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어졌다고 느꼈던 향기가 출근하자 사무실 공간을 꽉 누를 듯이 짙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난초는 어떻게 벌과 나비의 형상을 재현할 수 있을까. 어제 냉천을 따라 걷뛰를 하다 든 생각이다. 아니 그보다 일찍 아무리 숨이 넘어갈 정도로 갈급하다고 할지라도 몸을 바꿀 수 있단 말. 주변의 색들을 여지없이 닯아내는 문어도 그러하며, 식물들이나 살아있는 것들의 갈증이 어떻게 자신의 바꾸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아니라 그것도 다른 곤충과 사모하는 사랑하는 무엇들을 위해 번질 수 있단 말인가. 궁금증들이 뿌리를 뻗어나갔지만 그 정도에서 줄이기로 한다.


사무실 문을 열고 닫자. 이토록 진한 향기라면 뭔가 끌려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다가서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이 방 안에는 진딧물이 살고 있다. 4호화분의 흙에 거처를 틀고 있는 녀석들은 작년 가을 소국이 꽃을 피우고 잔뿌리 하나가 겨우 살아남았다. 그 소국이 대를 올리고 어느 정도 크자마자 빨대를 꽂고는 하나하나 숨통을 조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5호 화분 난방기구의 열기에 고사한 잎들은 살기위해 잎의 면적을 키웠다. 백 여개의 가지, 아니 삼 사 백개의 가지 가운데 십 여개만 살아남았다. 그리고는 넓은 잎을 피운다. 살아갈 길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맞다 진딧물 그 녀석들은 이들이 덩치를 키울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여지없이 빨대를 꽂는다.


다이소에 살충, 진딧물을 가려내기 위한 약제를 찾는데 없다. 농약이면 좋겠지만 혐극물은 없다. 붕소를 희석해서 넣은 식물영양제가 최선이었다. 헝, 이건 있는데, 그래 사무실에 있는 걸 써보자 한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아니면 너희들은 막걸리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단 말이다. 입이 막혀죽는 중벌을 받는단 말이다.


볕뉘


이 삼일, 식수의 강연기록을 읽는다. 카프카, 주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동시에 나온다. 장 주네도 읽기는 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읽어내진 못했다. 다시보기이기도 하지만 알다시피 도끼님이 다시 나오신다. 편지글의 바다의 얼음을 깨는 도끼, 카프카의 도끼 원문도 볼 수 있다. <<광택>>이란 책. 리스펙토르의 책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듯 싶다. 많이 인용되는 책이기도 하다. 번역자여.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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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뗑환경. 출근길 아이스커피를 찾기 위해 비상등을 켜고 잠시 들르는 곳이다. 다행히 직원들이 무던해서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잠재고객인 걸 아는 바는 없지만 나는 그 사장을 안다. 그렇게 우연이 한 여섯 번 겹치는 오늘 아침. 대자마자 직원들 두 명이 헐레벌떡 나온다. 다른 곳에 주차해달라고 말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옆으로 빼서 댄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우연들은 필연을 예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당장은 기분이 나빴다. 몸의 문제다. 피와 살. 심장이 쿵쾅거린다. 어설프게 이해하는 것들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출근길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교차한다. 


처음에는 옳고그름의 문제로 치환하려는 머리가 뱀처럼 솟구친다. 하지만 이내 숨을 고르자 다리에 가까운 문제라 여겨진다. 맞다. 불쾌가 그들의 나와바리에 겹친겨야. 그 시공간에 불쑥 침범이라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얼마나 많은 선택폭을 좁히는지. 


땡땡당이 지난 지방선거 평가에는 관심도 없고 당대표와 최고위원 선거로 갈라치기해서 서로 몸과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집권 일이년차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몸과 마음 아니 옳고 그름으로 일상화된 나날의 편린들은 그들의 신념들을 더 확고하게 할 것이다. 


