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주주의를 함께 말하는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1)

 

말머리. 최선과 최악을 가정하고 긋는 그 선은 대부분 상식에 머물러 있다. '설마'와 '만일'을 가정하지 않기에 그 사고는 좁다. '만약'과 '설마'를 너머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끊임없이 재단하고 자르고, 아는 것으로 유혹은 길고 길다.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것, 나의 시선이 좁고 편협하고 찌그러질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는 것. 이것은 습관이자 힘이다. 주체도 존재도 단체도 야적 감수성의 물꼬를 터주지 않는 한 시야는 늘 좁을 수밖에 없다. 인권과 시민권은 당위로 전락한다. 프랑스혁명에 사로잡힌 존엄을 우리는 아직도 우려먹고 있다.

 

시민권과 인권은 변한다. 진리처럼, 별처럼 박혀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 인민의 인권이 그러하듯, 인도의 시민권이 그러하듯, 유럽 한나라의 노동권이 그러하듯 주식시세처럼 변한다. 삶을 살피지 않는 인권, 삶의 실뿌리를 건들지 않는 인권은 숨쉬기 어렵다.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사실을 살피지 않으려는 관성으로 노동은 둥실 떠내려가고 있다. 추상에 잡혀 있는 국민과 시민의 권리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은 아귀와 같은 먹고사는 노동을 함께 저울질 하려 하지 않아서는 아닌가.

 

주식의 시세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먹고사는 일에 벌벌 떨고 있는가가 분초처럼 보여야 한다. 주식종목이 그러한 것처럼 매주 시간근로의 인구가 종목처럼 잡혀야 한다. 부끄러운 일도 창피한 일도 아니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직시조차 못하는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두눈으로 똑똑히 쳐다보고 느끼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삶을 절벽으로 떨어지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인권을 말할 수 없다. 일자리가 있는 삶의 출입문에 들어온 사람들만의 권리이자 시민권이다. 국가는 베풀 아량도 능력도 없다. 국가는 힘조차 없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일자리는 없다. 실업은 노동이다. 실업자도 국민이다.

 


 

국가의 쇠퇴나 몰락은 자유주의의 시점 속에 이미 예정되어 있다. 국가는 정의라는 윤리적 시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냉소적인 사실의 지평 위에서 자신의 무능과 실패를 가늠하고 조정한다. 박근혜 정권의 국가개조론이 말하는 국가장치의 비효율, 비능률이란 발언을 허튼 기만이라고 조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진지하고 계산된 것이며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것이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작동하는지 현실에 비추어 통치를 개선하고 개량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퇴각과 축소는 사실의 편에서는 옳은 선택이고 바람직한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만을 비판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호락호락하게 여기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타락한 버전이 아니라 개선된 판본이다. 212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것이 국가인가라고 말하며 경악하는 이들에게서 국가가 사회적 총체성을 직접적으로 대의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 한다는 환상을 발견한다는 데 있다....사회란 것이 국가가 관리하고 통치해야 할 주어진 사실의 세계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관계를 표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리고 국가는 사회적 총체성을 대의하는 공공선으로 상상된다. 이는 놀라운 퇴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국가는 정의, 공공선, 안녕의 윤리적 이상을 떠맡는 주체로 격상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직면한 갈등적인 사태를 국가 비판이라는 형식 속으로 운반한다. 이는 실은 어처구니 없는 역설을 보여준다....우리는 재산, 참사, 외상적 위기를 겪게 하는 사태들에 매혹당하고 열중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이 겪은 분노와 우울, 고통을 호소한다. 마치 모두가 현상학자인 것처럼......자유의 대가로서 세계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세계의 원인을 확정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유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214

 

