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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관계는 ‘매개’에 의존하고 있다. 관계가 매개적이라는 건, 나와 타인 사이에 나름의 벽이나 창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벽이 있어야 타인에게 편히 이야기를 한다. 타인의 따가운 반응을 듣지 않아도, 가상의 벽에서 반사된 내 목소리를 그 반응이라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창이 있어야 안정감 있게 목소리를 낸다. 내가 짜놓은 틀 안에서 본 모습으로 표현해야 당황하지 않고 의사를 강하게 표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개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제대로 의미가 전달되기까지 나름의 단계와 우여곡절을 겪는다. 길로 치자면 지름길보다 기어코 에움길을 택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 또한 고양이성 인간의 특색이다.


문제는 에움길에 주저앉아버리는 때다. 결국 내 앞에 놓인 벽과 창이 세계의 전부라고 여긴 채,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자기 자신과 섹스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은 관계의 에움길에 정착해버린 고양이성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웹디자이너 마틴과 건축가 마리아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둘 다 누군가에게 어떤 교감을 느끼다가도 이유 없이 확 식어버린다. 특히 이 작품엔 심리 전문가도 주인공들의 관계 실패를 제대로 짚어주지 못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마틴은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서 심리학자를, 마리아나는 수영장에서 심리 상담사를 만나 데이트를 즐기지만 카메라는 취향에 대한 교환에서부터 섹스까지 욕망의 접점을 찾지 못해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들을 지긋이 보여준다. 차리리 마리아나가 행복한 순간은 물건을 쌀 때 쓰는 뽁뽁이를 터뜨리며 분을 풀거나, 자신이 디자인한 마네킹에 올라 타 자위를 할 때다. 마틴 또한 우연히 알고 지내는 도그 시터와 섹스를 하는 것보다 컴퓨터에 설치된 온라인 채팅 사이트, 미니 컴포넌트와 텔레비전, 강아지와의 대화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마틴과 마리아나는 일찍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탐구해왔던 ‘자기 자신과 결혼해버리는 사람들’에 가깝다. 




지젝은  "나는 나 자신과 결혼했네"라는 뷔욕의 노랫말에 감명받은 중년 사진작가 그레이스 젤더의 삶을 소개한 바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결혼 서약을 했고, 결혼반지를 낀 채 거울 속 자신에게 입을 맞췄다. 타인과의 만남이 점점 불안한 시대다. 젤더가 올린 결혼식을 마냥 참 이상한 사람이다, 하고 볼 수만은 없다. 다만 문제는 삶의 안정에 있어 자신>타인이란 부등식이 지속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관계의 부등식이 만연해질 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족쇄란 없을까.








여기 문이 하나 있다. 확 열리지도, 확 닫히지도 않은 문이다. 영화 <경주>에서 최현은 윤희의 집으로 함께 간다. 늦은 밤, 둘 다 술에 취했다. 최현과 윤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윤희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최현은 초를 키고, 혼자 운동을 하며 반쯤 열어놓은 문에 대한 해석을 벌인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많은 문들이 닫혀 있을 때, 방긋이 열려 있는 듯 마는 듯한 그런 문의 이미지에 주목하며, 감수성의 상상을 제안한다. 바슐라르의 제안에 잠시 기대어본다면, 우리는 최현과 윤희의 행동에 '찌질함'이란 반응을 보내는 이들을 싱겁다며 충분히 야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경주>가 인상 깊은 이유는 영화 속에선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해 곤경을 겪은 사람들 뿐이다.  다들 관계의 에움길, 욕망의 에움길에 안주한다. 영화 초반부, 친구의 문상을 치르고 추억이 묻어난 경주를 찾은 최현은, 역 앞에서 담배를 피려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소녀에게 "여기서 담배를 피면 안 돼요"라는 말을 듣는다. 하나 최현은 전 장면에서 담배를 피는 친구 옆에서 담배 냄새만 맡고 있던 터였다. 담배를 피려 하면 중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가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녀는 아내의 역할을 한 셈인데, 이어지는 소녀의 질문은 더 중요하다. "아저씨, 그거 진짜 담배예요?" 최현은 흡연하기 위해 담배를 들었지만, 정작 담배는 입이 아니라 코 앞에서 맴돈다. 담배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현은 자신이 담배를 피었다고 자위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 소녀의 말은 이중적 속박이다. 소녀는 최현에게  그곳에서 담배를 피지 말라는 사회적 규율을 전했지만, 한편으론 왜 너는 너의 욕망을 해소할 물건을 사놓고 그 물건의 효용을 제대로 만끽하지 않냐고 묻는 것이다. 소녀의 이중적 속박은 최현에겐 상처다. 몸에 난 상처는 약을 바르면 낫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과연 그러할까. 