사무실 아아셔틀은 몇 년째 이어오고 있는 일상이기도 하다. 내일은 몸의 데미지를 생각해서 다른 카페를 발굴해야 할 것 같다. 신체에 이런 흐름과 우연과 필연 그리고 역사가 새겨진다는 말도 다시 들어오기도 한다.


아침. 넥타이가 보여 매고 가도 좋을 듯하다. 다*소 제품이다. 자크로 되어 있는 것인데 그만 무리한 힘을 가해서 떨어진 듯하다. 가방에 넣어 함께 출근이다. 일터에 와서 씨름한다. 그냥 해결될 일이 아니다. 묶인 실을 뜯고 다시 펴고 구조를 살핀다. 그제서야 자크를 보수할 가능성도 보인다. 자크를 수리하고, 넥타이 묶인 구조를 생각하길 여러 번 드디어 수선을 완료한다. 처음보다 각이 덜 잡히긴 하지만 봐줄만 하다. 또한 정이 들어버려 매지 않을 수 없다. 멋쩍긴 하지만 매어보니 잘 어울린다 싶다. 매자.



어젠 제일 가까운 도서관을 가고싶었다. 그곳에서 책들을 읽다가 일반자료실에 이 책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맞아맞아. 생각가는대로 하는 것이지. 중간중간 간을 하고, 그리고 물빼는 도구들도 눈에 들어오고 실리콘 주걱의 용도도 새긴다. 볼도....그리고 가까운 시장에 들렀지만 마트도 조금씩 살 곳이 없어 결국 사택 근처 식자재마트다. 여전히 일인 매대는 있지만 일인이 적절하게 살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씨름이다. 혼자와 여럿. 홀로와 며칠분.  계란과 감자. 레인지와 주방요리를 번갈아 시도하면서 금주 일용할 양식들을 준비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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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9-01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핀스트라이프 셔츠와 네이비 넥타이의 조화가 멋집니다! 원단이 시어서커 같기도 하고 면 같기도하고...시어서커면 최고의 조합이네요! 암튼 멋집니다요~!!^^

여울 2026-09-02 16:05   좋아요 0 | URL
네 오돌토돌해요. 시원한 여름보내고 있고, 애정하는 옷이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
 
















1. 밀란쿤데라 


저자의 책을 읽은 것이 없다. 말로만 들었을 뿐, 정작 읽어야 한다는 마음이 든 적이 없다. 오해하기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관심밖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이야기는 잘 숨기고 사건으로만 말해야 하고, 인물과 배경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 고 글쓰기 책들은 말한다. 시종 흥미롭게, 그가 미리 내밀어둔 장치에 집중하면서 읽게 된다. 여러 경험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나에겐 읽기 적당한 때인 것 같다. 아니 청춘의 나와 지금의 나로 거듭 읽으면 분명 관심가는 인물이 달랐을 것이다. 음, 지금에선 읽고 난 뒤 아쉬움이나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 가벼움-무거움, 우연-필연, 이념(이데올로기)-지향, 삶은 짧고 한번이다. 그 이야기 안에 이런 배합은 너무도 작다. 삶의 음악을 연주하기엔 유효한 책이 될 듯하다.


2. 구천을 떠돌다


놀란 감독이 오딧세이아에서 구천에 떠도는 자들 다시 돌아오게 한다. 이 책 <아야이! 문학의 비명>도 그러하다.  이항대립의 주춧돌이기도 한, 삶-죽음으로 가르는 장면과 사유는 사고를 왜곡된게 한다. 정상인-비정상인 구도, 강함-약함의 구도처럼 은유되는 것들의 무한반복을 낳는다. 네팔 계곡의 참사를 끊임없이 지켜본다. 말할 수 없는 참혹함, 생사를 넘나드는 찰나. 가스통을 부여잡기 위해 격랑을 헤쳐가는 이. 빙하호 홍수가 하루 이틀의 일들도 아니고 피해가는 방법들도 나라마다 달랐다. 그 지구적 원인 가운데 이 나라도 큰 몫을 차지한다. 문학의 비명. 엘렌 식수는 이 책임을 다룬다. 비명들을 한번도 제대로 다루지 않는 비겁함과 그것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라는 생각의 부재함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구제할 수 없다. 죽음을 온전히 볼 수 없다.