우리는 수동적인 불행,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불행,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고발, 비난, 규탄, 호소, 투쟁의 흔적은 말끔히 표백된 불행, 잠시의 감상적인 연민을 통해 쾌적하게 소비되고 곧 휘발되어버려야 하는 불행을 매일 한 꾸러미씩 선물 받고 태연자약 즐긴다. 이러한 불행의 경연은 진보적 저널리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르포르타주와 같은 장르는 더 이상 위선적인 세계가 은폐하고 있던 거짓의 증거로서 불행을 폭로하지 않는다. 폭로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그다음에 일어나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폭로를 통해 깨닫게 된 세계를 향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 토론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체하는 언론 역시 불행을 폭로하는 일에 분주하다. 그리고 그를 듣고 읽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마치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불행을 기다리며 연민을 준비한다. 이는 피해자는 있었지만 투사는 없는 세계가 보여주는 도착적인 초상일 것이다. 218


스스로를 단체로서 조직화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의 모순을 다른 방식으로 주관화하면서 동시에 객관화하는 것이다.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이 서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주체의 편에서의 전환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에서의 전환을 초래한다. 노동자계급이 조직화되어 자신을 새롭게 주체화할 때 자본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방식을 조직할 수 없고, 이윤을 착취할 수 없으며, 국가를 지배할 수 없으며....., 등등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방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주체의 편에서 단체로 조직된 주체로의 전환이 이뤄지자마자 나타나는 일은 주체의 각성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새로운 세계로 바뀌는 것이다. 224-225


이는 세계는 결국 보는 이의 관점에 달려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력한 낭만적 부정을 가리킬 따름이다. 느낌의 공동체니 기억, 애도의 공동체니 하는 말들은 우리 시대의 윤리-정치적 유행어구들일 것이다. 그런 몸짓은 '세계 없는' 주체의 편에서 이뤄지는 낭만적인 부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부정을 회피한다. 현실적 부정 혹은 변증법적 부정이란 객관적인 세계를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변증법적 부정이란 객관적인 것에 항상 주관적인 것이 연루되어 있고 또 그 역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225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에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다는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227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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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찾아온 목소리'를 들었을뿐이다. 

 

 

말이 포말처럼 밀려온다. 그 아픈 말 한 점도 가려 건지지 못했다.

나는 말을 찾아가는 존재였으므로. 찾아가기만 하는 존재이므로ᆞᆞᆞ

 

찾아온 목소리는 길을 잃고 여기저기 노숙이다.

상처입은 말들이 흥건하다. 듣고싶은 말만 고를 줄 알기에 ᆞᆞᆞ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 말들이 한마리 말이 되어 오는 시간은 있을까.


'길을 그리기 위해선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한다'는 시인의 말이 맴돈다.

 

ㅡ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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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가지의 유혹을 피해야 한다. 행복의 정치라는 긍정의 정치와 진리의 정치라는 순수한 부정의 정치, 두 가지 유혹 말이다. 이 두 가지의 유혹은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정치에 관한 이론 그리고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출현한다. 그리고 여기에 실린 글에서 나는 이 두 가지 유혹에 맞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와 그것을 궁리하기 위한 물음들을 제시하고 답하려 애쓴 시도를 기록하고자 한다. 017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주체를 모두 마주하게 된다. 먼저 하나는 보편적인 주권적 주체로서의 인민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여러 가지 사회적 집단의 총체로서 인민일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99%이다라는, 얼핏 듣기엔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왜 정치적으로는 불임의 외침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99%라는 숫자는 대표되기 위해 헤아려져야 할 현실만을 알 뿐이다. 그것은 누가 얼마나 많이 대표되어야 하는가에 골몰할 따름, 그 현실을 창설하는 행위와 인물을 고려에 놓지 않는다. 031

 

푸코는 자유주의라는 통치성은 주권을 가진 시민들의 연합으로서의 공화국이 아니라 행복, 장수, 안녕 등을 추구하는 개인과 그 개인들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를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033

 

