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기울기라고 할까요? 하고싶은 것의 다름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관점이 다를 경우, 하고자하는 바가 다를 경우, 하는 일의 속도가 다를 경우 피치못하는 것이 차이죠. 혼자 하는 일이거나 함께 하는 일이거나 그 차이를 줄여가는 일이, 하고자하는 바에 맞춰 한걸음 내딛는 일. 더디기도 하고 힘들기도 합니다. 어찌 해야할지? 해도 해도 천천히 더딘 걸음만 디딜 뿐 쉽지않은 나날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음~. 제가 피하고 싶은 것은 윽박이나 힘에 자발적인 복종, 단기적 결과물 따위입니다. 간접적 폭력의 산물에서 한발짝 떨어지면서 그 결과물을 함께 나눠가고 싶어서 입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시대죠. 차이와 다름을 이야기하는 나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패턴이나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어쩌면 별반 달라질 것이 없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구호와 유행, 패션으로 그칠 확율도 크지요. 어쩌면 무엇이 되기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달라진다는 것, 차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들이 그 되기의 습관화일지도 모릅니다.

??. 이것 역시 힘든 일이죠. 일과 습관화는 벌써 양적으로 질적으로 다르잖아요. 선입견의 벽이 무섭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과 [습관]이 별반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 같네요.

그래요. 어쨌든 이어가봅니다. 관점이 다르면 그 관점 사이로 차이가 보입니다. 그 다름을 눈여겨보거나 고민하게 되면 현실을 훨씬 풍요롭게 볼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삐죽빼죽하거나 뭉클몽클할 겁니다. 그런데 가끔 일상을 돌아보면 섣부른 앎. 힘의 서열. 해내야하는 강박이 합쳐져서 웅덩이의 기울기를 지나치게 가파르게 보고 그 부족한 것을 채워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정보의 독점을 빌미로 시혜하거나 일방적으로 주거나 지시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앎의 주인과 노예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지식. 많이 안다는 것을 핑계로 다른 것까지 누리거나 소유하려는 습관이 배여있는 것은 아닐까요?

!! 푸념을 해봅니다. 돌아보면 늘 그러했으니까요. 제 모습이기도 하구요. 그래요. 조금 다르게 본 것을 가지고, 조금 축적된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그 그물에 걸려있는 다른 사람을 이리저리 휩쓸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요. 이런 짓은 자본이 제일 잘하죠. 이익. 한줌을 이익을 뇌에 넣고, 거기에 알량한 앎과 힘을 가지고 모든 사람의 삶을 조종하는 짓 말입니다. 이야기가 샛길로 접어드는군요.

차이. 다름. 앎의 축적. 그로 인한 기울기. 앎으로 조종되는 것 말고 삶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해보죠. 앎과 삶. 부등호를 어디에 쳐야죠. 앎. 삶. 삶쪽으로 부등호를 넣어보겠습니다. 삶이 훨씬 풍요롭고 다기하죠. 삶을 사람으로 대신 넣어볼까요. 앎보다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죠. 머리속의 앎보다 삶으로 겪어내는 사람은 앎가지고 재단을 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죠. 느낌도 아픔도 슬픔도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요. 터무니없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터무니없이 저질렀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려 합니다. 차이도 보이고 관점도 생기고, 다양성도 존중한다고 합시다. 그 사이에 불쑥 생겨나 새로운 앎들이 돌아다닌다고 합시다. 그 앎으로 사람을 이리저리 몰리게 하고 몰아갈 수 있겠죠. 그래야만 한다거나 하면된다 하자거나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몸의 현수막을 걸고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잘 생각해야할 것은 나만 우리만 많이 알고 있을 확율이 큽니다. 대부분 몸에 배인 앎이 아니고 삶이 배인 앎이 아니기때문입니다.

앎의 기울기만 있을 뿐입니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멈춰서는 지점이 아닌가합니다. 그래요. 몸의 기울기. 삶의 기울기. 처지의 기울기. 느낌의 기울기. 다른 기울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이들의 시선. 노약자의 시선들이 머물지 않습니다. 알량한 앎이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진화하기 위해선 좀더 다른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뭔가 다르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하게하는 방법이 서로 아름다울 수 없을까요? 김우창교수님 표현을 빌려 심미적인 방법이라고 합시다. 내가 나-너가 하고 싶은 것을 다른 나-너, 우리가 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다른 나-너의 입에서 우리가 하고싶던 말이 나오게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방법은 없을까요? 그것도 모르냐란, 그러니까 안돼라는  이것만을 제발 알아라는 것 말고 다른 것 말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 말입니다.

##. 시간의 여유로움이 있어야 할까요? 속도를 의식하면서 할 수 있을까요? 다른 것-처지,느낌,건강,여건...-에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할 수 있을까요? 가는 길목에 즈려밟을 꽃송이를 하나, 둘, 셋 손에 닿을 수 있게 나혼자가 아니라 나-너가 할 수 있을까요? 그 배려를 할 수 있을까요? 아장아장 걸을 수 있게. 우리는 할 수 있을까요?

