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 흩어진 동백꽃잎들과 동백잎이 마음에 걸렸다

 

 몇 걸음 더 옮기자

 

 벚꽃잎들이

 

 어젯밤 바람이 몰려간 흔적을 말해준다.

 

 

 아침에

 

 길가 벚꽃길은 밝은 기운이 쭉 가라앉았다.

 

 

 그렇게 내린 채도와 명도만큼

 연두빛이

 

 여기저기 걸려 오른다.  꽃잎은 흩어져내리는데... ...

 

 

 뱀발.  꽃잎들이 피어오를때 함께 그려주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벌써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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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과 기술 2장 도구와 대상 프로메테우스인가 오르페우스인가 - 제우스가 묶어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아버린다.

 

예술을 한쪽으로 몰아붙이거나 단순히 실제적 필요의 하수인으로-지금 예술이 선전에 이용되는 방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문명은 실제로 인간 본성의 본질을 무시하거나 격하하는 것입니다. 지금 미적 상징의 과소평가와 인간의 주관적 세계로부터의 퇴각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행진하고 있습니다. 기계적으로 조작된 마음의 현대인이 선호하는 세계란 감정과 정서가 의도적으로 제거된 세계입니다. 즉 애매하고 내면적으로 보이거나, 수량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는 세계입니다. 또 목적과 의도가 아니라 수단과 결과에만 몰두하는 비인격적인 세계입니다.” 73

 

역사를 통해 16세기까지 기술적 수단은 매우 느리게 발전했습니다. 운송 수단으로서의 수레가 발명되기 이전에 이집트와 페루에서는 엄청나게 복잡한 문명이 발생했습니다. 만일 인간이 뛰어난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었다면 이러한 기술의 장기적 후진성은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로지 인간의 상징적 기능이 고도로 성숙한 뒤에야 비로소 인간은 그의 기술적 능력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인간은 생존을 위한 예비적 행동들에 그 삶의 대부분을 바쳐야 한다는 필연성에 의해, 타락이 아니라 기만당한 느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79

 

질서와 힘에 대한 인간의 요구는 그를 기술과 대상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는 자유로운 활동, 자율적인 창조, 의미 있는 표현에 대한 요구가 인간을 예술과 상징으로 향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기술적 성취가 그의 생존과 발전에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들이 역사 시대를 걸쳐, 인간의 다른 기능들을 희생하여 달성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84

 

기계화의 습관, 정해진 과정과 엄격한 훈련에 대한 굴종, 비유기적인 것과, 유기적이거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소름끼칠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왜곡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자발성은 엄청난 저항 없이는 이룩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그의 모든 주관적이고 질적인 삶을 기꺼이 내던졌음이 판명된 것은 우리 시대에 와서야 가능했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그 순수한 형태에서 놀이와 허구, 공상과 상징, 인격의 다른 측면에서 나오는 가치를 향한 인간의 뿌리 깊은 성향에 의해 억제됐습니다.” 85-86

 

상징에 대한 철저한 집착, 내면세계로의 완전한 퇴각은 완전한 형식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 발전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90

 

 

2. 논리를 갖는다는 것 - 설명과 설득을 위해서는 손에 잡히는 스토리와 구어체의 표현이 녹아 있어야 한다. 낯선 말로는 설득할 수 없다. 핵심적인 꼭지가 세가지 정도로 서로 맞물리고 퍼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론을 적절하게 되짚는다.

 

3. 다시 읽는 맑스주의 사상사 알랭 바디우와 자크 랑시에르 편을 읽다. 조금씩 읽어내던 단편들과 흔적들이 제법 무게를 가질 수 있겠다 싶다.

 

4. 면담 요청이 들어와 찾아가 상담을 한다. 생활의 아픔과 푸념, 피해의식이 서로 뒤엉키고 섞여 있다. 이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버틴 불면의 밤들과 틀과 구조에 밀려나면서 겪은 것들이 몰려서 비집고 나온다. 주장도 요구도 모두 섞여있다. 듣고 듣다.