3. 글쓰기에 다-다르다


동일자의 늪에 빠지면 , 다른 것과 타자를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팔과 다리를 부러뜨려 팔 두개 다리 두개로 만들어야 한다. 곤충의 눈과 더듬이 그리고 머리 가슴 배에 달린 다리는 모두 이상한 것이다. 동일자의 신화에 계열계급화된 팔루스중심체계는 약하고 이상하고 다른 것들을 모두 뱉어내거나 억압하여 죽인 체계이다. 그들은 달라질 수 없다. 다른 것은 다른 것들로 모시거나 섬겨주는 출발을 할 수 없다. 가장 먼저가 여성이다. 여성되기. 무의식 없는 정신분석의 프로이트와 라캉이 거세된다. 되어야 한다. 발견한 대륙마저 이분법의 영토로 환원시키기때문이다.  천의 이름 만의 이름 수십억의 이름으로 달라진 몸과 살은 그대로 말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다르다고 달라질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구심력이 아니라 원심력의 자장이라고 말한다. 아니 새긴다. 정녕 그렇다. 얼마나 다르다. 다르고 다르기에 다르게 존재하는 법들을 배워야 한다. 충만감과 에너지를 넘쳐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다르게 살 수 있다. 동일자의 자석들은 모든 쇠붙이를 자기 것처럼 찾아 붙이지만, 모든 살아숨쉬는 것들을 보듬는 액체의 세상과 습속은 어루만지고 자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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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들어서자 진한 향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단 걸 깨달은 것은 문에서 일곱 걸음에서 열 걸음정도 발을 뗄 때였다.  난초는 정말 강렬한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향수가 그(녀)가 지나간 뒤, 아니면 오고나서 발휘하는 것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세상에, 그 다음 날도 그 향은 오히려 강해지는 것이다. 그 차고도 넘침은 우러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 놀라움과 세심함들이라는 단어들이 줄을 서게 되는 것이다.


언어를 문제삼는 이들은 많지만, 자세하게 그 길들이 왜 틀어져있는지를 설명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명사에 갇혀 있다거나 만든 명사만의 세계가 추구하는 논리, 조사들은 어떻게 길을 찾게 되었는지 그 다양한 결들로 논의한 이들도 많지 않다. 사전이라는 것도 이미  포획된 주류의 의견만으로 이루어져 시적 충만함이나 해석의 다양성을 주지 못한다.  하물며 부사나 형용사, 동사의 역할은 이 명사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그래서 출발을 의문시한다. 그래 그 영점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다양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급진적인 기획만이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결의 생존가능한 끈질긴 일리들이 겨우 이 상황을 자라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언어는 이분의 이항대립의 산물이기도 하고, 그 고체화된 단어들은 금붙이같다. 녹여내는 용출시키는 어떤 방법들도 부족했다. 그러니 일단 다른 철학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줄기를 잡을 수 있다. 세상에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끊임없는 변화다. 이항대립에서 시작한 언어는 동일자에 대한 집착과 환상으로 넘쳐난다. 하나 하나 붙잡은 단어들은 한결같이 굳어있고 움직일 여유가 없다. 이런 단어들로 이루어진 논리의 집들은 그 단어하나가 무너짐으로써 버텨낼 수가 없다. 과정을 담거나 과정의 변주를 품을 줄 모르는 단어의 집들은 그래서 허망하다. 그 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뱉어낸다. 저주라는 이름으로 악이라는 집착으로 벌레라는 존재로 강 건너편으로 버린다.