양손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수 있을까요? 다른 것에 예민하고 궁금해할 수 있을까요? 다른 몸짓이나 아픔에 기울기를 낮출 수 있을까요? 그 아픔이 향하고자 하는 그곳의 이쪽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도 나도 모르는 사이. 그녀도 나도 모르는 사이. 그(그녀)도 나-너도 모르는 사이. 선입견의 장벽을 두지말고, 낯설게 하지 말고 이슬에 옷깃젖듯이. 궁금의 먹이 한지에 스며들듯이. 궁금이 앎을 넘어서 다가오도록. 달팽이가 몸을 끄을듯이. 마음보다 몸이 선행하도록. 혼자가 아니라 서로. 서로의 몸으로. 일을 치뤘다가 아니라 기쁨을 공유했다거나 뿌듯했다거나 즐거웠다거나로 진화할 수는 없을까? 다가서는 다가서는 다른 길은, 다른 공간은, 다른 연습을 해볼 수 없는 것일까? 생각고개를 넘는 연습을. 애인이름을 빼곡이 공책에 적듯 그럴 수 없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곽경효   

대합탕을 끓인다
날선 칼을 들이대도 꿈쩍 않던 몸이
한순간 허욕의 불길 앞에 쩍-
제 속을 다 보여준다
단숨에 풀어버리는 몸의 결박
소통이란 저토록 쉬운 것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세상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몸에 집착했으므로
어느 것에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차라리 거짓말 같은 희망을
쾅쾅 내리쳐 부수고 싶었을 뿐
모래알처럼 바스락거리는
불면의 밤이 몇 번
또 슬픔에 매달려 한나절

어느 사이 사막의 바람처럼
더운 체온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갇혀 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서
허공에 날려 보낸다

한 조각의 뼈도 남지 않은 내 속살,
 

뱀발.  2008 대전충남시선 제5집 [그의 본능은 푸른 빛이다] 에서. 나도 너도, 나-너도 너-나도 서투르다. 어쩌면 그렇게 몸의 결박을 풀어버리려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뜨거움인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인가? 슬픔일까? 점점 더 이가 부딪치도록 닫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미 그것을 넘어서는 일일까? 어제 오늘 시선집을 보다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저녁 이발을 하고 산책을 나선다. 배도 바닷내음도 맡아야 할 듯. 오늘은 바닷물이 많이 밀려나가 뻘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더 배들이 다가서는 듯. 움직이는 동선을 길게 드리운다. 문예회관을 지나 갈대밭도 운치를 더해준다. 가고 오는 길.  물미역같은 바다향이 무척이나 짙고 깊다. 그렇게 맡고 작은 고동소리를 담고 하다 근처 조각공원의 조각들을 둘러보다 흠칫한다. 작은 동산같은 조각 다섯이 예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다가 물끄러미 제목을 둘러보니 [**] 이다. 아래낙서.

한낮의 낙서가 겹쳐서 말이다. 그렇게 음미하며 하루를 풀다.  7k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9-02-25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판 없는 컴에 좌절함다. 크헉~ 똑딱선 기적소리~(이건 만리포지...)

여울 2009-02-26 10:14   좋아요 0 | URL
귀여워 들어줄만한 뱃고동소리...ㅎㅎ............ 그림판없는 컴.은 앙꼬없는 **인가 ㅁ. ㅎㅎ. 그래서 흔적도 연습도 없었군요. ㅎㅎ
 

** 세상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것인지? 활자중독도 아니고 도통 온몸으로 말해도 믿지를 않는군요. 어디어디 기획서나 활자로 된 것이나, 활자로된 개념으로 시작한 유행만 믿을 뿐, 도처에 문자중독의 연원은 어디일까요? 주부들의 언어와 아이들의 언어는 속도와 이해도 달리합니다. 아이들이 골치아픈 설명을 믿던가요?  그래요. 판단을 내리거나 결정을 내리거나 하는 위치는 그 뿌리에 근본적으로 치열한 아픔이나 고통이나 현실과 하고자하는 차이에 발생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군요. 그 길로 가면 결코 잘 되지 않는다고 설명할 길이 없군요. 그들의 결정의 칼자루에는 보이는 것만 필요할 뿐 보이지 않는 것은 눈을 가리게 만드는군요.

** 우린 르네상스와 중세-고대(부활한 고대가 아니라)에 서열을 매기고 있죠. 르네상스형 인간의 개념을 부각합니다. 그리고 중세가 얼마나 암담했을까라고 르네상스의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를 서열이 아니라 변화에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어떤 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떤 변화가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그 변화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이 방향성에 촛점을 두는 것입니다. 이게좋다 저게좋다라고 근거를 갖다붙이지 않는거죠.

** 그래요. 그 관점. 아니 말을 잘못했군요. 그 방향성을 엄밀하게 음미하는 것입니다. 쿠텐베르크의 인쇄술. 성서를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 종교개혁의 시작. 그 인쇄술의 문자문화와 이전의 필사문화의 경계선. 인쇄보다 조금 먼저 시작한 것은 판화의 복사. 복제개념.

