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습속과 변화에 대한 전망

 

 압축성의 기로. 우리의 신체. 아니 몸의 각인. 전근대-근대-탈근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가 오히려 문제라는 말. 식민성과 천민성, 놀라울 정도로 청각과 촉각의 언저리에 남아있는 우리들. 조증과 울증을 번갈아 다니는 우리들의 습속. 합리성의 잣대는 여전히 진보와 보수를 넘어 흐른다. 감성과 카리스마, 승자독식. 각개약진. 휩쓸림은 여전할 것이고. 머리로만 움직이는 자는 망할 것이고, 머리의 진화에만 뿌리박는 자 역시 소멸할 것이고. 가슴과 몸이 더 온도가 높고 빠르면 바뀔 것이고, 그 공명이 합리로 체화될 수 있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진중권님이 논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청각과 촉각의 잔유가 탈근대의 코드와 잘 섞일 수 있음. 하지만 문자문화의 합리성으로 사유하거나 움직이는 몸과 가슴이 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에 공감. 몸에 덕지덕지 붙은 식민성과 천민성을 얼마나 성찰할 수 있는지, 철저히 고립된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실이 그나마 다행. 그 몸과 사유를 얼마나 바꿔낼 수 있는지,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런면에서 시각과 개인으로 섬을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를 넘는 것의 자양분으로 중세의 구술-구체성-오감-오미의 회복 가능성은 지금을 풍부히 해줄 수도 있다는 점. 유럽과 동아시아. 우리는 더욱 더 차이가 있다는 점. 그 차이에 관심. 그 관심이 풍요로울 수 있는 비교가 요구됨. 

관조의 시각적 편향이 다초점과 이차원의 생생함이나 구체성으로 내려올 때 성찰이 뿌리내릴 근거가 마련된다는 점. 머리와 가슴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키치. 일회성, 삶 속에서 무용. 몸으로 끌려내려 오거나, 몸을 끌고 갈 수 있는 바뀜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무용. 일상의 회복. 감성에 기반한 더 나은 합리. 카리스마를 동반한 합리의 단초를 공명해내는 것.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는 머리과 가슴의 열정은 내내 가슴앓이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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