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발. 달 비늘을 부서지고, 부서져내린 비늘은 강물에 씻겨 파도에 머물 듯....님이 너무 눈부셔 담으려 해도 담을 길이 없다 실루엣만 남겨본다. 눈을 감고 새기는 것이 더 환한 듯 은은함보다 황홀함에 가까운 날이다. 명아주꽃에 달비늘은 기울어지고 마음처럼 흔들리고 여기저기 비추이는 곳이 님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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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어느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꽃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호명되지 않는 순간, 머뭇거리는 순간, 자주 마주치지만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는 사이. 그 사이가 마음에 든다. 이름을 애써 불러 sos 타전을 할 위급함이 아니라면, 그 사이 사이 굴곡과 멈칫이 더 끌린다. 새벽과 아침. 저녁과 밤, 밤과 새벽. 너와 나만 아니라 너와 나의 사이. 명사와 동사의 부산스러움에 형용하거나 꾸밈이 날개짓하는 꼴.  어느 틈엔가 님의 졸음 한켠에 두고 나온 바람결, 은은한 향기, 별빛, 파도 소리... ...어쩌면 잠시 멈춤, 그것이 더 빠른 장단으로 내달음할지, 중중모리로 느려지는지 모르지만 의도를 벗어나 사이. 사이사이를 들여다보는 예민함과 셈세함을 곁들인 너-나의 변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 민주주의. 주의를 뺀 명사 민주만 탐하지 않는다. 민주라 이름부르기에 앞선 모호함. 설레임같은 것. 사이. 믿지못할 명사같으니라구! 끝없는 발품만 파는 동사같으니라구. 그런 것 말구 좀 허접하면 어때!

 

품 다  

 

 하다. 해라. 하자. 해야한다 보단 품는 것이 좋다. 겉절이도 좋지만 발효시킨 젓갈이나 시간에 삭힌 묵은 음식이 끌린다. 언제부터 일들에 숙성이란 몸말이 걸려버린다. 그래서 결과를 져버리고 팽개쳐버린 것은 아니지만, 수다같은 과정이 눈가에 어린거린다. 꼭 해야하는 결정문과 통고문보다 소수의견에 마음이 걸려 아프다. 그래서 끙끙거린다. 남이 눈치를 채든 말든, 그 한마디에 걸려 동불안, 좌불안이다. 그러다보니 나만 품기에는 억울하기도 하다. 굳이 알려야 되느냐고 타문자문도 하지만, 역시 아직 익지 않아 맛이 덜 난다. 가끔 느낌이 통하는 애서가의 글과 마음을 만난다. 가끔 말하지 않아도 찌릿한 사람들이 있다.  유명을 멀리하는 괴팍함이 있어 문제이긴 하지만 함께 품어 맛을 낼 님들, 그 생각들이 여물어 여쭙지 않아도 저만치 먼저 갈 일들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  지금여기를 애틋해 하지만 온기도 흐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온기도 쌓이다 보면 넘치는 곳도 있을 것이고 뫔 맞는 것도 이렇게 품고 숙성하고 저절로 스르르 풀린 일이기에 느긋해지고 볼 일이다.

 

 

생각 

 

 세상에 혼자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나? 자본의 그물에 걸려 파닥거릴 뿐 생각마저 꿈마저 여기를 벗어나 저기에 머무를 수 없다.  그나마 운신의 여력이 있는 것은 몸뚱아리와 맘속 생각의 정원이다. 마음의 경계, 울타리를 뜯고 고치고, 저기 멀리 또다른 과실나무를 심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로 늘 딴 생각이다. 딴 생각이라야 뭔 대단한 생각이겠는가만, 그래도 몸뚱아리보다 갇힌 뫔에서 좀더 낫게 움직거려 볼 수 있다는 점때문에 생각을 품는다. 그 생각흔적을 남기려 애쓴다. 휘발성 강한 그 쪽지들은 근력이 없어 아직 안개같다. 뭉쳐뭉쳐 빗방울이라도 후둑후둑 떨어지면 좋으련만, 여물지 않은 익지 않은 그래도 조금 색다르고 맛다른 정원을 여기저기 두어 마음은 배부르다. 또 어느 태풍같은 앎의 소용돌이에 빠져 초라해질지 모르지만, 그 읽고 생각하고 구름같은 것이 더 익숙해져 버린다.