** 시각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청각과 촉각으로 인지하거나 그 영역내에 판단하거나 알 수 있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모두가 인간을 향해 있던 것을 역으로 인간을 저 변두리로 몰아버렸다는 사실은 동어반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동설만 기억할 뿐. 인간이 저 변두리로 쫓겨난 것을 이야기하지 않죠.

** 이런 시선에 관점에 그 놀라운 통찰로 논증. 아니 논증이 아니라 놀라운 수사를 합니다. 스콜라철학의 대화로 이끌어냅니다. 구어와 문어의 간극. 문어가 기승전결의 단 하나의 주제로 묶어던지지만, 그는 하나 하나 구어로 당신의 심장을 투시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인쇄술의 발달은 독서에도 변화를 일으킵니다. 균질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균질하게 합니다. 묵독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각 올인은 그 변화를 부족사회의 모든 균질하지 않은 공간을 변화시킵니다. 과학을 예술과 철학에서 떼어내고, 경제를 떼어내고 획일화의 작업은 비단 짧은 역사가 아닙니다.

** 기억력이 좋으시나요. 집전화번호 마저 외울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요? 찰라처럼 지나치는 모든 것에 당신의 불감은 어떠한가요? 그렇게 떳떳하게 마음에서 감정을 떼어내고, 감각을 떼어내 불감하게 된 연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의 생각을 선형으로 이해하거나 획일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답니다. 그 생각의 시작과 이야기의 뿌리는 여기에서 시작한답니다. 늘 그렇듯이 해설서 읽지 마시고, 평전 읽지 마시고, 원전에서 시작하세요. 늘 원전이 쉽답니다. 어쩌면 이것도 구어와 문어의 차이일지도 모르지요.

** 만약, 그런 변화의 관점에서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떡하죠. 사람은 인간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수반한 것이 그렇다면, 오감이나 육감, 혹 입체적인 판단이나, 그렇게 잔인하게 생긴 불감증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렇게 깊숙히 파헤치고 들어갔으니 아마 그점때문에 고민의 길을 내었는지도 모릅니다. 역사책들은 그것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데, 음 주변은 그 이야기를 해주네요. 괜히 횡재한 느낌이네요. 세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왜 그런지도 어슴프레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 이분법의 연원이 어디일까요? 삼차원의 인식과 이차원의 인식의 우열이 있을까요? 삼차원이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구요? 그래요 볼 수 있을뿐일지 몰라요! 볼 수 있을뿐 느낄 줄을 모르죠. 이차원이 하등이라구요. 이차원에서 공간이 균질하지 않습니다. 3차원은 균질하여 모두가 똑같다라고 하여 볼 수 있지만, 이차원은 모든 공간이 다릅니다. 그 공간과 공간 사이를 사유하고 잇고 늘리고 서로의 관계에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사회가 문자가 없는 원시부족사회가 미련하다구요. 비논리적이라구요. 어쩌면 철저히 논리적이고 총체적인식 접근해있습니다. 미래를 장미빛으로 여기는 섣부른 논리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현실을 타개하려는 면에서 적확하고 서로의 간극을 인정하지 않을정도로 함께봅니다. 과거와 지금을 말입니다.

** 조금 진도가 더 나갔네요. 개인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다른 무엇을 생각하기에 그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과 근거는 현란할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절반의 강독으로 어줍잖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저에겐 이것만으로도 충격입니다. 홀로주체나 그 서양철학의 나르시시즘의 출발점에도 관심있는 분이라면 한번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손해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알라디너의 흔적이 전혀없어 이렇게 강추해봅니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댓글(0)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만약
    from 木筆 2009-03-13 16:03 
    맥루한이 니클라스 루만과 만났다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해집니다.(만났나요???) 그리고 극찬을 마다않는 토크빌과 만났다면 이 세상을 나누며 무어라고 했을까? 물구나무선 사유를 하게 만들거나, 그 변화의 무한증식구조(이분법)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활자인간으로 변화가 가져오는 심리학과 정치학의 구조에 예민했던 토크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전복적인 사고치고는 무척이나 구체적이어서(제가 중세와 르네상스를 너무나 기계적으로 알고 있던 것은
 
 
 

 
  
 

 


 



식구들이 하룻밤 묵고 간다. 봄비때문인지 떠들썩한 한밤이 지나고, 멀리 진도를 돌아보고 보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책의 행간에 그 마음이 언뜻언뜻 지워지지 않고 녹아있다 싶다. 

그러고보니 낙서도 횡하다. 대전 노은동같다는 녀석들의 말, 휘황하게 피어오르는 야간 조명과 바다, 섬의 변주... ... 기차로 보내고 나니 마음 끝이 허하다. 책장들도 손에 그다지 잡히지 않아 일찍 돌아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9-02-2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구들이 머물다가 떠난 자리의 쓸쓸함을 어떻게 달래셨나요.
떨어져 계신 동안 가족에 대한 정이 더 각별해지고 있겠어요..

여울 2009-02-24 08:57   좋아요 0 | URL
네, 그러네요. 더 자주 보는 것 같은데도 마음이 그러네요. 바닷내음, 배, 섬...그나마 마음달랠 꺼리들이 많아 다행이네요. 그렇게 마음붙이며 달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