우리가 말한 민주주의의 역설, 보편적인 주체로서의 인민과 동일시에 따라 조직된 사회적 개인들의 모임으로서의 인민의 동일성이라는 역설은 이제 해결될 것이다. 누구보다 그 문제에 관하여 잘 안다고 자처하는 전문가들이 대리하는 인민, 자신의 문제를 굳이 대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고 증언하는 측은한 피해자로서의 인민, 정치는 소통의 문제라고 분통을 터뜨리며 방청석에 앉아 정치평론가의 토론을 청취하는 인민, 그런 인민에게 새로운 세계는 없을 것이다. 046

 

“xx사회라는 것이 사회라는 대상을 경험적이고 실제적으로 서술하거나 묘사한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나 혹은 우리의 눈에 비친 혹은 의식에 나타나는 사회의 이미지를 고백할 뿐이다. 그렇기에 너무나 많은 사회의 이미지들은 실은 사회란 것에 관한 일관된 이미지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짐일 뿐이다....그것은 그를 통해 사회라는 유기적 전체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을 제거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회에 관한 지식을 통해 사회에 관한 의심을 침묵시킨다. 062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사회국가가 기대었던 연대와 집합적인 책임이 원리는 점차 탈국민화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탈국민적인 연대는 사회적인 것을 특정한 유대로 조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대신 신자유주의의 온전한 파트너로 이바지하면서 분할되고 시장화된 연대의 섬들이 국민연대의 빈자리를 성기게 채우고 있다....더 이상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공되는 집합적인 연대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안전에 따라 시장이 제공하는 사이비 연대를 구입하는 산산이 흩어진 개인들의 연대이다. 065-066

 

지금 우리가 바라보게 된 새로운 연대를 연대의 해체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연대의 조직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이는 열려있고 또한 논쟁 중인 쟁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일지 지레짐작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 아닐 수 없다. 067(068질문들 참고)

 

실업은 자본의 운동의 법칙의 일부이자 그것의 필연적인 효과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을 흡수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뱉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실헙은 자본의 외부에 놓여있는 노동을 가리키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자본주의라 해도 그러한 실업을 배제한 채 노동을 말할 수 없다.....자본은 실업을 만들어낸다. 실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상수인 것이다. 103

 

자본은 영속적인 실업과 빈곤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결국 자본이 존속하려면 노동권은 제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이 적용된 이차적인 하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의 권리에 구체적인 낯을 부여한다. 노동의 자기영유,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인간-시민이야말로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시민이기 때문이다. 노동권은 거꾸로 인권과 시민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109

 

부즈주아적 테제의 승리 - 노동은 권리의 기초가 아니라 노동자가 되어 고용된 자가 누릴 권리의 작은 부분으로 축소된다. 즉 인간-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직업을 가진 자들의 권리로 제한되고 만다. 결국 노동은 사적 소유의 문제로 귀착된다. 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소유한 노동자들, 그러한 사적 개인들이 누릴 권리가 되는 셈이다. 112

 

필라델피아 선언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 결핍과의 투쟁은 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그리고 노동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가 정부 대표와 동등한 지위에서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자유로운 토론과 민주적인 결정에 함께 참여하는 지속적이고도 협조적인 국제적 노력에 의해 수행돼야 한다./헌법 제321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해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133-134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매개된 그리고 그것의 내재적인 귀결로서 노동의 규정을 부정하는 것, ‘규정적 부정에 이르지 않는 한, 그러한 비판은 신종 감정 사회학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울분과 비판의 파토스로 자본주의를 저주라는 것은 부정이 될 수 없다. 노동의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권리의 세계를 조망하는 것이다. 138

 

노동 없이 인권과 시민권의 정치를 상상할 수 없다. 그렇지만 또한 실업을 배제한 노동의 정치 역시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대개 우리는 오직 노동만을 말하며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거나 오직 민주주의만을 말하며 노동은 말하지 않거나 한다....그런 세계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불평등과 착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라지고 있는 사회국가가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연대의 다른 이름인 사회를 통해 고용된 노동자는 물론 실업자, 여성, 아동, 노년, 질병에 걸리거나 재해를 입은 자 등의 삶을 보호하였다. 140

 