최현이 담배를 피기 시작하는 장면은 옛 연인 여정을 만나면서부터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정은 최현에게 강렬한 진리를 남기고 경주를 떠난다. 서울로 올라가려 기차를 기다리던 중, 여정은 오래전 최현과 술에 거나하게 취했을 때, 최현과 잠자리를 가졌으며, 그때 임신했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에 흐른 뒤에야 처음 전한다. 여정 대신 중국 여성이란 결혼한 것에 마음이 남았던 최현은 충격을 받는다. 여정의 상처가 자신의 상처와 대화 속에서 교환되고, 여정의 상처는 최현의 마음속을 움푹 찌른다. 최현은 드디어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 다만 최현은 이제 딱 하나, 자신의 욕망적 절제선을 끊어냈을 뿐이다. 그는 영화 내내 보이지 않는 금기를 의식하며 갈등한다. 자신을 움푹 찌르는 타인의 상처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한 건물에 사는 이웃의 얼굴마저도 제대로 쳐다보기 어렵다. 이웃이 있다고는 느끼지만, 그것은 층간 소음에 의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의해, 음식쓰레기봉투를 문앞에 내놓지 말라는 메모에 의해 확인될 뿐이다.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의 앞 모습을 볼 때 그 놀람은 개인의 이상한 기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의 원제는 'medianeras', 건축 용어로 측벽이란 뜻이다. 건축가인 마리아나는 타인의 앞과 뒤를 제대로 보기가 두려운 요즘 세상을 증언한다. 그녀는 건축법상으로 불법인 측벽에 창을 내려 한다. 마침 그녀와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사는 디자이너 마틴도 측벽에 창을 낸다. 마리아나는 여성의 G-스팟이 연상되는 건물 벽 이미지 안에 창문을 만들었고, 마틴은 남성의 팬티 그림이 그려진 건물 벽 안에 창문을 만들어, 팬티에 구멍을 낸다. 자기 자신과 결혼해버린 사람들, 타인과의 만남이 설레지만 그 설렘과 욕망의 기한은 '우리 언제, 어디에서 만날까요?'라는 그 말을 한 순간 최고조에 올랐다가, 정작 만남이 이뤄지면 식어버리는 이 '약속 오르가슴'에 걸린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불법적인 창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러한 창은  나에게 침잠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이 불완전하고 위험한 세상을 향한 개입과 응전의 가능성이다. 타인은 곧 만남이며, 타인을 욕망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외려 우리를 흠칫하게 하는 저 올바른 배려와 우회 속에 놓인 관계의 언어들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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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카톡 목록을 본다. 주르륵 바를 넘기다가 평소 늘 활발한 셀카를 올리던 친구 G의 프로필 사진이 기본형으로 되어 있어 뭔 일이 있나 골똘히 생각해본다. J가 카톡 메시지를 보낸다. “요즘 마음날씨는 좀 어떠하니?” 1이 언제쯤 사라지나 기다리다가 J는 다른 일을 한다. 그러다가 다시 1의 사라짐을 확인한다. 마침 G가 답을 한다. “별일 없어. 그냥 그럭저럭 살아.^^” J는 “다행이다:)”란 답을 남긴다.

