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의구심(2)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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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고나 감정을 프로와 객관성의 개념 아래에 두려는 집단적 성향은 통제를 야기한다고 한다. 권위에 복종을 하게 되면 명령받는 대로 행동한다고 한다. 평범한 가장으로서 어머니 아버지로 일로만 여기고 묵묵히 할 뿐이다. 노예제와 독재체제 아래서 대부분의 사장이나 노예주들은 잘 대해주고 인정많고 친철하다. 그냥 살아갈 뿐이고 살아낼 뿐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내는 것 자체가 파괴와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다. 노예제나 독재의 골격에 대해 생각한다는 일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두려움과 고통이 따른다. 자신을 해하는 것 외에 할 것이 없다. 잔인함을 머금을 수 밖에 없다. 그 비수를 더 약한자에게 고스란히 넘긴다.
당연한 것에 대한 의구심이 없는 것은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인간/성적인 인간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체제라 생각하게 하고 그러한 생각을 비판할 수 없게 만든다.
개인적, 윤리적, 영적인 믿음들이 소비,자본에서 양분을 받는 [사회의 거름망]에 취약하다.
아이들은 일년에 약 3만개의 광고에 노출된다고 한다. 비비탄이 아니라 스마트 폭탄인 셈이다.
정상상태의 병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디어 역시 단순히 중간매개물질이란 미디엄에서 출발하였다. 왜 만들었는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이런 가치에 대한 논의가 가장 중요하다. 돈에 의해 고용된 대행사인 미디어가 하는 일이란, 주주의 이익인 보호하도록 법적으로 보장된 기업이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이렇게 분열적인 존재가 외치는 자유는 타락이자 문화적 질병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자들의 움직이는 동선, 내면화되어 길들여진 미디어의 출발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10여년간 200여만명을 죽게한 지구온난화로 야기된 자연재해는 전쟁이나 분쟁을 통한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다. 9.11테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2003년 폭염으로 인해 죽어나갔다. 하지만 경제면의 어디에도 자연파괴를 슬퍼하는 기사는 없다. 경제적 손실로 다뤄지지 않는다. 중요하고 파괴력이 큰 이슈보다 사소하고 덜 위협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 미디어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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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에 서서(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311/040020080311.1030110119.html)
"선생님의 첫 제자로 오래오래 기억되고 싶어요."
30대 중반을 넘어서 대학을 졸업하는 나의 '첫 제자'인 그녀들이 수줍게 내 손을 잡고 건넨 인사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홀로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그녀들은 이른바 '고졸 여사원'으로 15년이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힘들게 공부를 했고 진정 영광스러운 졸업장을 받았다. 제자라기에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인생살이에서는 그녀들은 나보다 선배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상업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직했던 직장에서 야무지게 15년을 일했지만, 그녀는 직급도 없이 그저 '왕언니'라는 명칭으로 불린다고 한다. 같은 자격이어도 남자 사원과 달리 여자 사원들에게는 직급도 승진 체계도 없다는 것이다. 신입 사원 시절 그녀에게 교육을 받고 일을 배우던 남자 사원들은 모두 승진해서 그녀보다 높은 직급이 되었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악바리'라는 별명뿐이라고 한다. 그녀는 올 봄 15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자발적인 사직'을 결심하게 될 때까지 그녀가 견뎌야했던 불안과 노심초사를 과연 내가 얼마만큼이나 실감할 수 있을까? "그래도 전 늦게라도 학교도 다니고 이렇게 졸업도 했으니 참 운이 좋아요"라고 씩씩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그녀에 비해 이 사회에서 너무나 '안전한 지대'에 서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난 그녀가 걸어 다니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녀는 언제나 뛰어다녔다. 그렇게 그녀는 아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외롭게 뛰어왔을 것이다. 인생의 절반 동안 그녀를 숨 가쁘게 한 것은 학력 차별, 여성 차별로 뒤얽힌 바로 이 사회이다. 온갖 차별의 장벽 속에서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숨 가쁘게 뛰어가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유행병처럼 회자되는 '경쟁력 있는 삶'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안전지대 바깥에서 죽도록 뛰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들의 생존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죽음'의 차원에서이다.
한국은 학력 차별, 성 차별, 인종 차별, 지역 차별, 계급 차별, 비정규직 차별 등 온갖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아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변화되기도 힘들다. 경제성장 수치를 몇 퍼센트 높인다고 해서 이러한 차별에 따른 경제 불안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단지 '믿음'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차별적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방법이 '자유냐 평등이냐'는 식의 오래된 양자택일적 선택지에 의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자유와 평등이라는 대립적인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협소한 문제로 전도시키는 담론 구조가 더욱 문제적이다. 또한 이러한 담론 구조를 확산시키는 데 미디어가 한 몫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새로운 정부의 등장이라는 시기적 특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요즈음의 미디어는 주로 '안전지대'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나가고 있다. 총선 공천자 명단과 새 정부의 경제정책 등등의 기사에 미디어가 집중되어 있는 사이에 정치적 소수자의 목소리들은 담론 공간에서 급격하게 위축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일례로 대학의 시간강사에게 교원의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고등교육법안 개정은 이번 국회 회기를 넘길 전망이지만 이와 관련된 기사마저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 '시간강사'를 하던 40대 여성이 미국에서 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역시 시간강사(비정규직 교수)로서 그녀의 생존에는 무관심했던 언론들도 그녀의 '죽음'에는 '민감한' 관심을 표명했다.
한국이 온갖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라는 말은, 이 사회에 안전지대가 턱없이 좁다는 뜻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터무니없이 좁은 안전지대에 들어서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지만, 안전지대의 경계는 너무나 배타적이다. 게다가 안전지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안전지대를 넓히는 것이, 자기 땅을 빼앗기는 일이라고 엄살을 부린다. 사회의 안전지대를 넓히는 것은 결코 '자유와 평등'이라는 진부한 이분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존재의 생존의 문제이다. 이제 한국 사회의 목표는 생존이 아닌, 삶의 질이나 선진화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생존을 보장해달라고 절규하고 있는 시점에서, '삶의 질'이란 안전지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안전지대에 선 사람의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지만, 오늘, 그녀들의 안전한 내일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싶다. (내외님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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