다른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없다. 액체라는 이전에 얘기했던 관점으로 돌아가자. 녹인다. 용해라는 관점만으로도 이런 기본 틀을 녹여낼 수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맛볼 수 있다. 단어는 360도 방향으로 비산하는 폭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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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타인과 관계를 추구하는 반면, 남성은 대상과 관계를 추구한다. 94 <호흡의 방식>

 

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리고 나로 존재하는 것과 우리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정의 조직을 바꾸고, 가정은 서로 다른 두 주체들 사이의 동등한 계약에 근거하여 다시 정립되어야만 한다/한 우두머리에 의해 전체가 지배되는 사회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로 조성되는 사회는 각자의 본성을 존경하면서 끊임없이 본능에서 문화로 나아갈 것을 약속하는 수많은 커플들로 이루어진다./성별간의 관계는 수평적 관계의 창출에 있어서 특히 이로운 장소처럼 보인다. 이 수평적 관계들이 사적 생활이나 공적 생활에서, 성인들 사이에서나 아이들 사이에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109 <내가 된다는 것, 우리가 된다는 것>

 

너 , 바꿀 수 없는 초월성: 우리는 이 타인을 우리로 축소시키고, 이번에는 우리가 그를 에워싼다. 우리의 지식과 애정, 우리의 관습으로 말이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고 듣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는 우리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그를 거부하지 않는 한 말이다./타자가 우리를 비추는 때는 우리가 이 타자를 깨닫지 못할 때, 혹은 우리가 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할 때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를 비추는 빛을 우리는 이해할 수도 분석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도 없다. 타자의 전체성, 봄의 전체성, 이따금씩 주변 세계의 전체성은 우리의 인식 자체 판단,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 우리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 것, 어떤 식으로든 우리만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우리와 접촉한다. 내가 아닌 존재인 타자는 우리가 그것을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29-130 <내가 아닌 타자에 다가가기>



친절하게도 블로그에 밑줄친 글들을 옮겨놓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흔적이 남아있다. 그땐 이렇게 필사해서 남기는 방편을 찾곤 했다. 하지만 그리 많이 지속된 것은 아니다. 해러웨이의 인기만큼, 내가 읽은 이리가레를 찾는 일도 드물었고, 회자되는 일도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여러 책들을 통독한 후 몹시도 설레던 기억이 짙다. 아무튼 로지 브라이도티를 통해 다시금 재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여전히 한 땀 한 땀 살펴보니 인상깊다. 들뢰즈에 버금간다는 말이 충분하다. 그녀는 이 주제책의 제목처럼 요가 명상 등등 가능한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남성을 지운 뒤 그 위에 대문자여성을 새기는 일이 아니다. 소문자 여성들은 물론 대문자남성이 지워낸 나르시시즘의 역사와 소외되어 버린 것들의 생명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끔까지 나로 사로잡힌 역사는 물론 방법과 스타일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성의 철학이 가두었던 이항대립의 언어와 소통의 부재에서 낳는 결과물 모든 것을 문제삼는다.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것은 없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듯 기억과 지속, 늘 달라지는 것이다. 덧붙여 이분법의 함정을 파헤쳐보는 것이다. 보바르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버틀러의 섹스/젠더, 젠더 수행성이 갖는 힘과 부작용들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해러웨이가 말하듯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 함정에 보바르가 걸려들었고, 자연문화로 사유하지 못하는 이론이 갖고오는 결말. 그 결핍은 필연적으로 이론을 가라앉게 하고 현실성 없는 환상과 애도, 우울함, 죽음충동을 가져오는 이론을 구성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캉과 헤겔과 지젝의 결핍을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론들의 보완으로 진가를 제대로 살필 수 없던 이리가레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다시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론모임> 세미나 자리가 없었다면, 생기지 못할 사건이기도 하다. 어쨌든 자주 언급하게 될 것 같아 모두에서 멈추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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