 

근데 뭔가 마음이 묘하다. “그럭저럭”이란 G의 표현에 안도하면서도 G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싶은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으면 될 걸 J는 기어코 G의 고민거리를 짜내려고 노력한다. 기억력이 좋은 J는 친구들이 사소하게 던진 말들을 잘 줍는 능력이 있다. G에게도 그 능력을 써먹는다. “지난번에 고민하던 그 일은 어떻게 잘 해결되었니?” J는 이 질문을 던질 때 G가 무슨 말을 할지 답변의 유형까지 미리 예상하고 있다. J는 자신이 타인에게 평가받는 것에 신경을 쓴다. 그것도 무척. 고로 G가 이왕이면 “와 고마워. 그걸 기억해주다니”란 말로 답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질문을 던진다. 대신 “??”이라든지 “그건 그냥 내가 알아서 할 게”라는 답변만은 아니길 바란다. 자신의 섬세함이 거부당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J와 같은 사람을 다룬 책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매사에 진지하면서도 지나치게 섬세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 이들은 예민함이란 어감까진 받아들이지만 깐깐함이란 어감으로 자신을 평하진 않았으면 하고 타인을 향해 디테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내향적인 사람들의 장field of Introvert’이 하나의 지적 담론으로 구축되면서 섬세함이 지나친 사람들은 현대인의 인상적인 유형으로 주목받고 있다. 일찍이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란 에세이를 통해 도시 속 신경/감각 과민 vs 둔감함이라는 정서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심리학적 현미경이 동원된 사회학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분석하길 좋아했던 짐멜에게 이 사회란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만나 벌이는 세심한 상호작용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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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회적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 내향성의 역사는 의외로 두텁다.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경계로서의 도시와 도시인’을 주목했다. 감각과 자극에 예민한 이들은 그들만큼이나 예민한 학자들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학자들은 내향적인 것이란 게 무엇인지 자신이 만난 이들의 서사를 기록하고 편집해 설득력을 얻고자 노력했다. 특히 심리학계는 내향적인 사람들의 장을 통해 ‘꿍꿍이’를 분석하는 데 애를 썼다. 그 노력의 성과로 타인에 대해 지극히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이가 실은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을 시 나오는 부정적 에너지가 상당한 사람이라는 견해를 반복적으로 제시했다. 조력자로서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섬세함이라는 메시지가 실은 자신이 구상해놓은 배려의 완벽한 지도를 타인이 제발 무너뜨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는 주장이 인기를 얻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신이 평소에 구축해놓은 자아의 지도와 맞닿아 있는 이 완벽주의적 성향은 간혹 선택공포증에 걸린 이의 우유부단함으로 연결되기 쉽다. 허나 섬세한 사람들의 평가지향성은 이 우유부단함마저 자신의 완벽한 자아에 해가 되는 것을 알기에 나름의 선택항을 준비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쓰인다.

 

J와 G의 카톡 대화로 돌아가자. G에게서 뭔가 심각한 일이 있었으면 했지만 밋밋한 답변이 돌아온 것에 대해 실망한 J는 “언제 한번 우리 맛있는 거 먹자^^”라며 애써 마음을 감춘다. 그러면서도 J는 자신의 섬세함이 짜둔 설계도를 접지 못한다. “고마워”라는 답변이 도착하자마자 “우리 이거 늘 하는 빈말 되면 안 되니까 아예 시간을 박아버리자”라는 답변을 남긴다. “나는 언제든 괜찮아. 네 편한 시간에 맞출게”라는 친절어린 말을 해놓고 이것 또한 허언으로 받아들일 것 같은 마음에 J는 용기를 내어(?) 옵션을 건넨다.

