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어느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꽃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호명되지 않는 순간, 머뭇거리는 순간, 자주 마주치지만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는 사이. 그 사이가 마음에 든다. 이름을 애써 불러 sos 타전을 할 위급함이 아니라면, 그 사이 사이 굴곡과 멈칫이 더 끌린다. 새벽과 아침. 저녁과 밤, 밤과 새벽. 너와 나만 아니라 너와 나의 사이. 명사와 동사의 부산스러움에 형용하거나 꾸밈이 날개짓하는 꼴. 어느 틈엔가 님의 졸음 한켠에 두고 나온 바람결, 은은한 향기, 별빛, 파도 소리... ...어쩌면 잠시 멈춤, 그것이 더 빠른 장단으로 내달음할지, 중중모리로 느려지는지 모르지만 의도를 벗어나 사이. 사이사이를 들여다보는 예민함과 셈세함을 곁들인 너-나의 변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 민주주의. 주의를 뺀 명사 민주만 탐하지 않는다. 민주라 이름부르기에 앞선 모호함. 설레임같은 것. 사이. 믿지못할 명사같으니라구! 끝없는 발품만 파는 동사같으니라구. 그런 것 말구 좀 허접하면 어때!
품 다
하다. 해라. 하자. 해야한다 보단 품는 것이 좋다. 겉절이도 좋지만 발효시킨 젓갈이나 시간에 삭힌 묵은 음식이 끌린다. 언제부터 일들에 숙성이란 몸말이 걸려버린다. 그래서 결과를 져버리고 팽개쳐버린 것은 아니지만, 수다같은 과정이 눈가에 어린거린다. 꼭 해야하는 결정문과 통고문보다 소수의견에 마음이 걸려 아프다. 그래서 끙끙거린다. 남이 눈치를 채든 말든, 그 한마디에 걸려 동불안, 좌불안이다. 그러다보니 나만 품기에는 억울하기도 하다. 굳이 알려야 되느냐고 타문자문도 하지만, 역시 아직 익지 않아 맛이 덜 난다. 가끔 느낌이 통하는 애서가의 글과 마음을 만난다. 가끔 말하지 않아도 찌릿한 사람들이 있다. 유명을 멀리하는 괴팍함이 있어 문제이긴 하지만 함께 품어 맛을 낼 님들, 그 생각들이 여물어 여쭙지 않아도 저만치 먼저 갈 일들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 지금여기를 애틋해 하지만 온기도 흐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온기도 쌓이다 보면 넘치는 곳도 있을 것이고 뫔 맞는 것도 이렇게 품고 숙성하고 저절로 스르르 풀린 일이기에 느긋해지고 볼 일이다.
생각
세상에 혼자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나? 자본의 그물에 걸려 파닥거릴 뿐 생각마저 꿈마저 여기를 벗어나 저기에 머무를 수 없다. 그나마 운신의 여력이 있는 것은 몸뚱아리와 맘속 생각의 정원이다. 마음의 경계, 울타리를 뜯고 고치고, 저기 멀리 또다른 과실나무를 심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로 늘 딴 생각이다. 딴 생각이라야 뭔 대단한 생각이겠는가만, 그래도 몸뚱아리보다 갇힌 뫔에서 좀더 낫게 움직거려 볼 수 있다는 점때문에 생각을 품는다. 그 생각흔적을 남기려 애쓴다. 휘발성 강한 그 쪽지들은 근력이 없어 아직 안개같다. 뭉쳐뭉쳐 빗방울이라도 후둑후둑 떨어지면 좋으련만, 여물지 않은 익지 않은 그래도 조금 색다르고 맛다른 정원을 여기저기 두어 마음은 배부르다. 또 어느 태풍같은 앎의 소용돌이에 빠져 초라해질지 모르지만, 그 읽고 생각하고 구름같은 것이 더 익숙해져 버린다.
마실-산책
더운 여름 무더위와 호흡하다 맺힌 땀방울. 등줄기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물줄기. 숨을 멈추게 만드는 일상. 동안거로 무뎌지는 몸의 갈증들. 거친 땀한줄기로 풀어내는 몸마실. 정해진 생각. 정해진 비평, 짜여진 생각틀에 갇혀버린 시간들. 이해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다른 생각이나 이해를 생각조차 못하는 기름기들. 공과 사, 생각길을 걸으려하지 않는 굽굽함과 답답함. 이리 먹구름 드리우는 날이면 책보따리, 생각보따리들고 마실나선다. 책마실, 생각마실. 그 가운데 사람마실은 으뜸일텐데. 아직 여물지 않는다. 머리 나눌 이보다 마음 나눌 이, 몸의 겹침이 간절하지만 지인들은 늘 바쁘다. 몸의 동선들은 가혹할 정도로 넓고 깊다. 세상의 곤혹함과 일의 고삐에 매인 벗들도 맘마저 매여 아직 따듯한 온기마저 나누기에 힘든 님마실. 언젠가 속맘도 통해 저기 책안의 님이 아니라 책밖의 님을 만나 달님산책, 달림마실, 생각산책도 부쩍 하고싶은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