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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펜을 들었다. 먼 곳을 다녀온 곳도 아닌데, 연구실에 있는 동안,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그래서 일부러 계단을 내려갈때도 난간을 붙잡았다. 넉넉한 신호등 초록불일지라도 계단을 두,세개 씩 건너 뛰어 가는 사람처럼 하지는 않았다. 그냥 이 풍경에 스며들기로 한 것이다. 신도림역은 여전히 붐빈다. 종로역 오줌 냄새는 반갑다. 하지만 손은 부르르 떨고 있었고,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나중에 내가 갈 지옥 불구덩이에 미리 맡겨두고 싶었다. '이승'에서 뭔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 사실 앞선다.  

지난 한 달은 살면서 텔레비전을 가장 많이 본 날 같다. 논문을 쓸 때도 ytn, cnn, 국내 3개 방송사의 뉴스 타임을 꼬박꼬박 챙기며 정황을 살폈다.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탐색하자는 목적보다도,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망하겠다는 극한의 절망감이 내 안에 있었나보다. 나도 '그 분'의 죽음에 울었다. 그런데 더 울고 싶은 것은 결국 세상은 "거 봐 내 그럴 줄 알았어..", "그걸 이제 알았어"와 같은 냉소주의자들의 심보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꺼낸 나도 사실 냉소주의자겠지) 

내가 너무 순진하게 살았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국민의 '공분'이 담긴 소식을 누군가 성실히 전하면,   '18'하는 사람까지야 좋다지만, "어이구 그걸 이제 알았어, 이사람아"라고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을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그래, 냉소주의자만큼 이 세상에 애정이 많은 사람 또 없겠지.."하며, 가라앉힌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수십 번. 결국 나는 프로이드가 말한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다가온 '무기력'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 열심히 살아도, 그 '열심'이 '그냥 열심'인 것. 뭔가 이 '열심'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의 끈을 놓치 않으리라. 하지만 이 분노는 '준엄'해야 한다. 엄격하지 않은 분노는 적에게 더 맛있는 먹잇감을 줄 뿐이다. 우리는 현재 정치인들이 얼마나 사도매저키즘을 좋아하는지 목도하고 있다. 그들을 격려하는 것은 '당근'이 아니라 '채찍'이다. 그들은 맞으면 맞을수록 더 좋아한다. "어디들 욕해봐라, 거리로 나와봐라, 저항해봐라." 그들은 지금 이 상황을 우울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마치 예전에 봤던 만화 <드래곤볼>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끝판 대장'의 이미지라고 할까.그들은 우리가 슈퍼사이아인이 될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그래 "머리 쭈뼛 세워봐. 자식아."하면서  머리위에 음표들을 새기고 있는 지도.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이름을 꺼내선 안 된다. 데이비드 하비의 책 한 권 읽고 나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 그리고 이 정부를 비롯한 이 모든 정세를 비판하면, 그 사람의 분노는 일찍 소멸될 공산이 크다. 공부해야 하고, 더 많이 덤벼야 한다. '올바른 욕'도 중요하지만, '예의바른 삽질'도 중요하다. 삽질을 해서, 이 나라를 말아 먹으려는 또 다른 삽질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10대 우수론이니, 20대 개새끼론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탓'의 정치의 자제다. '~탓'의 정치가 내부 분열로 간다면, 우리는 앞으로 이 나라를 정말 떠나고 싶을지 모른다.   우리, 분노하자! 우린 이 분노를 영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이 분노는 준엄해야 한다. 엄격하고 진중하게.  

