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들어서자 진한 향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단 걸 깨달은 것은 문에서 일곱 걸음에서 열 걸음정도 발을 뗄 때였다. 난초는 정말 강렬한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향수가 그(녀)가 지나간 뒤, 아니면 오고나서 발휘하는 것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세상에, 그 다음 날도 그 향은 오히려 강해지는 것이다. 그 차고도 넘침은 우러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 놀라움과 세심함들이라는 단어들이 줄을 서게 되는 것이다.
언어를 문제삼는 이들은 많지만, 자세하게 그 길들이 왜 틀어져있는지를 설명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명사에 갇혀 있다거나 만든 명사만의 세계가 추구하는 논리, 조사들은 어떻게 길을 찾게 되었는지 그 다양한 결들로 논의한 이들도 많지 않다. 사전이라는 것도 이미 포획된 주류의 의견만으로 이루어져 시적 충만함이나 해석의 다양성을 주지 못한다. 하물며 부사나 형용사, 동사의 역할은 이 명사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그래서 출발을 의문시한다. 그래 그 영점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다양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급진적인 기획만이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결의 생존가능한 끈질긴 일리들이 겨우 이 상황을 자라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언어는 이분의 이항대립의 산물이기도 하고, 그 고체화된 단어들은 금붙이같다. 녹여내는 용출시키는 어떤 방법들도 부족했다. 그러니 일단 다른 철학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줄기를 잡을 수 있다. 세상에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끊임없는 변화다. 이항대립에서 시작한 언어는 동일자에 대한 집착과 환상으로 넘쳐난다. 하나 하나 붙잡은 단어들은 한결같이 굳어있고 움직일 여유가 없다. 이런 단어들로 이루어진 논리의 집들은 그 단어하나가 무너짐으로써 버텨낼 수가 없다. 과정을 담거나 과정의 변주를 품을 줄 모르는 단어의 집들은 그래서 허망하다. 그 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뱉어낸다. 저주라는 이름으로 악이라는 집착으로 벌레라는 존재로 강 건너편으로 버린다.
다른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없다. 액체라는 이전에 얘기했던 관점으로 돌아가자. 녹인다. 용해라는 관점만으로도 이런 기본 틀을 녹여낼 수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맛볼 수 있다. 단어는 360도 방향으로 비산하는 폭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