 

섬세한 사람들의 그 선한 인상과 제스처는 간혹 타인으로 하여금 그가 ‘랜덤형 인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섬세한 사람들은 “당신이 좋아하는 건 아무거나”에 따른 침묵과 그 어색한 상황을 지극히 싫어하기에 차라리 자신이 미리 그 곤욕을 방지할 대비책을 세우는 걸 즐긴다. 심리치료사 크리스텔 프티콜랭은 자신의 저서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에서 이런 섬세한 사람들을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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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런 명명을 통해 섬세함이 지나친 사람들을 요즘 유행하는 심리학적 인간으로 몰아세우고 싶진 않다. 다만 이들이 심취해 있는 테마를 통해 우리가 늘 옳다고 여겼던 가치를 다른 시선으로 재고할 필요성을 느낀다. 섬세함이 과한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세 가지에 중독되어 있으며 여기서 삶의 재미를 느낀다. 이들은 ‘의혹의 중독자’이자 ‘경청의 중독자’이며 ‘성찰의 중독자’이다. 일찌감치 ‘내향성의 사회학’을 고민했던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는 『사회적 삶의 에너지』에서 내향성의 여러 유형을 분석한다. 그중 콜린스가 보기에 내향적인 지식인은 유난히 과잉 성찰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과잉 성찰 상태는 일반인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성찰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여기서 길게 따져보기란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섬세한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갖는 자기반성의 능력은 탁월하다. 이들은 조목조목 자신의 오류를 잘 짚어내는 반성문 쓰기의 달인이다.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할 따가울 말을 미리 봉쇄해버린다. 이 봉쇄의 효과가 과하면 타인의 주눅 든 상태를 이용해 심리적 방어선을 긋는다.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지금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란 표현은 역설적으로 그의 폐쇄적 성찰 상태를 열린 그것으로 만들어버린 듯한 착각을 안긴다.

 

 

말을 퍼 나르는 사람은 있으나 말을 되새기는 사람은 없다는 언어의 무력함을 여기저기서 호소하는 시대에 경청이라는 용어는 성찰이란 구태의연하지만 스테디한 해결책과 함께 인기 있는 인문주의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경청 만능주의 또한 간혹 타인이 누리고 있는 평온한 일상을 지나치게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려는 태도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마음속에 섬세함의 경우수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간혹 다른 사람들의 삶이 지나치게 심심하고 평온하다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리하여 “요즘 뭐 힘든 것 없니?”라는 조력의 메시지는 ‘끄덕끄덕’이라는 자신의 에너지를 투여할 사람 찾기가 되어버린다.



 

심리학자 볼프강 슈미트바우어는 『무력한 조력자』에서 경청에 중독된 사회복지사 프란츠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바깥일에서 남의 사연을 귀담아 듣는 것에 익숙한 프란츠는 집에 와서도 직장에서의 감각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 대상은 자신의 아내였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 일을 하는 동안 아내에게 무슨 일은 없는지 깊고 세밀하게 파고들었다. 정작 아내는 할 말이 없었다. 허나 프란츠는 이를 추궁할 정도로 아내에게 문제의 계발을 원했다. 이에 짜증이 난 아내는 외려 프란츠에게는 심리적인 위안을 주었다. 자신의 고된 조력 활동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공격성이 간혹 아내에게 분출될 때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로 시작되는 정당화를 맛보고자 프란츠는 은밀하게 아내의 예민함이 분출되도록 도발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 도발이 곧 프란츠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에너지였던 셈이다.

 



프란츠를 비롯해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타인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은 만남을 통해 타인의 장점을 끄집어내는 재주도 출중하다. 섬세한 사람들은 자신의 간파 능력을 즐긴다. “와 그런 말은 지금껏 처음 들어본 것 같아요”라는 답변을 기대하면서 섬세함이라는 골병에 걸린 사람들은 매력을 발견하는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시험대에 올린다.