 

 

마실-산책 

 

 더운 여름 무더위와 호흡하다 맺힌 땀방울. 등줄기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물줄기. 숨을 멈추게 만드는 일상. 동안거로 무뎌지는 몸의 갈증들. 거친 땀한줄기로 풀어내는 몸마실. 정해진 생각. 정해진 비평, 짜여진 생각틀에 갇혀버린 시간들. 이해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다른 생각이나 이해를 생각조차 못하는 기름기들. 공과 사, 생각길을 걸으려하지 않는 굽굽함과 답답함. 이리 먹구름 드리우는 날이면 책보따리, 생각보따리들고 마실나선다. 책마실, 생각마실. 그 가운데 사람마실은 으뜸일텐데. 아직 여물지 않는다. 머리 나눌 이보다 마음 나눌 이, 몸의 겹침이 간절하지만 지인들은 늘 바쁘다. 몸의 동선들은 가혹할 정도로 넓고 깊다. 세상의 곤혹함과 일의 고삐에 매인 벗들도 맘마저 매여 아직 따듯한 온기마저 나누기에 힘든 님마실. 언젠가 속맘도 통해 저기 책안의 님이 아니라 책밖의 님을 만나 달님산책, 달림마실, 생각산책도 부쩍 하고싶은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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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너를 탐하면서부터이다. 님에게로 가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길이 너란 걸 말이다. 저릿저릿 스며드는 너를 갖게되면서 불편하다. 그러나 너는 차별도 차등도 두지 않아, 저 지구 한바퀴를 안을 수 있는 말은 너밖에 없다. 저 마음의 끝과 디뎌온 역사의 보폭을 느낄 수 있게 해줘 고맙다. 너를 헤아리는 순간, 네가 읽히는 순간 네가 내뫔 속 어딘가 꿈틀거린다.  너로 가는 길 너로 가는 길목, 너가 되는 교각이다

 

 

앎과느낌 

 

 앎과 함에 갇히면 느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느낌은 그렇다고 온전히 머무름에서 오지 않는다. 함과 앎의 온기가 가시지 않고 남아있을 무렵, 며칠이든 몇달이든 차고 기울도록 마음도 몸도 열어둘 때야 조금 조금 기웃기웃 하는 것이다. 너무 기댈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기엔 아쉽다. 유대의 밑절미가 되기도 하기때문이다. 앎과 함, 그것을 벼리게 하거나 또 다른 깊은 맛을 보게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삶 

 

 삶을 얘기할 수 있을까? 동물처럼, 짐승처럼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건을 공유하고, 세상이 삶에 말걸 수 있을까? 작은 울타리로 그래도 삶의 조건이 가혹하더라도 삶을 나눌 수 있을까? 머리 속, 생각 속에서 벗어나 삶을 그래도 조금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삶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농도가 진해질 수 있을까? 공동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스러우면서도 일상의 합, 일상의 곱인 삶이 곁에 와서 친할 수 있을까? 막연함이 아니라 조금 더 세세함이나 예민함이 스며드는 삶을 나눌 수 있을까? 철학의 머리말이 아니라 가슴을 적시고, 마음과 몸에 남고 육화된 몸말로 생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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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22 월. 에퀴녹스 모임 (바벨-17)

               과학사 세미나

 

  화학/생물학에 대한 발제와 토론

 

 

 

 

 

 

 

 

 

 

0723 화,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모임

 

 

 

 

 

 

 

 

 

 

 

 

 

 

 

0724 수, 빅 퀘스쳔(빅히스토리학습모임)

 

 

 

 

 

 

 

 

 

 

 

 

 

0725 목, 영화로 듣는 클래식, 녹색생태모임

 

 

 

 

 

 

 

 

 

 

 

