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타인과 관계를 추구하는 반면, 남성은 대상과 관계를 추구한다. 94 <호흡의 방식>

 

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리고 나로 존재하는 것과 우리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정의 조직을 바꾸고, 가정은 서로 다른 두 주체들 사이의 동등한 계약에 근거하여 다시 정립되어야만 한다/한 우두머리에 의해 전체가 지배되는 사회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로 조성되는 사회는 각자의 본성을 존경하면서 끊임없이 본능에서 문화로 나아갈 것을 약속하는 수많은 커플들로 이루어진다./성별간의 관계는 수평적 관계의 창출에 있어서 특히 이로운 장소처럼 보인다. 이 수평적 관계들이 사적 생활이나 공적 생활에서, 성인들 사이에서나 아이들 사이에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109 <내가 된다는 것, 우리가 된다는 것>

 

, 바꿀 수 없는 초월성: 우리는 이 타인을 우리로 축소시키고, 이번에는 우리가 그를 에워싼다. 우리의 지식과 애정, 우리의 관습으로 말이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고 듣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는 우리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그를 거부하지 않는 한 말이다./타자가 우리를 비추는 때는 우리가 이 타자를 깨닫지 못할 때, 혹은 우리가 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할 때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를 비추는 빛을 우리는 이해할 수도 분석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도 없다. 타자의 전체성, 봄의 전체성, 이따금씩 주변 세계의 전체성은 우리의 인식 자체 판단,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 우리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 것, 어떤 식으로든 우리만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우리와 접촉한다. 내가 아닌 존재인 타자는 우리가 그것을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29-130 <내가 아닌 타자에 다가가기>



친절하게도 블로그에 밑줄친 글들을 옮겨놓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흔적이 남아있다. 그땐 이렇게 필사해서 남기는 방편을 찾곤 했다. 하지만 그리 많이 지속된 것은 아니다. 해러웨이의 인기만큼, 내가 읽은 이리가레를 찾는 일도 드물었고, 회자되는 일도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여러 책들을 통독한 후 몹시도 설레던 기억이 짙다. 아무튼 로지 브라이도티를 통해 다시금 재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여전히 한 땀 한 땀 살펴보니 인상깊다. 들뢰즈에 버금간다는 말이 충분하다. 그녀는 이 주제책의 제목처럼 요가 명상 등등 가능한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남성을 지운 뒤 그 위에 대문자여성을 새기는 일이 아니다. 소문자 여성들은 물론 대문자남성이 지워낸 나르시시즘의 역사와 소외되어 버린 것들의 생명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끔까지 나로 사로잡힌 역사는 물론 방법과 스타일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성의 철학이 가두었던 이항대립의 언어와 소통의 부재에서 낳는 결과물 모든 것을 문제삼는다.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것은 없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듯 기억과 지속, 늘 달라지는 것이다. 덧붙여 이분법의 함정을 파헤쳐보는 것이다. 보바르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버틀러의 섹스/젠더, 젠더 수행성이 갖는 힘과 부작용들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해러웨이가 말하듯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 함정에 보바르가 걸려들었고, 자연문화로 사유하지 못하는 이론이 갖고오는 결말. 그 결핍은 필연적으로 이론을 가라앉게 하고 현실성 없는 환상과 애도, 우울함, 죽음충동을 가져오는 이론을 구성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캉과 헤겔과 지젝의 결핍을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론들의 보완으로 진가를 제대로 살필 수 없던 이리가레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다시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론모임> 세미나 자리가 없었다면, 생기지 못할 사건이기도 하다. 어쨌든 자주 언급하게 될 것 같아 모두에서 멈추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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