 

내향성 연구의 권위자 소피아 뎀블링은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에서 관찰자라는 특성을 지닌 내향적인 사람들에 주목한다. 사람 관찰하기 좋은 카페나 극장은 섬세한 사람들이 자신의 관찰력을 뽐낼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늘 남들이 잘 보지 않는 장면을 포착해 공유하길 좋아하며, 거기서 자신의 영민함을 은근히 인정받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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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함이 골병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확인하는 건 결국 털털하고 둔감한 사람들과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조화불가능성에 있다. 대개 섬세함은 예찬의 수준으로 두루두루 회자되지만 그것이 지나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난 그거 별로던데”라는 말이다. 자신이 쏟은 마음 에너지만큼 회수되지 못한다는 감정에 도달하면 섬세함이란 골병을 앓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 수행하는 연극성에 혼란을 느낀다. 어쩔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섬세함이 과한 사람들은 간혹 자기부정의 극대화를 꾀해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누군가 자신을 치켜세운다면 언제든 “별말씀을요”라는 한마디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과하게 열거하며 그 사람이 사실 나와 맞지 않음을 선언해버린다. 이를 포착한 제3자가 “그럼 나에 대한 칭찬은 가짜야?”라고 물으면 “난 그런 과한 칭찬을 할 때는 그런 상황이란 걸 미리 말하고 계속 이어나가. 넌 물론 예외지”라는 멘트도 준비하면서.

 

지금껏 이 모든 해석은 그간 섬세함이라는 골병을 앓아온 나에 대한 분석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영원히’라는 표현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닌데……. 근데, 나 또 미안하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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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세계와의 대결에 실패해서 생긴 먹먹한 감정이 아니다. 오늘날 우울은 세계와의 대결에 왜 자신을 낄 수 없는가에서 비롯된 좌절감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는 듯하다. 고로 우울은 세계를 향한 부정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간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사회학자 워너 본펠드의 말을 떠올려보면,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생각하는 사고는 세계를 향한 긍정을 미리 규정해버린 이들의 영역일 뿐이다. 허나 우리의 비판적 기획은 긍정을 미리 규정해버렸을 때 많은 걸 놓치고 만다. 고로 부정의 부정에 대한 생각은 세계와의 대결을 벌이는 주체 자신을 강조하듯 소묘하고 그 비극적 결말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부정), 그 부정의 방식을 감안한 채, 자신이 기대고 있는 세계의 잔혹함 자체에 방점을 찍고 생생히 그려냄으로써 주체의 필연적 실패를 이야기한다(부정의 부정). 


주체의 필연적 실패는 앞에서 말했듯, 세계와의 대결 자격을 둘러싼 박탈감, 초조함, 무력감이 혼재된 우울의 상태다. 그러했을 때 부정의 부정이란 사고를 받아들이는 우울의 주체들은 이 세계를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왜 세계는 나를 혼내지도 않는가(김소진이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보여주듯, 이 세계가 괴물 같은 이유는 세계가 더 이상 나를 혼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울의 주체는 우울의 기예에 등급이 있다는 것을 과거에 비해 더 기민하게 신경쓰게 되며, 선망할 수 있는 '우울가'를 분석하면서 동경한다. 분석되는 우울가는 자신이 분석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따라할 이가 생긴다는 걸 안다. 고로 모방할 수 없으면서도 슬며시 모방을 할 수 있게끔 틈을 벌려준 채, 도망쳐 새로운 우울의 구역을 만든다. 

그러했을 때 앞서 나간 우울가는 우울과 가까이하는 세계를 향한 냉소와 그 냉소에 반하는 지극히 평범한 감정을 능숙히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우울로부터 '당황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타격한다. 우울가의 우울에 당황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던 이들은 이제 우울가의 우울이 실은 평범성에 기초해 있다는, 누구나 누리고픈 행복의 상태에 귀속되었다는 반전에 당황함으로써 우울가를 동경한다. 