 

 

 

 

0727 토, 희망의 인문학 - 인권연대 오창익

 

 

 

 

 

 

 

 

 

 

 

 

 

 

뱀발.  금주 청소년 청백리 학교와 함께 과학사 읽기 모임인 [현대과학의 풍경들]과 에드워드 사이디, 녹색생태모임이 새롭게 출발하네요. 늦더위에 이렇게 가속페달을 밟는 이유가 무얼까요? 함께 나누고 싶은 간절함일까요? 더위를 나름대로 식혀보자는 의도일까요?   의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찌 하다보니 모임이 겹쳤을뿐... ... 여러분의 앎에 깊이를 더하고 당신의 앎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표현이겠군요. 활동가들의 애정을 어여삐 여겨 격려 겸 참관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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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 그래요 몸과 맘을 합친 말이 뫔이에요. 사전에 없는 말이죠. 요즈음을 조금씩 쓰고 있는 듯 싶어요.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수소문하다가 쓰인 흔적이 있어 놀라기도 했어요. 말 만드는 사람을 조심하란 말씀이 있죠. 말 옮기는 사람..?  그래도 뫔이란 말은 마음도 몸도 놓입니다. 마음과 몸 사이에서 방황할 때 그 말이 있어줘 고맙더군요. 뫔 맞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죠. 그렇지 않답니다. 뫔 맞는 사이가 늘면 늘수록 좋은 것 아닐까요. 예민하고 까칠함에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이. 모임과 마음을 나누다가 이 녀석도 이들과 같은 꽈다라고 생각해봅니다.  삶의 동반자들 아니겠어요. 뫔 맞는 벗들, 님들!! 그래 시작해요. 마음과 몸의 온도를 높여보죠. 모임에서....동시대에 살면서 조금 더 넓고 깊이.....은밀하고 화려하게..도 좋군요.

 

 

짓다 만들다

 

사람들과 모임 사이, 마음을 나누다보면 오해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선입견이 들 때가 많습니다. 모임을 고르려고 하는군요. 소비의 욕구를 느낍니다. 그리고 차버리는거죠. 그런데 좋은 사람들 자장이 멀리가겠습니까? 그 나물에 그 밥!! 그렇지 않아요. 사연도 있고, 정말 못참을 일들이 많죠. 떠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런 조금 멀리보면서 생각에 잠겨보기도 합니다. 만들면 어떨까 지으면 어떨까 중이 절을 떠날 수도 있지만 절을 고쳐 쓰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몸이 무거운가 봅니다. 마음하고 몸하고 뫔을 푹 담그는데 익숙하니 말입니다. 단소리보다 쓴소리, 쓴 약을 서로 삼키는데도 익숙하고 근력도 생겨 좀더 마당을 넓고 크게 쓰면 어떨까 생각도 해봅니다. 짓고 만드는 기본근력을 키워서 말입니다.

 

 

안-곁-밖 

 

ㅇㄹ은 귀족본능보다 서민본능이 있습니다. 음식 가리지 않구 격과 절차에 맞춰 드는 음식을 별반 좋아하지 않습니다. 육해공군도 부위도 따지지 않으려하지만...세월에 인이 박혔네요.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구분도 하고 말에요. 막걸리 생각나는 주말이네요. 예전 따로 또 같이라는 문고판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구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안과 곁, 그리고 밖. 제도안, 제도곁, 제도밖을 나눕니다. 그렇게 분리해서 사고해야 조금 더 활동이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선거때만, 제도권 안만 호시탐탐 하는 문화가 암묵적으로 있구나 하는 것을 여깁니다. 그렇게 사고하다보니 정치적 중립이란 모호한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술의 중립처럼 말입니다. 그런 연유에 제도 안과 곁, 밖....사회문화적 근력이라고 해야될까요. 끊임없는 사람들의 교류를 시간에 맷집을 갖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고 여깁니다. 고기위 부위를 아직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지만 활동의 삼중주를 위해 안곁밖을 나눠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활동 스타일별로 뫔에 맞는 것이 다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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