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속이 형성되는 방식의 차이
- 독일문화에는 형과 동생, 나이 차에 따른 대우의 구별이 없다. 그 다음에는 안돼라고 잘라 말한 후 그 원칙을 끝까지 지키는 단호함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그 처분을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정당화하는 절차가 있다. "왜냐하면 한 좌석에 동시에 두 사람이 앉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어린 시절부터 습속이 수평적, 원칙적, 합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방식은 정감적이다. "네가 형이니까 양보해라." 당연히 형은 양보를 안 하려 할 테고, 억지로 자리를 빼앗아 동생을 앉혔다가는 이번엔 큰 애가 떼를 쓰기 시작한다. 결국 싸움은 누가 더 시끄럽게 떼를 써서 부모를 괴롭히느냐에 따라 결판이 나게 된다.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극의 양을 남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극대화하라' 성인들이 사회적 갈등을 푸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52
시험문제 하나라도 틀리면 세상이 무너질 듯 난리를 쳐도 제 아이가 공공이 규칙을 깨는 데서는 아무 문제도 못 느낀다. 부모들은 제 아이가 사회에 나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나 홀로 규칙을 초월하여 '떵떵거리기'를 바란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외려 '융통성 없는 것'(혹은 무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른이 따로 있나, 이렇게 사회로 나간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한국의 어른이 된다. 154 유전무죄를 운운하는 자신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을 드러낸다. '어떻게 하면 서로 편하게 더불어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남들의 위에 서느냐'이다. 154
'평수'로 차별하고, '임대'와 '일반으로 차별하는 버릇은 부모에게서 배운 걸 게다. 높은 벽을 쌓아놓고 임대아파트 아이들에게 학교까지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드는 어른들.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오지 못하도록 제 아이의 학교를 특수학교로 만들어달라고 청원하는 어른들. 부모부터 이 지경인데, 아이들만 다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어른들은 아이만큼 유치하고, 아이들은 어른들만큼 노회하다. 157 - 독일 둥글게 둥글게 셋이라고 외쳤는데, 네 아이가 모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모두 다 친구인데, 누구를 떨어뜨려요?" 156
공포는 판단을 마비시킨다. 말도 못하는 아기들에게 원어민 선생 데려다가 영어를 가르치고, 이제 겨우 두세 살 먹은 아기들에게 철학 수업을 받게 하는 '광기'는 공포에서 나온다. 공포는 인간을 잔혹하게 만든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에게 하루 종일 과외공부를 시키거나, 영어 발음을 좋게 한다고 아이의 부리를 잘라내는 '잔혹극'도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거에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한 거이 '전쟁'의 공포였다면, 오늘날 한국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장'의 공포다 181
원초적 폭력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수'에 속해야 한다. 무슨 일에서든 유난히 '쏠림' 현상이 심한 것은 실은 고립되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다. 다수 속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소수 속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사회에서 혁신과 창안을 위한 용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낡은 습관에 따라 행해진다. 이렇게 공포는 습관을 낳고, 이 두 가지가 짝을 이루어 한국인의 보수성을 구성한다. 182
인문학의 위긴 구체적으로 '이미' 영상문화에 속하는 학생과 '아직' 문자문화에 있는 교수 사이의 세대 차이로 나타난다. 그림에 익숙한 학생들은 더 이상 선생의 문어체적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익숙한 선생들은 학생들의 영상적 신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2차 영상성의 문화가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이라고 할 때, 학생과 선생 모두 어느 한쪽만을 갖고 있어 서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의 뇌는 '진보'가 덜 됐고, 선생의 몸은 '진화'가 덜 됐다.
학생들에게 낡은 교양을 주입할 생각을 하지 전에 인문학부터 먼저 과거의 문자문화 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술문화에는 '구체성', 영상문화에는 '직관성'의 장점이 있다. 인문학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낯선 이 두 요소를 흡수해야 한다.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문장강화'의 낡은 모범을 제시하는 것은 윈도우 사용자에게 도스를 가르치는 꼴이다. 활자 텍스트는 완결된 '작품'으로 주어져 독자의 '상찬'을 요구한다. 하지만 전자 텍스트는 반제품으로 주어져 복제되고 가공될 것을 기대한다. 이런 시대에 미문을 고집하는 것은 20세기에 고대를 전범으로 삼던 고전주의를 추종하는 골이다. 21세기의 글쓰기는 예술적 글쓰기가 아니라 기술적 글쓰기. 214
딸이 공부를 한다면 컴퓨터에 여덟 개나 열어놓았단다. 한 가지에만 집중하라고 했더니, 딸이 정색을 하면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라고 묻더란다. 채팅 창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인터넷 창으로 자료를 검색하고, 그렇게 찾은 자료는 한글 창에 띄워놓고, 이 모든 활동에 배경을 깔기 위해 열어놓은 미디어플레이어, 공부하다 지친 몸을 기다리는 게임 참. 그 모든 창문이 이유없이 열려 있었던 게 아니었다. 하긴 우리 부모 세대로 라디오 별밤을 들으며 시험공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엇다. 말문이 막힌 그는 결국 구시대적으로 윽박을 지르고 말았다고 한다. "아빠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 것이지. 웬 말이 그리 많아?"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던 그가 딸 앞에서 보수성을 드러내놓고 매우 민망해했다. 그에게 이렇게 대꾸했주었다. "그런데요. 그건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문제예요." 219
