좋아한다는 것은 나도 익히 안다. 이들 대부분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세 포착하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라는 견해에 수긍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란 말이냐"라는 입장을 존중한다. 살면서 누구나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고, 그러한 폐 끼침이 상대방에겐 기억나지도 않는 일일 수도 있기에. 정 괴로우면 불면의 밤 가운데 이불 속 하이킥이라도 시도하자. 그러고 내일을 맞으면 된다. 


'꿍꿍이의 중독자들'(이 중독자들은 정신적과잉활동인일 수 있고 이들만큼이나 섬세한 연구자-저자 일수도)에 대한 치유책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치유책을 쓰기까지 저자들, 이를 잘 받아들이는 연구 대상자가 들인 디테일과 이들의 의중을 간파하려고 쏟은 내 디테일까지 진하게 생각한다면, 인생이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다가가려 하되, 지나치게 다가가진 말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이 구린 말도 가끔은 써먹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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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샤 2014-06-06 18:49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관심가는데요. 콰이어트란 책은 전에 읽은 적 있는데 정작 그 책을 읽어야 될 외향성 사람들이 그걸 읽을지 강한 의문이 들었어요. 이 책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내향성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해의 기회를 주겠지만 저는 이제 자기에 대해 생각할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그레이효과 2014-06-06 20:21   URL
익히 아시겠지만 한 개인 내 내향성/외향성의 비율 문제인 듯한데, 외향적 인간에 대해 좀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논리적 전개상 불가피한 시도이긴 한데, 외향적 경향 사람들을 위한 설득력 있는 균형점은 이 책도 그렇지만 아직 인상적인 책은 못 본 듯하네요. 네 저도 밤에 이불 속 하이킥 대신 초등학교 운동장 도는 재미를 택하려고요.헤..

루쉰P 2014-07-10 19:04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ㅎ
이달의 당선작으로 되셨길 래 이렇게 반가운 맘에 들어와 봅니다.
이 책은 그리 유쾌한 책은 아닌 것 같아요. 뭐랄까? 경청이라든지 그런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인 거 같은 데 너무 차갑게 생각한다고 할까요?
너무 분석을 할려다 보니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없어진 듯 싶어요.
사실 저도 내향적 경향의 인간이라 타인에게 따뜻한 관심을 주다가 보상 받지 못해서 이불 속에서 하이킥 한 적은 있죠 후후

dyet 2015-01-07 22:26   댓글달기 | URL
책만큼 재밌는 서평이네요. 지나치려다 여기 들어와 쓰신 다른 글들도 살펴보았습니다. 과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가질 수 없는 사회학적 통찰력과 기민한 사고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종종 들려보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5-01-08 16:51   URL
고맙습니다.
 
자화상 작가의 옮김 1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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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이기도 했던 작가의 섬세한 자기 포착이 빛난다. 스투디움 같지만, 실은 푼크툼 같은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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