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주주의를 함께 말하는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1)

 

말머리. 최선과 최악을 가정하고 긋는 그 선은 대부분 상식에 머물러 있다. '설마'와 '만일'을 가정하지 않기에 그 사고는 좁다. '만약'과 '설마'를 너머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끊임없이 재단하고 자르고, 아는 것으로 유혹은 길고 길다.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것, 나의 시선이 좁고 편협하고 찌그러질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는 것. 이것은 습관이자 힘이다. 주체도 존재도 단체도 야적 감수성의 물꼬를 터주지 않는 한 시야는 늘 좁을 수밖에 없다. 인권과 시민권은 당위로 전락한다. 프랑스혁명에 사로잡힌 존엄을 우리는 아직도 우려먹고 있다.

 

시민권과 인권은 변한다. 진리처럼, 별처럼 박혀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 인민의 인권이 그러하듯, 인도의 시민권이 그러하듯, 유럽 한나라의 노동권이 그러하듯 주식시세처럼 변한다. 삶을 살피지 않는 인권, 삶의 실뿌리를 건들지 않는 인권은 숨쉬기 어렵다.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사실을 살피지 않으려는 관성으로 노동은 둥실 떠내려가고 있다. 추상에 잡혀 있는 국민과 시민의 권리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은 아귀와 같은 먹고사는 노동을 함께 저울질 하려 하지 않아서는 아닌가.

 

주식의 시세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먹고사는 일에 벌벌 떨고 있는가가 분초처럼 보여야 한다. 주식종목이 그러한 것처럼 매주 시간근로의 인구가 종목처럼 잡혀야 한다. 부끄러운 일도 창피한 일도 아니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직시조차 못하는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두눈으로 똑똑히 쳐다보고 느끼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삶을 절벽으로 떨어지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인권을 말할 수 없다. 일자리가 있는 삶의 출입문에 들어온 사람들만의 권리이자 시민권이다. 국가는 베풀 아량도 능력도 없다. 국가는 힘조차 없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일자리는 없다. 실업은 노동이다. 실업자도 국민이다.

 


 

국가의 쇠퇴나 몰락은 자유주의의 시점 속에 이미 예정되어 있다. 국가는 정의라는 윤리적 시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냉소적인 사실의 지평 위에서 자신의 무능과 실패를 가늠하고 조정한다. 박근혜 정권의 국가개조론이 말하는 국가장치의 비효율, 비능률이란 발언을 허튼 기만이라고 조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진지하고 계산된 것이며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것이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작동하는지 현실에 비추어 통치를 개선하고 개량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퇴각과 축소는 사실의 편에서는 옳은 선택이고 바람직한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만을 비판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호락호락하게 여기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타락한 버전이 아니라 개선된 판본이다. 212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것이 국가인가라고 말하며 경악하는 이들에게서 국가가 사회적 총체성을 직접적으로 대의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 한다는 환상을 발견한다는 데 있다....사회란 것이 국가가 관리하고 통치해야 할 주어진 사실의 세계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관계를 표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리고 국가는 사회적 총체성을 대의하는 공공선으로 상상된다. 이는 놀라운 퇴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국가는 정의, 공공선, 안녕의 윤리적 이상을 떠맡는 주체로 격상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직면한 갈등적인 사태를 국가 비판이라는 형식 속으로 운반한다. 이는 실은 어처구니 없는 역설을 보여준다....우리는 재산, 참사, 외상적 위기를 겪게 하는 사태들에 매혹당하고 열중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이 겪은 분노와 우울, 고통을 호소한다. 마치 모두가 현상학자인 것처럼......자유의 대가로서 세계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세계의 원인을 확정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유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214

 

우리는 수동적인 불행,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불행,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고발, 비난, 규탄, 호소, 투쟁의 흔적은 말끔히 표백된 불행, 잠시의 감상적인 연민을 통해 쾌적하게 소비되고 곧 휘발되어버려야 하는 불행을 매일 한 꾸러미씩 선물 받고 태연자약 즐긴다. 이러한 불행의 경연은 진보적 저널리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르포르타주와 같은 장르는 더 이상 위선적인 세계가 은폐하고 있던 거짓의 증거로서 불행을 폭로하지 않는다. 폭로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그다음에 일어나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폭로를 통해 깨닫게 된 세계를 향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 토론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체하는 언론 역시 불행을 폭로하는 일에 분주하다. 그리고 그를 듣고 읽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마치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불행을 기다리며 연민을 준비한다. 이는 피해자는 있었지만 투사는 없는 세계가 보여주는 도착적인 초상일 것이다. 218


스스로를 단체로서 조직화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의 모순을 다른 방식으로 주관화하면서 동시에 객관화하는 것이다.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이 서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주체의 편에서의 전환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에서의 전환을 초래한다. 노동자계급이 조직화되어 자신을 새롭게 주체화할 때 자본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방식을 조직할 수 없고, 이윤을 착취할 수 없으며, 국가를 지배할 수 없으며....., 등등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방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주체의 편에서 단체로 조직된 주체로의 전환이 이뤄지자마자 나타나는 일은 주체의 각성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새로운 세계로 바뀌는 것이다. 224-225


이는 세계는 결국 보는 이의 관점에 달려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력한 낭만적 부정을 가리킬 따름이다. 느낌의 공동체니 기억, 애도의 공동체니 하는 말들은 우리 시대의 윤리-정치적 유행어구들일 것이다. 그런 몸짓은 '세계 없는' 주체의 편에서 이뤄지는 낭만적인 부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부정을 회피한다. 현실적 부정 혹은 변증법적 부정이란 객관적인 세계를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변증법적 부정이란 객관적인 것에 항상 주관적인 것이 연루되어 있고 또 그 역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225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에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다는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227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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