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아픈성찰(3) (과학)

1.

과학은 진리다. 과학은 중립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 내면엔 이렇게 신념화되어있다. 법하고 다르며, 정치하고 다르다고, 경제하고 다르다고 한다. 신화에 가깝게 세뇌되어있다. 지독한 성장만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겐 더욱 더. 하지만 과학사를 보면 성공의 역사가 아니라 실수와 실책의 역사이다. 온갖 실수-실패가 역사를 바꾸어놓았고, 진리라고 여긴 것이 어김없이 진리가 되지 않았다. 사고의 범주 안에서만 진리였다. 그런데 거꾸로 왜 자꾸 그런 실패 덩어리를 가치중립적이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산업과 생산만 품에 넣은 과학은 일정정도만 진리였다. 그것이 태생적 결점을 갖고 있음에도 교조화되고 그릇된 믿음은 지나치게 분야별로 자가발전하게 되었다. 분야와 분야가 섞이는 부분의 위험, 증명이 되지 않은 진리는 여전히 보유한 채로 말이다.  이런 일차적 과학화는 그 토대인 이론, 방법, 기초, 응용적인 측면에서 검토되지 않았다.

이렇게 그 과정에서 감내된 위험은 자신의 우물을 깊게 파면 팔수록 타분야의 자장에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 회의주의, 실수와 위험의 증폭. 성찰적 과학화가 필요하다.  신화의 뿌리가 어디에서부터 연유했는지? 그 뿌리가 사회 구성적 자양분을 흡수할 때만, 사회적 의제를 함유한 방법, 접근법, 지향에 대한 고민이 뿌리깊이 공유되어야만 인간다워질 수 있고, 새로운 출발과 연구분야가 생겨나게 된다.

증명이 되지 않을 때까지 안전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평가되지 않으면 금기지대를 설정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평가되도록 전문가를 경쟁시키는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제서야 과학에 새로운 활동과 영역이 생겨날 수 있다. 일차적 과학화는 너무 비참한 말로를 예견한다. 내분야는 위험하지만 위험저지선 안에 있다는 사고가, 위험한 것이 수평적으로 증폭되면 어이없는 일이 벌어짐에도 지구의 모든 생명을 대상으로 한 투기를 하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과학이 선봉장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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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의구심(2) (미디어)

1.

우리의 사고나 감정을 프로와 객관성의 개념 아래에 두려는 집단적 성향은 통제를 야기한다고 한다. 권위에 복종을 하게 되면 명령받는 대로 행동한다고 한다. 평범한 가장으로서 어머니 아버지로 일로만 여기고 묵묵히 할 뿐이다. 노예제와 독재체제 아래서 대부분의 사장이나 노예주들은 잘 대해주고 인정많고 친철하다. 그냥 살아갈 뿐이고 살아낼 뿐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내는 것 자체가 파괴와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다. 노예제나 독재의 골격에 대해 생각한다는 일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두려움과 고통이 따른다. 자신을 해하는 것 외에 할 것이 없다. 잔인함을 머금을 수 밖에 없다. 그 비수를 더 약한자에게 고스란히 넘긴다.

당연한 것에 대한 의구심이 없는 것은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인간/성적인 인간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체제라 생각하게 하고 그러한 생각을 비판할 수 없게 만든다.
개인적, 윤리적, 영적인 믿음들이 소비,자본에서 양분을 받는 [사회의 거름망]에 취약하다.
아이들은 일년에 약 3만개의 광고에 노출된다고 한다. 비비탄이 아니라 스마트 폭탄인 셈이다.


정상상태의 병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디어 역시 단순히 중간매개물질이란 미디엄에서 출발하였다. 왜 만들었는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이런 가치에 대한 논의가 가장 중요하다. 돈에 의해 고용된 대행사인 미디어가 하는 일이란, 주주의 이익인 보호하도록 법적으로 보장된 기업이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이렇게 분열적인 존재가 외치는 자유는 타락이자 문화적 질병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자들의 움직이는 동선, 내면화되어 길들여진 미디어의 출발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10여년간 200여만명을 죽게한 지구온난화로 야기된 자연재해는  전쟁이나 분쟁을 통한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다. 9.11테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2003년 폭염으로 인해 죽어나갔다. 하지만 경제면의 어디에도 자연파괴를 슬퍼하는 기사는 없다. 경제적 손실로 다뤄지지 않는다. 중요하고 파괴력이 큰 이슈보다 사소하고 덜 위협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 미디어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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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의심(1)(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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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형식구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나 사회공간, 권력을 개인적 자아 형성과 연결시키지 않거나 하는 것이 외국이나 우리나라 마찬가지인가보다. [음악이 사회적이다]라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기교만 있고 맥락이 무지하다는 것이 자랑일까? 음악은 순수한 것이라는 것이, 그런 음악적 토양에서, 음악의 발전을 위해 인문학적 연구의 성과를 들여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연주자-작곡가가 연주자와 작곡가로 분화되고, 청중 역시 듣기능력이 퇴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합주곡이 피아노버전으로 바뀌게 되고, 공적인 성격은 연주자의 드러남과 기교를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규모에 있어서도 좀더 커지고 콘서트행사의 방향으로 과정을 겪는다한다. 고전이 만들어지고 이론화,전체화 작업을 통해 바그너처럼 국가=자본=제국을 아우르는 본질주의 음악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다. 궁정과 교회와 연결된 서양음악은 2차대전이후에서나 비서양인 의식이 만들어졌다 한다. 서양음악이 역사적목적론과 클래식위주로 정착된 것이 이런 사회문자적인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음악은 상품화는 되었지만, 여전히 쾌감이나 프라이버시 성격이 잔존되었다고 한다. 서양, 비서양 음악을 넘어 모든 음악은 발전-통제-혁신-리듬간의 조화로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바꾸는데 기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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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2008-03-25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이드와 다니엘 바렌보임이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대담집 '평행와 역설'이란 책 또한 추천합니다

여울 2008-03-25 08:32   좋아요 0 | URL
보관함에 넣어두었습니다. 책욕심이 나네요. ㅎㅎ
 

點심, 봄색이 좋아 담다. 몬드리앙_봄으로 하자. ㅎㅎ. 제비꽃이 벌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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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3-2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몬드리안 봄 맞네요 ^^
저기 산수유처럼 생긴 꽃은 뭘까요. 생강나무??

여울 2008-03-24 16:15   좋아요 0 | URL
산수유 임다. ㅎㅎ. 근접촬영 요 ~. 봄이 정말 멋집니다. 금쪽같은 날,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두서없이 적다.

 계획에 대한 강박증
- 세부일정에도 리듬을 주어야; 해야된다는 생각만...작심삼일만 남고 나머지는 햇살에 바래버리는 반복이라...마음을 얼마나 오래가지고 일정에 강약약 중간약약 강약중약을 주지 못하면 사그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함께 하는 일들이 서로 마음에 배여있는지, 그리고 그 동선을 따라 리듬과 호흡은 있는지? 지나치게 잘해야만 된다는 강박만 앞머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일주일 화 목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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