우리는 오직 시장에 입장할 수 있을 때, 즉 고용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보호와 안전을 제공받는다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권리의 토대는 오직 시장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인권과 시민권을 쇠퇴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업은 사회문제도 아니고 노동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시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민주주의로서의 정치가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140-141

 

두 제곱된 사고란 프레드릭 제임슨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사유를 가리키려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는 변증법적 사유란 두 제곱된 사고, 즉 사유 자체에 대한 사고로서, 정신은 대상이 되는 자료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 과정도사유의 대상으로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가 정치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는 사고된경제, ‘반영된경제가 아니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한 번만 제곱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제곱해야 한다. 경제는 직접 정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외려 정치가 스스로의 대상을 갖도록 함으로써 정치를 결정한다. 158-159

 

잉여가치는 사물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관계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는 계급적인 착취, 혹은 계급투쟁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잉여가치는 어떤 추가적인 크기의 양이 아니다. 그것은 공장 안팎에서 노동자의 일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전반적인 생활양식을 조정하는 원인이다. 이것은 성이란 것이 이러저러한 신체의 생리적인 활동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제아무리 성을 무엇이라 구체적인 실정적인 대상으로 환원하려 해도 성은 그런 사실적 실체를 초과한다. 169

 

신이 사라진 이후에 자유를 떠맡은 주체, 자유의 심연으로서의 주체라는 널리 알려진 주장을 떠올리며, 주체의 자유와 정치가 동일한 것일 수 있겠다는 정도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그리고 이와 더불어 주체의 자유를 어떻게 원인을 발견하고 제어하는 행위와 결합시킬 수 있냐는 물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덧붙이도록 하자. 200

 

존재가 주체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말은 주체의 능동성이 아니라 대상의 능동성이란 역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쳐 읽어볼 수 있다. 지젝이 어느 글에서 간지럼을 타는 주체라고 말한 바처럼 주체는 대상에 의해 간지헙혀진다. 주체의 전환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렇게 부정 즉 규정을 통해 재인식된 대상은 주체로 하여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못하게끔 이끈다...주체는 짐작과 달리 지극히 수동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계를 괄호친 채 적극적으로 윤리적 주체가 되어 세계의 바깥으로 달아나는 능동성을 연기한다. 206

 

참여하라, 참여하라, 그것이 너의 윤리적인 의무이다” ‘촛불 시위이후 우리는 조직 없는 다중으로서 어떤 위계와 권위적인 지침 없는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로서, 모든 사태에 적극적으로 윤리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받아왔다....그러나 그 자리에 모이는 다중은 추상적인 세계를 상대할 뿐이다...그리고 각각의 사태는 모두 동등한 보편적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할 무엇으로서 상징화된다. 게다가 그런 사태는 너무나 많고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에 오는 화려한 사태에 자리를 넘겨준다. 이는 실은 너무 퇴폐적으로 보이지 않는가...그러한 하나하나의 사태들은 지극히 추상적인 주관적 윤리를 요청할 뿐이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사태의 총체 속에 등록되지 않는다....쌍용자동차 사태를 비롯한 중요한 사태에 개입하는 담론이 외상후증후군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에 놀라곤 한다. 그것은 고통을 겪는 심리적인 개인을 전면에 내세울 뿐 그들을 투쟁 속에 있던 집단적인 사회적 주체 혹은 계급으로서 재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그것이 정치와 윤리의 관계를 왜곡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정치의 윤리란 부정 혹은 투쟁을 주체화하는 것이 곧 부정/투쟁의 대상을 규정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를 도덕화한다는 것은 정치를 도덕적인 규범의 문제로 환원하고,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계에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것인가로 묻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즉 그것은 세계 없는 주체의 자폐적인 반성을 가리킬 뿐이다. 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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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동과 민주주의를 같이 말하는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2)
    from 木筆 2014-12-15 09:35 
    국가의 쇠퇴나 몰락은 자유주의의 시점 속에 이미 예정되어 있다. 국가는 정의라는 윤리적 시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냉소적인 사실의 지평 위에서 자신의 무능과 실패를 가늠하고 조정한다. 박근혜 정권의 국가개조론이 말하는 국가장치의 비효율, 비능률이란 발언을 허튼 기만이라고 조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진지하고 계산된 것이며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것이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작동하는지 현실에 비추어 통치를 개선하고 개량하는 것이 자유주의
 