 

5. 부산스럽게 다녀도 일들은 깔끔하지 않다. 몸으로 챙기고 시행착오만큼 배우게 되는 것이 맞다 싶다. 그래도 진도 나가는 맛이 있다.  노트묵에 파일들을 이동드라이브로 옮기고, 정리하고 청소하고 세팅하고 일도 마음도 차분해지도록 한다.  시원하다.  다음주부터는 몸도 마음도 정신 차릴 수 있을 것 같다. 어제 한 동료는 작년 얘기했던 기억을 더듬어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하고싶은 것이 있어도 방법도, 다가서는 기술 하고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을 새삼느끼게 된다. 멍석은 깔아주기까지 여러 노고가 필요하다. 그 다음은 다음 일이다. 한 계단이라도 올라서는 일이 먼저다.  일의 맥락은 머리부터 잡는 것인지도..그래서 시작이 반이라고 한 것인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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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과 기술의 1강 예술과 상징 - 서론을 읽은 뒤, 며칠이 지난 새벽 책이 손 끝에 들어온다. 다시 살펴보다

 

 

"3세기 반 전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을 현재 상태에서 구제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과학 지식의 발전과 기계의 바명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신앙심이라는 속죄의 제스처로, 종교와 철학과 예술에 등을 돌리고새로운 기계의 발전에 인류 진보를 위한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삶의 지침에 대한 글을 끝마친 후가 아니라,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얼음 사용에 대한 최초의 실험들 중 하나에 몰두하다가 죽음을 맞았습니다....뉴턴, 패러데ㅣ, 와트와 그 아류들은, 어렵게 얻은 물질세계에 대한 통제가 20세기에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베이컨은 기계의 인간화가 인간성의 기계화라는 역설을 낳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40-41

 

2. 맑스주의 사상사 포스트 알튀세르 주의자들편(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흩틀어져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지식이 파편들을 조금은 추수려놓아야 할 듯 싶다. 주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는 편, 발리바르를 챙겨본다. - 주체는 발견되거나 발명, 만들어져야 한다. 모순을 자양분으로...그래야 그만큼이라도 세상은 변한다.

 

" 사람들이 데카르트에게서 존재하나고 믿고 있는 그러한 '주체' 개념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율성 혹은 자유는 '예속존재' 혹은 '신민'의 자유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역설이다. 따라서 1789년 이전에, 즉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전에 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민이 주체이후에 오는 것이라면, 이 시민 이전의 주체는 '예속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민은 "[예속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주체 이후에 오는 비-주체이며, 그것의 구성과 승인은 (원칙적으로) 주체의 예속에 종지부를 찍는다." 344-345

 

 

3. 5장을 다시 살펴본다. 작가의 시선으로...

 

4. 벚꽃이 만개했다. 아니 모든 꽃들이 한몫에 피어버렸다. 철쭉도 무르춤할 뿐 고개내민 녀석은 벌써 짙은 색을 뿜고 있다. 능수벚꽃을 찾다. 비소식에도 비는 없고 사진에 불쑥 달이 구름사이로 비쳐 걸려있다. 벚꽃숭어리들이 여기저기 끝이 없이 핀다. 내일을 잊은 듯 한껏 부풀려있다.

 

5. 윤여일샘의 상상  002호 원고를 본다. 자신의 지적 탐색과 글쓰기를 되짚으며 쓴 소회가 인상깊다.

 