그러기위해 우리는 이 모든 지성의 유령들이 떨어뜨리고 가는 '만나'를 버리지 말고, 차근차근 모아야 한다. 그것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또 재생해야 한다. '위신'의 허영을 버리고, 지금은 모두가 겸손해야 할 때다. 역사는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준엄한 분노를 통해 '겸손한'인간이 되길 바란다.  이 모든 자양분을 냉소와 환멸의 '수박냉면 한 그릇'을 먹을 때 분비된 침으로 사용하지 말고, 그 침을 지금 거리에 뱉어야 할 때이다. 갈 길을 모르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그 장면. 침을 손에 확 뱉어 나머지 손으로 탁 치자. 어딘가 길은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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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저분한 연구실을 때로는 아무말 없이, 때로는 한 숨과 함께 청소해주시던 할머니께서 내가 있는 대학원을 떠난지 한 달이 지났다. 할머니께서 떠난 이유는 단 하나, '고령'이었다. 할머니가 떠나기 전, 나의 손을 잡으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할 때, 나는 웃을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방패막으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하지만, 그것은 '변호'를 가장한, 이럴 때면 등장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무기력함과의 조우다. 나는 대학원 게시판에 할머니가 왜 일을 그만두셔야 하는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글을 올리려다가, 행여 글 속의 선의가 할머니를 괴롭힐 수도 있을 것 같아, 교수님에게 메일을 드렸다. 교수님이라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선의를 늘 무시하지 않을 것 같은 기대감을 주는 나의 스승의 조그만 배려가 고마웠다. 나는 그 배려를 통해 할머니가 생각한 것보다 엄청 많은 연세임에도, 꿋꿋하고 명랑하게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았고, 용역 단체의 이유모를 압박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12시는 점심 시간의 시작을 알린다. 그것보다 조금 늦게 구수한 음식 냄새가 화장실 옆 작은 방에서 나올 때면, 나는 할머니께서 이제 식사를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연구실로 향했었다. 할머니가 떠나기 전, 할머니가 계시던 좁은 방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할머니의 송별회를 열어주고 있었다. 짭쪼름한 음식들과 시골 기운이 가득 풍기는 상다리 모양의 밥상, 그리고 할머니들의 수다. 그것은 이색적인 풍경이 아닌, 뭔가 보존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떠났다. 밤을 새고 나면 연구실을 맴도는 '아저씨'냄새를 뚫고, 주섬주섬 쓰레기통을 비우시는 할머니, '귀차니즘'으로 인해 분리수거가 되지 않아 폭식 상태가 된 대학원 쓰레기통을 희미한 신음 소리로 새벽부터 치우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유난히 '할머니'에게 약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쌀쌀한 풍경 속에서 쌩뚱맞게 철 지난 군고구마를 먹고 싶다. 온갖 언어들이 횡행하는 이 대학원 건물 속에서, 그리 큰 재미는 없다. 큰 감동도 없다. 상당히 심심하고, 어찌보면 유약한 기운마저 흐르는 이 공간 속에서, 가장 강건한 사람은 나도 내 동료 연구자도 교수들도 아닌 할머니, 그 할머니의 지속된 배려였다. 할머니, 잘 계시죠? 이 인사는 할머니의 온기를 박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성의 온기를 체험하겠다고 온 나의 결심을 다시 매만지는 고백 그 이상의 작은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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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2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내가 작다는 걸 많이 느끼게 되는 시절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04-2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으시다뇨.^^;; 비가 오네요.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뒷담화'.  내가 알기로는 이 단어는 표준어가 아니다. 그래서  작은따옴표를 붙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작은따옴표의 또 다른 효과, 바로 강조의 효과를 안다면, '뒷담화'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둘러싼 가장 흥미롭고 심각한 사회심리적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신은 '뒷담화'를 한 번도 안 당해본적이 있는가? 다시 이 문장을 살펴보니, 내가 '당해본'이라는 표현을 썼다. '뒷담화'는 사실 우리가 늘상 쓸 때 연상하는, 반드시 부정적인 기운이 있는 것은 아닐수도 있다. '좋은 뒷담화'. 생각보다 가깝게 다가오지 않지만 있다고 연상은 해보자.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가 '뒷담화'라는 표현을 언급할 때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온갖 부정적인 모습들이다.  

당신은 네이버에 '뒷담화'라는 단어를 쳐본 적이 있는가. 생각보다 많은 질문들이 지식in에 올라와 있다. 그렇다면 '뒷담화'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그것을 좀 '경험적'으로 기술해보면 다음과 같은 과정이 만들어질 것 같다. 일단 A와 B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A의 얼굴이 안 좋다. B는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다. B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A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인다. 그러다 입을 연다. A왈, "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거다..그  친구 있잖아..C 걔 되게 재수없지 않냐? 하는 헤어스타일이랑 옷도 그렇고,,학교에서 계속 추근대는 것 같아서 좀 그래." B왈, "너 C 보면 인사도 잘 하고, 잘 받아주더만.." A왈, "에이.야 어떻게 걔 면상에 대놓고 싫은 티 내냐." 너무 예를 간단하게 든 것 같지만, 약간의 양해를 부탁하며, 차근차근 설명을 해보려 한다.  