비행기술을 익히려면 주의력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한다. 개인이란 말은 in+dividual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라는 뜻이지만, 컴퓨터의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을 때, 전통적인 의미의 '개인'은 해체된다. 주의력을 분산시킨다고 집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비행을 하는 데에는 고도의 집중이 요구된다. 물론 그것은 어느 한 가지에 깊이 침잠하는 그런 종류의 집중이 아니라, 분산된 주의력을 총괄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집중력일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려면 오감을 종합하는 '통각'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듯이, 분산된 주의력을 위에서 다시 종합해주는 상위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개인이 근대인의 조건이라면, 분열자는 탈근대적 인간의 조건이다. '조건'이란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을 뜻한다. 현대인은 어차피 분열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220-221
미래의 신체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역사적 지층들을 드러내어 그 결합 양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마치 지층 속에 지질학적 변동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처럼 인간의 신체에도 그것이 겪어온 역사적 변화의 흔적이 중첨되어 있다. 어차피 근대, 전근대, 탈근대으 공존이 어느 정도 보편적 현상이라면, 문제는 세 개의 지층에서 어느 요소를 선택하여 그것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결합하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인의 신체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해 보여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몸이다. 다만 그 신체는 급조된 근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고통 받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286
모든 시대에는 보존해야 할 고유의 역사적 성취가 있다. 전근대적인 문화라 해서 모두 척결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서구에도 귀족문화는 근대적 형태로 변용되어 시민사회에 받아들여졌다. 그 모든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양반문화에는 인간적 가치, 인문적 교양, 귀족적 명예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은 양반문화의 이 역사적 성치는 내버리고, 척결해야 할 신분제 의식을 계승했다. 한국의 천민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한국의 근대화는 일면적이었다. 신체를 기계화하는 '군대화' 과정 속에서 근대의 또 다른 프로젝트가 무시된 것이다. 한국에서 존재의 개성화, 정신의 합리화는 미완의 근대화 프로젝트다. 또 산업화 과정에 수반된 무차별한 시장주의는 문화적,생태적,인간적 가치들을 간단히 계량화해버렸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황폐함이 비롯된다. 이 살풍경에 분위기를 주려면 가끔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도 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재확인하는 성찰성이 필요하다.
미디어의 급속한 대중화는,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나듯이, 첨단기술에 신화적 의식이 결합된 소프트 파시즘으로 이어졌다. 가상을 실재로 착각하는 이 영상 문맹에서 벗어나려면 영상문화에 문자문화의 성취인 합리성, 성찰성을 도입해야 한다. 또 디지철 시대는 한국 사회에 첨단의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새로운 대중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들은 소비대중의 성격이 강해 설계와 디자인과 프로그래밍의 도구를 주로 오락에 사용하고 있다. 290
습속만큼 보수적인 것도 없다. 이 사회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박정희 향수는 산업사회의 낡은 전사적 신체가 부르는 망향가다. 하지만 생산이 물질성을 잃고 노동이 정신화하는 21세기에 요구디는 것은 속도전의 전투적 신체가 아니다. 기술적 상상력을 갖춘 미학적 신체다. 중세의 전사가 근대의 신사로 거듭났듯이, 지금 막 열린 디지털 시대는 과거의 전사형 인간들에게 예술가형 인간들로 다시 태어날 것을 요구한다. 291
브라질에서 축구를 놀이로 가르친다고 들었다. 반면 성적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어려서부터 이기는 기술을 가르친다. 이로써 놀이는 전쟁이 된다. 한국에서는 공부도 그런 식이다. 아이들은 공ㅂ를 놀이가 아니라 전쟁으로 치른다. 무한 경쟁은 아이들을 놀 줄 모르는 전사들로 만들고, 명령에 복종하는 기계적 신체에 창의성이 있을 리 없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 실력이 아니듯이, 시험지 위의 문제를 푸는 능력이 현실 속의 문제 해결 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이들은 신화를 좋아하는 법. 월드컵만 열리면 전국이 광란의 도가니가 되나, 정작 k리그 경기장은 텅텅비어 잇다. 4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켜 '신화'를 창조하려 할 분, 그 신화를 일상으로 바꿔놓는 합리적 방안에 대한 관심은 없다. 비합리적 사고는 비현실적 기대를 낳는 법. 현실의 실력과 비현실적인 기대 사이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선수들에게는 '정신력'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부담감을 요구하고, 감독에게는 '카리스마'라는 이름의 마술적 리더십을 기대하게 된다. 4강은 일상이 아니라 신화다. 신화와 기적의 창조는 무엇보다도 엘리트를 뽑는 문제요. 지도자를 따르는 문제가 된다.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위대한 지도자와 몇몇 엘리트 기업이 자신을 먹여살려준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292
산업사회의 인간이 주어진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충실한 '신민 subject'에 머물렀다면, 정보사회의 인간은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 자신의 꿈을 앞으로 pro 던져 ject 실현하는 '기획 project'자가 될 것이다.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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