논문을 쓰며 생각했다. 논문이란 물을 꺼내고 답에 이르는 글쓰기다. 하지만 막상 써보니그 과정은 거꾸로 진행되었다. 내가 먼저 상정해둔 답이 있고, 물음을 그 답에 끼워 맞추게 되었다. 그러면 답할 수 있는 물음만을 꺼내게 된다. 답보다도 본질적일지 모른 답할 수 없는 물음은 자제하게 된다.....때로는 답보다도 물음 쪽이 중요하고 오래 살아남지 않던가. 나는 시대의 과제와 대면하며 답을 찾아나선 학자들을 존경하지만, 과격한 물음을 들이밀어 시대의 정신에 파열을 낸 사상가들도 사랑한다.....기워놓은 문장들은 논문을 들고 흔들면 제각각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말의 시체더미였다. 더욱이 일 년 가까이는 논문 생각이었는데 끝내놓고 돌아보니 어느 문장 하나 내 삶과 닿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답은 없었다. 하지만 방향은 어렴풋이 알았다. 이론으로 무장하거나 답을 향해 체계적으로 짜인 글 이전에 자신의 물음을 속이지 않는 글. 답을 내야한다는 조바심이 물음을 향한 절실함을 내리누르지 않는 글. 지식의 언어로 구축된 세계와 피부감각의 세계 사이를 가로지르는 단층을 주시하는 글. 사고의 힘이 부족해 비약을 거듭하고는 섣부른 결론에 내맡기는 게 아니라 결론에 이르지 못할지언정 능력이 닿는 데까지 사고의 절차를 구체화하는 글. 방향은 얼추 정해졌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 동아시아 담론이 동아시화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원리성을 발굴해내는 동시에 그것이 타자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가다듬어야 한다. 다시 말해 보편성의 층위, 번역의 지평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게 번역의 가치를 지닌 사상이라면, 그것이 출현한 사회에서 쓰임새를 가질 뿐 아니라 다른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야 없겠지만 다른 사회를 해석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번역의 노력과 시련 속에서야 한국 동아시아 담론은 내수용 담론에서 벗어나 동아시아화될 수 있을 것이다.”

 

6. 개인의 일상과 글쓰기에 대한 녹아있는 이력을 탐하고 기록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편집자로서 등등 정해진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과 관점을 교차시키면서 독해하는 그의 모습이 다시 읽힌다. 그런면에서 역사가 묻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발굴할 수 있으며 유산화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지금여기는 늘 '미분적 잠재성'이기도 하다. 읽다가 서동진교수의 두 제곱의 사유가 겹친다. 정치와 경제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면서 닿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고, 결과물을 내야하고 결과물을 쫓는 일상과 과업들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놓쳐서 정작 똑 같은 대답만 너저분하게 있는 것은 아닐까? 화두라는 것은 그런 면에서 객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란 주관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주객관의 이중적 시선, 방법으로서의 OO, 생각을 캐는 광부 모두 막장에서 다른 사유와 삶을 캐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7. 어쩌면 우리는 전체를 보려는 시도를 외면하고, 짧은 시간에 사로잡혀 늘 단편적인 진리만 쫓는 것은 아닐까? 진리는 살지 않고 늘 도망다니듯이 피해가는 것은 아닐까? 전체를 보려는 작은 시도와 노력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늘 부분만 되돌이표처럼 사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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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정치에 관한 저작도 아니려니와 더욱이 노동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업게 관한 책이다.“

 

자본이 존속하려면 그러한 노동권은 제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이 적용된 이차적이거나 하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의 권리에 구체적인 낯을 부여한다. 노동의 자기 영유,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인간 시민이야말로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 시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의 하위 집합이 아니라 거꾸로 인권과 시민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노동권을 제거하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인간도 제거하는 것이 된다. 그럼 인권/시민권과 노동권의 모순이라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 해결책은 오늘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노동이 아니라 소유라는 관념을 변형하는 것이다. 개인적 소유를 사적 소유로 전화시킴으로써, 노동권은 권리의 기초로서의 노동을 제거하면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자본은 인권과 시민권을 부정하지 않고서도 노동을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110

 

 

정치의 윤리란 부정 혹은 투쟁을 주체화하는 것이 곧 부정/투쟁의 대상을 규정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정치의 윤리화라고 말할 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정치의 도덕화라고 불러야 옳다고 본다. 정치를 도덕화한다는 것은 정치를 도덕적인 규범의 문제로 환원하고,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계에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것인가로 묻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즉 그것은 세계 없는 주체의 자폐적 반성을 가리킬 뿐이다. 209

 

우리는 파국의 시학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 사상적 문제로서의 세월호, 주관적 문제로서의 세월호라는 판단에서 벗어나 주관적이면서도 동시에객관적 문제로서의 세월호라는 문제에 이르러야 한다. 210

 