일단 내가 보기에 '뒷담화'는 도시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주목하는 현대인의 시각성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책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도시는 인간의 시각성과 늘 함께 해왔다. 그러한 시각성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구경거리'로서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책의 내용을 보면, 당시 19세기 말 파리는 인간의 시체를 보는 것도 하나의 인기있는 구경거리라고 하니, 인간의 시각성은 상당히 긴 역사적 흔적을 갖고 있는 개념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살아간다. 당신이 친구와 함께 신촌 현대백화점 주변을 거닐다가, 어깨를 부딪히기 싫어 이리저리 동선을 바꾸는 동안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주목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은 곧잘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찰나'가 가져다주는 얕은 혹은 깊은 인상들은 도마위에 오른다. 우리는 사실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뒷담화'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뒷담화'는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자기 검열의 과잉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의 이중성은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고 싶은 것과 누군가로부터 주목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의 긴장감을 매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요즘 대세는 '자기 검열'과 '과잉사회화'다. 누군가에게 혼이 날까봐, 누군가의 웃음 소재가 될까봐 사람들은 상당히 착하게 행동한다. 나는 사실 뉴스나 신문을 통해 매번 우리나라가 이제 이런 악행이 벌어지는 나라라고 흥분하다가도, 길거리를 나와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착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제법 보인다는 것에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을 때, 그 주목을 받으려는 문화적 실천이 정작 자신만의 희열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며 사는 사람들이 성의있게 자신을 보여주었는데도 원하지 않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어찌되었든 불행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뒷담화'의 대상에 오르는 유형은 정치인과 연예인이다. 이들은 도시의 구경거리이자, 고로 도시에서 가장 많이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기 검열과 과잉사회화로 인하여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심리적 압박을 받을 때,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뒷담화'는 오늘날 말과 글의 과잉 속에서 '언어상품'의 대표성을 띈다. 텔레비전 토크쇼는 '뒷담화'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는 미디어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MBC 명랑히어로의 한 코너였던 <두 번 살다>라는 프로그램을 나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봤다. 이 프로그램의 포맷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상의 장례식을 위해 가상적 죽음을 체험하고 싶은 연예인 한 명이 초대되고, 그 연예인이 원하는 분위기의 빈소가 마련된다. 그리고 '천상의 방'이라고 하는 곳에 MC와 함께 들어가, 자신을 찾아오는 조문객들의 반응을 모니터로 살핀다.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주인공 연예인을 조문하기 위해, 지인들이 찾아오고, 자리에 앉아 '가상적 고인'을 기리기 위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상황에서 '뒷담화'는 비록 가상이지만 형성된다.  천상의 방에 들어가있는 주인공 연예인은 모니터를 보다가, 자신을 지나치게 험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사진을 열고, 경고 혹은 반박을 할 수 있다.  

'뒷담화'때문에 죽은 사람을 보았는가? 우리는 많은 연예인을 잃었다. '뒷담화'는 언어가 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젊은 날 고민이 많을 때 늘 써먹었던 인간관계 상의 그 '가면 놀이'라는 표현을 불가피하게 끌어온다. 삶은 연극무대라면서, 이 연극무대에 살아남기위해서는 우리는 더욱 좋은 연기를 펼쳐야 하며, 그 좋은 연기를 위해 뒷받침될 수 있는 가시적인 신체 기술을 사용한다. 마음은 씁쓸하지만, 더욱 상냥하게. 현대 사회학에서 가장 기발한 이론을 만든 학자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어빙 고프만은 일찍이 이러한 사회 현상을 예견했고, <자아 표현과 인상 관리> , <오명>이라는 책 등을 통해, 현대인의 자아가 표현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기술했다.  

'뒷담화'는 '비밀'과도 연관이 있다. 사실상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지키고 싶어 하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비밀'이 아닐까. 소위 입이 싼 사람들이 많다. 이 현상을 두고 젠더적 관점을 언급하며, 여자들이 특히 심하다라고 확 선을 긋는 사람이 있지만, 남자인 내가 봐도 요즘 남자들의 '입의 가벼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투명인간의 심화'라고 스스로 지칭하고 싶다. 여기서 '투명인간'이란 으레 우리가 아는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모든 말을 해야 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우리 일상 속에서 생각보다 많다. 재미있는 예를 들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시 A와 B의 이야기를 끌어오자. 

A가 기분이 안 좋은 얼굴로 B가 있는 카페에 들어 왔다. B는 물어본다. "너 왜 그래..?" A는 망설이다가 말한다. "있잖아.예전에..아니다..너 이거 내가 말하기 전에 비밀 지켜줄 수 있지?" B는 고개를 끄덕인다. A는 B를 믿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면서,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한다는 걸 모르니 꼭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커피를 마신다. 며칠 후, B가 친구 C를 술집에서 만난다. C가 술을 마시다가 B에게 말한다. "야, 너 아냐? A 가 D 좋아한대.." B는 놀랜다. 그리고 말한다.     "어.. 야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D는 말한다. "나? A가 말해주던데.."  요즘 비밀은 그렇게 비밀같지 않다. 언젠가 공개될 비밀. 봉인이 쉽게 풀리는 비밀. '뒷담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연예인들이 오늘날 수난을 당하는 이유도 '투명인간'을 강요하는 미디어를 비롯한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말 실수가 많은 것도 갈수록 자신을 드러내기를 강요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입이 달다. 너무 쓴 말을 많이 해서. 나도 방금 뒷담화를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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