최근 우울과 세계를 문제의식으로 삼은 여러 젊은 해외 뮤지션의 앨범 리뷰와 인터뷰 내용을 분석하면서 나는 어떤 공통점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내향성에 기초한 사운드 속에서 굉장한 문화자본을 가지고 그 내향성의 사운드를 실생활에 관한 선망의 영역으로 구성해낼 줄 아는 기예를 가졌다. 나는 이들을 '포스트 멜랑콜리'의 주체들이라 명명해보려 하는데, 이들의 '문화적 우울'은 가장 전략적이지 않으면서 그렇기에 전략적인 감정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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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의 공백이다. 하지만 이 기획을 완수하기 위해 쉬진 않았다. 다만 어떤 망설임과 초조함 그리고 비판받음의 여지 가운데 예민한 각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고민했다. 

먼저 감정사회학을 '고요의 사회학'으로 비판하는 이들을 향한 내 나름의 반론을 다져나가면서 비판가들은 감정사회학을 '팔자 좋은 사회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학의 연성화를 우려하는 그들의 의도는 짐작이 가지만, 그들만이 비판이론의 정수인 것처럼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좋은 보호막이 된다) 행세하는 건 불편하다. 
감정사회학은 비판이론의 기획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고 관련 학자들은 지금도 활동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분과학문은 이제 시작이다. 비판가들의 재판은 이르며 부당하다.

지난 18회까지 정리하면서 나는 '사회적 상호작용'으로서의 이론과 그 맥락으로 내향성이란 성격문화를 고찰했다. 근래 국내 출판에서도 형성된 내향성에 관한 문헌을 참조하면서 '내향성의 장'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일리언 아론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지만,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가 가져온 열풍은 '내향성 담론'을 촉발시켰다. 어빙 고프먼의 자기계발 담론적 전유인 본 책은 우리 시대의 성공 모델에 내향성이라는 성격문화를 잘 절합한 성과임이 분명하다. 
다만, '사회적 상호작용'을 인간 대 인간의 심리적 갈등으로 축소시키는 가운데 나타나는 기존 질서의 안정화라는 한계는 가장 손쉬운 비판이면서 이 기획이 갖는 비판의 출발점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내향성의 사회학 2라운드로서 나는 내향성의 사회학이 의식해야 할 비판이론으로서의 보충물을 수집하고, 더 나아가 이 비판의 대상은 어디를 향해 있는지 윤곽을 계속 드러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기획은 부르디외와 에바 일루즈의 개념 작업을 참조해 '내향성의 리더십'과 이를 문화기획으로 전유하면서 생기는 전략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음악웹진 웨이브를 통해 선보인 <라나 델 레이: 우울의 리더십과 명성문화>란 글은 한 예다. 
특히 '우울의 리더십'이란 틀은 내향성의 사회학이 견지하는 비판적 기획으로서 그 모델들을 하나둘 선보일 것이다.원고를 끝냈고, 곧 웨이브를 통해 두 번째 모델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울의 리더십은 김홍중의 <멜랑콜리와 모더니티> 그리고 랜들 콜린스의 <내향성의 작은 역사> 그리고 부르디외의 장이론이 결합된 개념화 작업이다. 내향성과 문화권력이란 테마 속에서 이 개념화 작업은 진행된다. 
무엇보다 우울의 리더십은 예술가의 감정, 고독의 숭배자라는 18~19세기 사회의 감정문화적 산물이 오늘날 문화기획/문화기획자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만들어지고있는지 집중한다. 그러면서 생기는 우열의 관계는 단지 인물에 대한 애호가 아닌, 그 애호에 동원되는 사회적 행위에 주목케 한다. 우울이 '문화적 우울'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각 사회 주체들의 절합은 불안한 봉합으로서 우리는 이 불안함을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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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한 희망 없는 내향성 인간의 고백>이라는 블로그를 운영중이다. 그녀는 기독교 대학에 재학 중이며, 영문학과 비교문화 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한나는 자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걸 싫어한다. 허나 자신이 인디락에 심취해 있다는 문화적 표시에는 마음이 열려 있다. 자신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긴 싫지만, 그래도 이 부분만큼은 밤을 새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영역, 그것은 그녀가 남이 잘 듣지 않는 음악을 선호하고 있단 사실이다. 