우리는 금융 위기 이후 세계를 뒤덮은 자본주의적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말 그대로 재현불가능한 숭고처럼 바라보는 듯하다. 그것이 주체화되기 어려운 한계를 가리키는 양 말이다. 반면 우리는 재난, 참사, 외상적 위기를 겪게 하는 사태들에 매혹당하고 열중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이 겪은 분노와 우울, 고통을 호소한다. 마치 모두가 현상학자인 것처럼 나에게 나타나는 바 대로의 세계 너머의 세계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아니 앞서 말한 대로 매개할 것인가. 그리고 자유의 대가로서 세계의 무의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세계의 원인을 확정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유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그것은 영어에서 원인(cause)을 가리키는 낱말의 또 다른 말뜻인 대의(cause)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하는 것이지 않을 수 없다. 계급투쟁은 계급 간의 투쟁이 아니라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이란 말을 따른다면, 다시 말해 새로운 대립의 배치를 만들어냄으로써 세계를 존재적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주관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쫓자면, 우리는 세월호 사태란 없다고 기꺼이 말해야 한다. 215

 

르포르타주와 같은 장르는 더 이상 위선적인 세계가 은폐하고 있던 거짓의 증거로서 불행을 폭로하지 않는다. 폭로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그다음에 일어나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폭로를 통해 깨닫게 된 세계를 향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 토론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체하는 언론 역시 불행을 폭로하는 일에 분주하다. 그리고 그를 듣고 읽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마치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불행을 기다리며 연민을 준비하다. 이는 피해자는 있었지만 투사는 없는 세계가 보여주는 도착적인 초상일 것이다.어쩌면 이는 윤리적인 허무주의가 취할 수 있는 극단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불어 이는 정치적 노선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나타난다. 좌파나 우파나 모두 불행이라는 세상의 기후를 즐긴다. 218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체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던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세계를 모순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227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229

 

볕뉘. 다시 살펴본다. 또 다시 다음 줄거리가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되살핀다. 저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논리의 뿌리를 살펴보려 한다. 세월호 사태는 기꺼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고 제목을 적으려다 무르춤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자본론의 시작부터 다시 틀을 사ㅗ하고 정치와 국가, 경제를 다시 소환해서 이어붙여야 하는 작업외 추체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지경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도, 현실에서 구할 수밖에 없음을, 답도 그러하다는 것을 빨리 눈치차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울을 늪을 벗어나려면 정신차리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만들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시...그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고와 퇴행은 그만해도 족하다. 숨은 의표를 살피는 작업이 더 예민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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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의 우물을 서성이다.
    from 木筆 2015-04-16 11:35 
    '글의 우물' - 난 그곳에서 노오란 민들레와 함께 서성인다. 서성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래도 냉정과 이성을 되찾고 싶기도 했다. 서성이면 서성일수록 우울과 낙담과 절망은 남의 것이 아니었다. 평을 해내는 것보다 직면하기가 더 어렵고 곤란하다는 사실만이 곧추 나를 쳐다본다. 글의 우물에 꽃잎이 서린다. 우박처럼 내렸다. 동심원처럼 퍼지는 것은 무엇일까. 객관과 이성이 없는 나는 마음을 쳐다본다. 어쩔 줄 모를 수밖에....소장학자의 마음이 일렁인다
 
 
 

 008 - 국가기관은 공공악이 아니다

 

1. 치안담론은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선용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2. 아주 작은 변화로 등하교길 교통안전, 도보순찰을 비롯한 득을 볼 수 있다. 행정 시스템을 통한 요구가 이나라 운동비평 정책공약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

 

3.그러니 중앙과 서울이 아니라 구단위 지역단워의 담론이 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4. 몇년사이에 2,2만명이 늘은 조직이다.

 

5. 선입견에 생각을 멈춘 순간 우리는 국가기관에 시달리기만 할뿐 부려먹을 수 없다.

 

6.교육에 애타게 혼신을 퍼붓는 백분의 일만 퍼부어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고와 고민의 접점을 바꾸어라.

 

7. 이는 내말이 아니다. 대충인권연대 목요일 경찰 사귀면 바뀐다. 강의와 뒤풀이 내용이다.

 

8.지역과 생각과 담론의 틈을 찾고싶다면 들어도 손해볼 것 없다. 다음은 검찰이다.

 

9. 국가도 그러하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니다. 부여한 역할에서 다시 짚고 다시 울부짖어야 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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