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술과 기술의 1강 예술과 상징 - 서론을 읽은 뒤, 며칠이 지난 새벽 책이 손 끝에 들어온다. 다시 살펴보다

 

 

"3세기 반 전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을 현재 상태에서 구제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과학 지식의 발전과 기계의 바명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신앙심이라는 속죄의 제스처로, 종교와 철학과 예술에 등을 돌리고새로운 기계의 발전에 인류 진보를 위한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삶의 지침에 대한 글을 끝마친 후가 아니라,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얼음 사용에 대한 최초의 실험들 중 하나에 몰두하다가 죽음을 맞았습니다....뉴턴, 패러데ㅣ, 와트와 그 아류들은, 어렵게 얻은 물질세계에 대한 통제가 20세기에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베이컨은 기계의 인간화가 인간성의 기계화라는 역설을 낳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40-41

 

2. 맑스주의 사상사 포스트 알튀세르 주의자들편(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흩틀어져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지식이 파편들을 조금은 추수려놓아야 할 듯 싶다. 주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는 편, 발리바르를 챙겨본다. - 주체는 발견되거나 발명, 만들어져야 한다. 모순을 자양분으로...그래야 그만큼이라도 세상은 변한다.

 

" 사람들이 데카르트에게서 존재하나고 믿고 있는 그러한 '주체' 개념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율성 혹은 자유는 '예속존재' 혹은 '신민'의 자유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역설이다. 따라서 1789년 이전에, 즉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전에 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민이 주체이후에 오는 것이라면, 이 시민 이전의 주체는 '예속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민은 "[예속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주체 이후에 오는 비-주체이며, 그것의 구성과 승인은 (원칙적으로) 주체의 예속에 종지부를 찍는다." 344-345

 

 

3. 5장을 다시 살펴본다. 작가의 시선으로...

 

4. 벚꽃이 만개했다. 아니 모든 꽃들이 한몫에 피어버렸다. 철쭉도 무르춤할 뿐 고개내민 녀석은 벌써 짙은 색을 뿜고 있다. 능수벚꽃을 찾다. 비소식에도 비는 없고 사진에 불쑥 달이 구름사이로 비쳐 걸려있다. 벚꽃숭어리들이 여기저기 끝이 없이 핀다. 내일을 잊은 듯 한껏 부풀려있다.

 

5. 윤여일샘의 상상  002호 원고를 본다. 자신의 지적 탐색과 글쓰기를 되짚으며 쓴 소회가 인상깊다.

 

논문을 쓰며 생각했다. 논문이란 물을 꺼내고 답에 이르는 글쓰기다. 하지만 막상 써보니그 과정은 거꾸로 진행되었다. 내가 먼저 상정해둔 답이 있고, 물음을 그 답에 끼워 맞추게 되었다. 그러면 답할 수 있는 물음만을 꺼내게 된다. 답보다도 본질적일지 모른 답할 수 없는 물음은 자제하게 된다.....때로는 답보다도 물음 쪽이 중요하고 오래 살아남지 않던가. 나는 시대의 과제와 대면하며 답을 찾아나선 학자들을 존경하지만, 과격한 물음을 들이밀어 시대의 정신에 파열을 낸 사상가들도 사랑한다.....기워놓은 문장들은 논문을 들고 흔들면 제각각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말의 시체더미였다. 더욱이 일 년 가까이는 논문 생각이었는데 끝내놓고 돌아보니 어느 문장 하나 내 삶과 닿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답은 없었다. 하지만 방향은 어렴풋이 알았다. 이론으로 무장하거나 답을 향해 체계적으로 짜인 글 이전에 자신의 물음을 속이지 않는 글. 답을 내야한다는 조바심이 물음을 향한 절실함을 내리누르지 않는 글. 지식의 언어로 구축된 세계와 피부감각의 세계 사이를 가로지르는 단층을 주시하는 글. 사고의 힘이 부족해 비약을 거듭하고는 섣부른 결론에 내맡기는 게 아니라 결론에 이르지 못할지언정 능력이 닿는 데까지 사고의 절차를 구체화하는 글. 방향은 얼추 정해졌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 동아시아 담론이 동아시화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원리성을 발굴해내는 동시에 그것이 타자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가다듬어야 한다. 다시 말해 보편성의 층위, 번역의 지평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게 번역의 가치를 지닌 사상이라면, 그것이 출현한 사회에서 쓰임새를 가질 뿐 아니라 다른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야 없겠지만 다른 사회를 해석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번역의 노력과 시련 속에서야 한국 동아시아 담론은 내수용 담론에서 벗어나 동아시아화될 수 있을 것이다.”

 

6. 개인의 일상과 글쓰기에 대한 녹아있는 이력을 탐하고 기록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편집자로서 등등 정해진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과 관점을 교차시키면서 독해하는 그의 모습이 다시 읽힌다. 그런면에서 역사가 묻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발굴할 수 있으며 유산화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지금여기는 늘 '미분적 잠재성'이기도 하다. 읽다가 서동진교수의 두 제곱의 사유가 겹친다. 정치와 경제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면서 닿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고, 결과물을 내야하고 결과물을 쫓는 일상과 과업들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놓쳐서 정작 똑 같은 대답만 너저분하게 있는 것은 아닐까? 화두라는 것은 그런 면에서 객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란 주관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주객관의 이중적 시선, 방법으로서의 OO, 생각을 캐는 광부 모두 막장에서 다른 사유와 삶을 캐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7. 어쩌면 우리는 전체를 보려는 시도를 외면하고, 짧은 시간에 사로잡혀 늘 단편적인 진리만 쫓는 것은 아닐까? 진리는 살지 않고 늘 도망다니듯이 피해가는 것은 아닐까? 전체를 보려는 작은 시도와 노력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늘 부분만 되돌이표처럼 사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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