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증에 시달리는 일터들과 이 정권의 습속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 대한 훈련이 미숙한 상태에서 길러지는 리더들의 습속은 만들어진다. 비열하거나 잔인하면서 성과에 대한 집착이 동시에 함유되는데, 힘이 집중되거나 비대해지고 비판이나 다른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려는 경도되거나,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유리함으로 쏠리거나, 과도한 비유맞춤은 정도를 넘어서게 된다. 동일한 선상에 정반대의 의향이 반복되고 조울되며, 끊임없는 협박을 배경음으로 깔고 있다. 이러한 점은 아무래도 지금 일터분위기에서 길러지는 것 같다. 특히 지금까지 몸담고 있는 일터의 면면을 볼 때 사회성의 빈약함과 제한된 동선안의 움직임은 배려-경쟁-성과-칭찬-열정-휴식- -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은 여기에 덧보태어 분열적 증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존재위기감과 결과물로 끌고가야한다는 강박은, 성원들을 좀 더 다른 열정을 갖게하거나 아이디어를 짜내는 쪽으로 몰아내지만, 결국 조직 효율은 이 분열증과 맞물려 하향할 수 밖에 없는가 싶다.
아무래도 1930년 세계대공황에 필적하는 작금의 상황은 이 분열증에 한층 갑옷으로 무장하는 리더(완장)들을 길러낼 듯하다. 이런 분열증은 필연적으로 여성적인 성향들(배려-칭찬-여가--)을 제 몸에 잘라내고 남성적인 독선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 훈육의 촛점은 강자-약자, 선-악의 이분도식을 가져갈 확율은 크다. 분위기는 가라앉고, 파쇼적인 분위기는 강박적으로 옥죄는 습속으로 몰고간다. 분열증이 내재화되고, 더 더욱 아픔이나 슬픔에 무뎌지고(무뎌지지 않으면 병난다. 필히.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또 다른 보증수표다.) 무뎌진 일상은 더 잔인해지고 비열해지는 문화를 낳는다. 한지붕에 두가지 다른 방향성의 동거는 상황의 변화와 지난 10여년전 학습효과로 더욱 유연한 폭력을 구사할 줄 알게 된다.
이런 류의 패턴은 듣고싶은 보고싶은 것만 느끼고 싶은 이 정부의 습속과 맞닿아 있다. 청년실업을 줄인다는 명분으로 인턴 수백명씩 연구기관에 할당하고, 연구원이 이에 묘수를 쓴다는 것이 일터에 자리 잡고 있는 협력사의 인원을 잘라내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얼마나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리며 해외토픽감인 기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놀라운 능력. 대형마트가 아니라 중할인매장(ssm)으로 구멍가게와 시장의 마지막 단물까지 빨아먹는 저열한 자본의 시스템의 난무. 아, 유치찬란한 자본만 천국인 나라의 현실. 혹 이 정권이 그래도 나라생각은 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나라와 연관되는 일은 관심없고, 아마 측근들과 연줄이 닿는 자본가들을 얼마나 살찌울 수 있는지 하는 관심으로 일관하는 정책들을 보면, 줄도산하고 잘려나가고 지역경제가 죽고말고는 도통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의 백정짓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만의 잔치를 원할 뿐, 그 이상의 기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남을 것인가? 누가 남길 바랄 것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을 할까?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심리적 황폐감이나 절폐감을 커질 것이다. 저들의 머리에서 특단이 나올까? 백주에 도살하고도 오히려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하며, 기본적인 자본의 논리와 효율의 논리조차 없는 저들의 머리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지? 4대강이니 운하 파자고 난리부르스를 떨고 있는 놈들이 외려 통일하면 모든 국면을 비켜가며 출구를 만들 수 있음에도 아무 소리없는 것을 보면 가관은 가관이다.
공황인지? 그 여파가 얼마나 미칠 것인지? 어떻게 해결해야지라는 문제보다, 이 순간 어디가 날라갈테니 이참에 큰 건 해내야할 호기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몽둥이로 패고, 입막고, 집어넣으면 다 될 것이라고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망치기로 작정을 하고 얼마나 더 나쁜 짓만 하려한다는 일관성이라도 있다고 봐주어야 하나?
추운 세파에 덩달아 집산다고 대출금꾸어 집에다, 교육비에다, 생활비에 구직과 해직, 도산의 여파, 없는 손님으로 춥고 시린 나날의 아픔들. 이어지는 신음의 여파. 연료비에 빚을 내야하는 일상에 마음이 미어진다. 따듯한 떡국이라도 서로 나눌 수 있으면 싶다. 이렇게 마음쓰면 그 마음이 전달되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순서로 훈훈한 장치는 없는가? 이땅은 왜 죄다 절벽만 있는 것일까? 점점 더 울타리는 없고, 그 절벽은 점점 높아만 지는 것일까? 왜, 어쩌다가 이렇게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뱀발.
1. 올라오는 서울길이 어렵다. 눈발에 추위까지. 가고 오시는 길. 어렵지만 따듯한 마음, 음식, 위로위안의 말씀들이라도 건넸으면 한다. 잘 견뎌내자고, 잘 만들 씨에 대해 좀더 구체적이고 명민하게 그림을 그려나가자고,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면 삶의 길도 어렴풋이 힌트를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세상을 이렇게 한꺼번에 정확하게 목도하는 세대, 시대인들이 어디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있어본 적이 있을까? 1968이 낭만의 후유증만 낳았다면 지금 세대는 낭만의 후유증도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다보니 가시장미님의 희망이도 세상을 보게 된 듯한데... 미리 축하인사를 ...
2. 현실에서 삶의 결과 연결망이 월담하는 방법은 정녕없는 것일까? 그 파고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정녕 고민의 공동숙고를 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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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다 - 백무산
명절날 친척들 한자리에 둘러앉으니
그곳이 이제 들끓는 국가다
그 가운데 한 명 이상은 사장이고
한명 이상은 극우파이고
한명 이상은 붉은 머리띠를 매어보았고
한명 이상은 고학력 실업자이고
한명 이상은 비정규직이고
한명 이상은 영세상인이고
한명 이상은 조기퇴출당해보았고
한명 이상은 대기업 정규직이고
누구는 파출부를 하면서 극우파이고
누구는 농민이면서 친미파이고
누구는 부동산으로 돈깨나 벌었고 …….
누구든 하나가 세상 푸념 시부렁대면
여지없이 면박이 날아온다 위아래가 치고받는다
누구 없이 망국론이다 전에 두 편만 갈라 다투더니 이젠 전방위다
그러나 그것이 차라리 진보라면 진보다
정치가 이제 밥상머리에 왔다
권력이 이제 문간 들머리에서 쌈질이다
정치가 삶에 들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누가 누구의 전부를 뭉개버리기 어렵게 되었다
정부도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
이건 혼란이 아니라 생존 때문에 욕망 때문에
그간에 내통해온 치정관계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느라 구경꾼들이 광장으로 무대로 올라온 것이다
지금은
이 소란스러움을 견디는 일이 진보다 (에로이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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