 

그녀가 2013년 8월 26일에 남긴 일기의 제목은 <나는 지금 영문학 수업의 힙스터야, 야호?>다. 일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한나는 개강 첫 주, 수강신청한 두 수업은 아무런 정서적 에너지 소비 없이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세 번째 수업이 문제였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초중반부는 한나가 보기엔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교수가 실라부스를 주며 수업이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 말하며, 교재를 사세요 라는 말을 했다. 분위기가 어색할까봐 나오는 잡담까지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헌데 '이제, 5분 남았나? 집에 가자..'는 기대감을 깨뜨렸던 교수의 제안이 있었으니 '자기 소개 시간 갖기'였다.

 

한나는 블로그에서도 밝혔지만 남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 취미가 뭔지, 내 가족은 어떤지를 떠벌리는 게 무척 싫다. 학생들이 이런 시간을 싫어한다는 것을 안다는 둥 교수가 먼저 모범을 보였다. 다른 소개야 한나의 예상대로 였던 듯한데,  교수가 인디락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어 이 사람 보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나가 생각하기엔 교수들이란 느끼한 클래식 음악을 들을 것 같은 부류라 생각하는 게 여전히 좀 남아 있었기에. 암튼 이어 학생들이 하나둘 나와 자기 소개를 했다. 물론 소개 시간은 갈수록 짧아졌다. 드디어, 한나의 차례. 이 시간에 그리 많은 정서적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녀가 이 일기를 쓰게 된 원인이 나왔다. 자신의 문화적 선호를 밝히고 만 것. "저는 인디락을 좋아하구요.." 마침 교수가 이 질문을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한나는 이 말이 나오자마자 실수란 걸 알았다. 그러면서 자신을 한번 비웃어준다. '그래 나는 이 수업에서 교수의 좋은 편에 서고 싶어하는 여자지. 어느 친구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교수는 한나에게 좋아하는 인디락 밴드 이름을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들과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한나는 지금처럼 뜨기 전, 인디 씬에 있던 이매진 드래곤스의 음악을 좋아하구요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밴드들의 이름을 말했다. 누군가의 반응에 민감한 한나는 자신이 그 말을 하고 나자 몇 명이 킥킥 웃어대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교수도 뭥미?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 같다.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반응을 비웃는다. 자신이 이 수업에서 힙스터가 된 것 같다고.

 

힙스터는 '반反의 정서'로 버텨온 '실체 없는 문화적 부류'라고 할 수 있다. 힙스터는 자신이 힙스터라고 지목당하면 정작 당사자는 난 힙스터 아닌데, 라고 말하는 '부인 전략'으로 존재를 유지한다. 힙스터들은 세상과 타인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나는 이 시대 사람들이 다 우루루 몰려 가서 하는 걸 경멸하지? 하는 입장에 있는 문화 부족인 듯하지만, 그들은 '세상에 관심 있는 비세상인을 선망하는 사람들'인 역설적 상태의 '문화 석학'이다(이 표현을 쓰는 일부 논자들은 조소라는 의미를 넣어놓는다).

 

자, 이제 내향성과 힙스터의 끈을 고민해볼 때다. '내향성의 장'이란 연구 분야에서는 내향성과 문화 그리고 미디어의 연관성을 미약하게나마 분석해왔다. 소피아 뎀블링 같은 심리학자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문자 문화와 친숙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전화의 구술성이 내향적인 사람에겐 큰 정서적 에너지 소비로 느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말보다는 글로 자신의 영역을 표현하고 지켜나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메일과 페이스북, 트위터는 내향적인 사람에겐 안성맞춤인 매체다. 누군가와의 접촉을 통해 드는 정서적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고, 그 보존된 양으로 매체 활용에 신경 쓰는 게 내향적인 사람들에겐 중요한 요소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힙스터들은 구술을 통해 자신의 '까칠까칠한' 스타일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나, 인터넷은 그들의 까칠까칠함을 극대화시키는 수단으로 등장했다. 힙스터는 이제 '쟤는 뭔데, 별루 한 것 도 없는 놈이 저렇게 인기가 많지?' '쟤 봐, 스키니 진에, 저 의미도 모르고 쓰는 모자 봐, 선글라스 하며?' 같은 어디에도 갖다 쓸 수 있는 펑퍼짐한 용어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외려 이 펑퍼짐한 상태로 인해 힙스터를 언어 게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랬을 때 내향성과 힙스터를 치면, 힙스터는 '까칠까칠한'이란 성격 유형으로 일반화되는 것 같다. 우리 인터넷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쿨내 나는 인간들'로 수렴되는 것이다. 