 
 
변증법의 낮잠 - 적대와 정치
서동진 지음 / 꾸리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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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은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이다


ㅡ 「변증법의 낮잠」제목이 무취하다는 느낌이다. 손에 쥐고 다니며 볼 수 있는 판형인데다가 붉은 색인데 말이다. 「말과활」잡지에 연재된 내용을 실었다. 다시 통독을 하다. 3장 정치의 불변항 노동에 맞춘다면 ˝불온의 서˝?로 하던지 저자가 지적하는 낭만적 해소에 그친 건 아닐까. 혹시 다른 책은 아닐까했는데 다소 실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용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필라델피아 선언과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과 근로의 권리를 제기하고 노동을 정치의 전면으로 끌어 올리는 것. 주체의 문제를 최선과 최악의 사이를 변증법으로 사유해내 현실의 틈을 벌리는 것.에 대한 고민과 사유가 남다르다.


ㅡ 세월호에 대한 부분도 예민하다.감정적 소화가 아닌 주체의 구성?과 본질에 대해 되묻는 질문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단체나 주체를 만드려는 노력조차 없는 점들도.

★ 마르크스의 자본을 노동이 아니라 실업에 관한 책으로 읽을 것
☆ 간지럼을 타는 주체도 재미있고 밀고나가게 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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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별거없다. 금지선 - 넘는다고 인생달라지는 건 없다. 남녀밖의 존재.

 


 

 

 

29금 

 

별거없다. 둘이선 - 혼자 할 수 없다. 내뜻대로 세상은 돌지 않는다. 지동설의 학 學.

39금 

 

별거있다. 낳고선 - 자식 아플때 대신 아프지 못해 아프다. 자식은 또 다른 심장이다.

49금 

 

별거있다. 죽고선 - 죽음의 선을 일찍 밟을수록 삶의 강도가 강열하다. 삶의 찬연.

59금 

 

별거있다. 남고선 - 할 것보다 남길 것을 먼저 헤아린다.

어떻게든 움직이게 한다. 미력의 현 賢.

69금 

 

별거없다. 같이선 - 세상은 꿈쩍거리지 않는다. 기대하는 것과 기대는 것. 덧셈의 묘 妙.

79금 

 

별거없다. 약자선 - 세상은 약자로 이뤄진다.  한줌의 강자와 절대다수의 약자다.

 약함의 설 舌.

89금 

 

별거없다. 아픔선 - 아파하지 않는다. 통증은 몰려있다. 약하고 아프고 보잘 것 없는 것에. 총량은 변하지 않아도.

99금

 

별거있다. 죽음선 - 죽어도 죽지않는다. 죽고도 살아있는 것이 이리 많다. 이리도.

 

 


 

 

 

볕뉘.  어른은 없고, 살되 건강에 저당잡혀, 잃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건강하되 아프고 난 뒤 세상은 낭떠러지일 것이라고 여긴다. 세상은 자꾸 유아만 낳고, 포르말린처럼 부패하지 않기만 바란다. 생각도 고민도 삶도 그렇게 전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터부를 넘지도 밟지도 밀고나가지도 않아 온통 좀비로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돈과 자식, 가족밖에는 정녕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란 말인가. 생각도 생활도 19금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사람의 삶이 19세의 쇠스랑에 매여있는 것은 아닐까. 말해야할 것들을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새겨야할 것들을 새기지 못한 것은 아닌가.  어른이만 여기저기 목청만 높이는 건 아닌가. 나이의 문턱은 이리 없어도 되는가. 욕구와 욕망만으로 빚은 '나'만의 밀랍인형은 아닌가. 한치도 다름없는 '나'를 본다. 서성거리는 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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