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400. 불신시대 (박경리)

소년병의 죽음, 남편의 폭사, 아들의 사고와 어이없는 의료사, 그리고 이어지는 주위 인간들의 탐욕과 몰염치. 그래도 진영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리라. 박경리 작가의 개인사와 겹치는 것을 해설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의 박완서 작가의 글보다 더 처절한 느낌이다.

 

355/400. 명암 (오영수)

인간의 정과 소박함을 그린다...고 해설에서 황석영 작가가 썼지만, 군 감옥의 수감원들 이야기가 그저 '정스럽게'만 읽힐 수는 없다. 범죄가 배고픔과 항명 외에 강간과 폭력, 살인에 이르면 '개인적으로다가' 나쁜 사람이 아닌가. (~적으로다가, 는 일자무식인 감방장의 말버릇이다) 그런데 밝게 희화하니 매우 불편하다. 마침 윤일병 사건의 가해자가 군 감옥에 가서도 반성없이 가학적으로 굴었다는 뉴스를 읽어서 그런가보다. 소설이려니 하고 잘보려고 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356/400. 쇼리 킴 (송병수)

미군 부대의 심부름꾼으로 얻어먹으며 양색시를 하는 딸링 누나와 움막살이를 하는 소년의 이야기. 서울의 거지 부대에서 앵벌이를 하다 도망치고 고아원에서 배를 곯다가 미군 부대 옆으로 흘러왔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동요를 따라부른다. 하지만 그런 동심도 사치인 시절. 불쌍하고 속상하다.

 

357/400. 수난이대 (하근찬)

교과서에 실려서 익숙한 이 단편은 아버지와 아들 두 세대에 걸친 비극을 보여준다. 보통의 사람이었던 아버지는 일제 치하 강제징용 당해 광산에서 일하던 중, 팔을 잃고, 동란에서 귀향하는 아들은 다리를 잃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처참한 심경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들에게 묵묵히 살아가는 거다, 라고 말해주는 아버지. 그래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뒷날에야 흥청망청했던 그 미군 병사들도 제 나라에서는 가난한 젊은이들이며 우리네와 정도는 달랐지만 제각기 전쟁의 상흔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도 짐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는 양민 학살이나 무차별 포격 따위의 일도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다는 걸 베트남 전장에 가서 알게 됐다. 미군들이 베트남 사람들을 '구욱'이라고 얕잡아 불렀는데, 나는 옆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나중에야 '구욱'이라는 말이 원래 6.25 전쟁 때 쓰인 '한구욱'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황석영 작가 해설, 115)

 

그렇기는 하여도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그저 순박하게 참아가며 마음 다잡고 착하게만 산다고 나아지거나 바로 될 일은 아니다. 수난을 당하면서 분노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한'의 그 무엇으로 삭이고 살아간다면 세상이 어찌 변할 것인가. 그야말로 그러한 삶은 수모의 세월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곧 낯선 근대의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혁명과 독재의 물결을 헤치고 넘어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대적 자아를 자신의 내면에 확립해나가야 했다. 개인을 둘러싼 사회 정치적 상황을 똑바로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문학적인 것에서 멀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황석영 작가 해설,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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