내향성의 연구 역사에서 내향적인 것이란 초기에 '차갑고, 무뚝뚝하고, 줏대 없고, 따분하고, 까다롭고'라는 성격 유형으로 정의되었다. 1960년대 성격 이론가들의 이러한 결과물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내향성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쪽으로 보완되었다. 내향적인 사람들이란 '깊이 있는, 창의적인, 융통성 있는, 책임감 있는' 성격을 가진 이라는 것이다.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는 내향성의 유형을 분석하면서, '스스로 소외되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이런 소외는 자신에겐 자부심인데, 콜린스는 이런 '반항적 개인주의자'와 '고독 숭배자'들이 현대적 개인주의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정의한다(사실 이러한 진술에 대해선 우린 얼마나 많은 하위문화에 대한 문화연구적 시선을 익혀왔던가). 콜린스는 이런 정의의 과정 속에서 '테크놀로지에 집착하는 이들' 특유의 개인성에 주목한다. 이들은 모임에서 대개 활기도 없고, 자신과 맞지 않는 농담이나 뜬소문을 나누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수줍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그러다가도 자신과 비슷한 '기술적 지식'을 갖고 이를 보여주려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을 연다.

힙스터는 자신이 지닌 문화자본에 애착을 보이기 때문에, 세상에 나온 사물에 관심이 많긴 하다. 단 그 관심 많음의 영역을 희소성으로 규정하고, 친한 사람 외에는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장벽을 쳐 '무관심'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전략을 쓴다. 힙스터는 자기 주변의 '싱거움과 진부함'을 활용해 존재를 유지하기 때문에 타인의 취향 관찰에도 민감하며, 그래서 그들은  '만남과 모임'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을 오글거림으로 규정하고 이러면 차라리 집에 가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나 볼 걸 하는 말풍선을 만드는 데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힙스터는 자신과의 문화적-정서적 공동체를 만들어줄 가능성 있는 이와 에너지를 쓰고 싶어하는 만남의 효율성을 따지는 내향적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집 안에서 힙스터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정서적 에너지 줄이기의 매체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문화적 구별짓기가 내향적인 사람일 수록 더 민감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유니크한'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그 '차이 확증의 심리'를 더 강하게 품고 싶어할까? 아니면 절망적인 대답 '케바케'를 택해야 할까?

 

'내향성의 장' 연구자들은 내향성-외향성이라는 성격 유형을 설명하는 단계에서 그들이 왜 이런 문화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외부 요인' 분석과 그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랜들 콜린스가 고려하는 내향성 연구는 '종교적 속성의 기원을 가졌던 내향성' '시장에 토대를 둔 지식인과 주류 사회를 적으로 삼는 반항적 유랑아, 급진적 사회운동의 결탁 관계 그리고 내향성' '창조적 인성과 예술 장 그리고 내향성' 등을 내향성의 미시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챙겨보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검색해보면 내향성과 힙스터의 관계를 궁금해하며 나름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흔적이 온라인엔 많다. 물론 그들이 펼쳐나가는 심도 있는 고민만큼 상대의 반응이 안 올때가 많지만. 힙스터들? ESFJ도 있고 ISFJ도 있고 그러지 뭐, 라는 시큰둥한 반응들 그 자체를 보고 혹자는 힙스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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