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정치에 관한 저작도 아니려니와 더욱이 노동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업게 관한 책이다.“

 

자본이 존속하려면 그러한 노동권은 제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이 적용된 이차적이거나 하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의 권리에 구체적인 낯을 부여한다. 노동의 자기 영유,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인간 시민이야말로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 시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의 하위 집합이 아니라 거꾸로 인권과 시민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노동권을 제거하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인간도 제거하는 것이 된다. 그럼 인권/시민권과 노동권의 모순이라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 해결책은 오늘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노동이 아니라 소유라는 관념을 변형하는 것이다. 개인적 소유를 사적 소유로 전화시킴으로써, 노동권은 권리의 기초로서의 노동을 제거하면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자본은 인권과 시민권을 부정하지 않고서도 노동을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110

 

 

정치의 윤리란 부정 혹은 투쟁을 주체화하는 것이 곧 부정/투쟁의 대상을 규정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정치의 윤리화라고 말할 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정치의 도덕화라고 불러야 옳다고 본다. 정치를 도덕화한다는 것은 정치를 도덕적인 규범의 문제로 환원하고,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계에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것인가로 묻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즉 그것은 세계 없는 주체의 자폐적 반성을 가리킬 뿐이다. 209

 

우리는 파국의 시학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 사상적 문제로서의 세월호, 주관적 문제로서의 세월호라는 판단에서 벗어나 주관적이면서도 동시에객관적 문제로서의 세월호라는 문제에 이르러야 한다. 210

 

우리는 금융 위기 이후 세계를 뒤덮은 자본주의적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말 그대로 재현불가능한 숭고처럼 바라보는 듯하다. 그것이 주체화되기 어려운 한계를 가리키는 양 말이다. 반면 우리는 재난, 참사, 외상적 위기를 겪게 하는 사태들에 매혹당하고 열중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이 겪은 분노와 우울, 고통을 호소한다. 마치 모두가 현상학자인 것처럼 나에게 나타나는 바 대로의 세계 너머의 세계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아니 앞서 말한 대로 매개할 것인가. 그리고 자유의 대가로서 세계의 무의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세계의 원인을 확정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유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그것은 영어에서 원인(cause)을 가리키는 낱말의 또 다른 말뜻인 대의(cause)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하는 것이지 않을 수 없다. 계급투쟁은 계급 간의 투쟁이 아니라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이란 말을 따른다면, 다시 말해 새로운 대립의 배치를 만들어냄으로써 세계를 존재적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주관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쫓자면, 우리는 세월호 사태란 없다고 기꺼이 말해야 한다. 215

 

르포르타주와 같은 장르는 더 이상 위선적인 세계가 은폐하고 있던 거짓의 증거로서 불행을 폭로하지 않는다. 폭로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그다음에 일어나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폭로를 통해 깨닫게 된 세계를 향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 토론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체하는 언론 역시 불행을 폭로하는 일에 분주하다. 그리고 그를 듣고 읽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마치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불행을 기다리며 연민을 준비하다. 이는 피해자는 있었지만 투사는 없는 세계가 보여주는 도착적인 초상일 것이다.어쩌면 이는 윤리적인 허무주의가 취할 수 있는 극단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불어 이는 정치적 노선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나타난다. 좌파나 우파나 모두 불행이라는 세상의 기후를 즐긴다. 218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체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던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세계를 모순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227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229

 

볕뉘. 다시 살펴본다. 또 다시 다음 줄거리가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되살핀다. 저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논리의 뿌리를 살펴보려 한다. 세월호 사태는 기꺼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고 제목을 적으려다 무르춤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자본론의 시작부터 다시 틀을 사ㅗ하고 정치와 국가, 경제를 다시 소환해서 이어붙여야 하는 작업외 추체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지경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도, 현실에서 구할 수밖에 없음을, 답도 그러하다는 것을 빨리 눈치차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울을 늪을 벗어나려면 정신차리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만들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시...그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고와 퇴행은 그만해도 족하다. 숨은 의표를 살피는 작업이 더 예민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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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의 우물을 서성이다.
    from 木筆 2015-04-16 11:35 
    '글의 우물' - 난 그곳에서 노오란 민들레와 함께 서성인다. 서성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래도 냉정과 이성을 되찾고 싶기도 했다. 서성이면 서성일수록 우울과 낙담과 절망은 남의 것이 아니었다. 평을 해내는 것보다 직면하기가 더 어렵고 곤란하다는 사실만이 곧추 나를 쳐다본다. 글의 우물에 꽃잎이 서린다. 우박처럼 내렸다. 동심원처럼 퍼지는 것은 무엇일까. 객관과 이성이 없는 나는 마음을 쳐다본다. 어쩔 줄 모를 수밖에....소장학자의 마음이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