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반진리 그리고 삶

[황해문화 가을호]의 권두언과 소설과 만화, 시, 한윤형의 글을 보다. (상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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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도중 이야기를 나누다 [반진리]라는 메모가 생각난다. 그리고 아침 도착한 황해문화를 들고 내려오는 길에 보다나니 생각이 겹친다. 먼댓글을 이어본다. 글 가운데에도 있는 이야기지만 법적남편을 가진 여성이 애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불륜인가? 일부일처의 도식만을 말하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겠는가? 그런데 그 여성이 남편이 폭력을 늘 행사한다던가 불능이라던가 그녀와 맞지 않는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녀는 거짓없이 진리를 살아갈 수 없다. 그녀의 삶은 반진리가 진리보다 더 강력하다. 

진보는 어떨까? 이분구도에 사로잡혀, 진리만을 말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진리를 찾아내서 빼내어 쳐들고 제발 이 진리를 바라보세요라고 구걸하는 것은 아닐까? 진리를 추상화시킬대로 시켜놔서 아무런 잔뿌리조차 현실적응력은 없는 것은 아닐까? 어느 덧 진리행상인으로만 전락하여 현실에서 별반 귀기울려주는 이 조차 부족한 것은 아닐까? 진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왜 우세할 수 없느냐가 문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치부하는 반진리의 결을 찾아내는데 더 예민해져야 한다.  

진리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예술이다. 경험에 의해 끈기있게 발전되는 것이라면, 지금의 진보와 우리는 되돌아볼 점들이 많이 있다. 시선이 어디에 있어야 하고, 몸이 어디에 섞여야 하고, 가슴이 어디에 뜨거워져야 하는지, 마음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말이다. 

그런점에서 1983년생 한윤형의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88만원세대의 결을 세세히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게 그리고 있다. 박정애의 소설도 김해자의 [그때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을까]란 시, 김성희의 [아빠를 위하여] 만화도 아리고 아프다. 

어쩌면 나도 너도 너-나도 사회적 궁핍을 벗어나는 일인 반진리를 아는 일에 궁색하다. 아니면 블랙박스로 만들어버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닌지 한다. 권두언에서도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생각좌파-몸우파인 현실의 간극에서 아무도 진보의 삶을 살아내고 싶지 않고 눈길주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나마 자유주의자의 유용성이 그나마 쿤내나지 않게 하는 지금이지 않나싶다. 그 유용성은 활동하는 공간도 그럴 것이며, 일터도, 삶터도 그러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 않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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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11-12 초급!? 활동가 아카데미_수료?식 흔적들

1. 

* 이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있다면, 그(녀)가 쓰는 표현이나 방점 가운데 많은 것이 들어있다. 아마 그때 첫만남이었고, 그래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더라고 했던 이야기들이 어슴프레 기억의 수면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란 것이 정해진 동선을 돌고 익숙해지다보면 그 틀에서 그 알 안에서 끊임없이 회전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관계도 그 관계를 벗어나 알을 깨뜨리거나 틀을 흔들어주지 않으면 의외로 다른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다. 일상인들이 대부분 어릴적, 대학적 사고로 결빙된 상태로 살아지는 것도 그러하다. 그런면에서 나이라는 것이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어른이만 제조해낼 뿐이다. 

2. 

우리에게 디디고 설 바닥이 있었던가? 우리가 믿고 있던 바닥이 시인의 말처럼 얼음이었다면? 그래도 저수지 가운데 버드나무에 다다랐다고 여겼는데 이미 얼음은 쩍쩍 갈라지고 더 이상 발디딜 것도 없다. 그래 온몸으로 헤엄치는 수밖에 나무라도 붙잡으려면, 갈 곳은 더 선명해졌다. 삶의 강물은 점점 더 불어나 홍수다. 제 한몸이 정신차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더욱 더 우리는 빠른 속도로 떠내려가고 있다. 나무 한그루라도 부여잡고 싶다. 바위틈만 보이더라도 잡고 싶다. 너무도 빨라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다. 세상의 물살은 사람의 사 자에도 안중에 없다. 

3. 

 블랙박스로 남아있는 삶의 철조망을 부수고 들어갈 수 없을까? 그렇게 낱개로 하나하나 가재도구도 살피고 어떻게 집도 짓고, 개간도 할 것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 강물 흘러가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선명한 전선이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더 삶에 착근하는 것이 나의 살림살이가 너의 활동의 아니라 나-너-나..의 살림살이와 활동을 엮고 생각연습해보는 것이,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어쩌면 강물을 달리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르르. 우르르. 강물이 몰리지 않도록 생각의 산을 몇개나 미리넘어 보면 어떨까? 미리미리.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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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수성의 혁명]: 시대로 인해 자신의 글이 빛났다고 한다. 전혀 다른 시대를 만났다면 이상한 개인주의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외삼촌과 형님부근의 감수성에 대한 궁금증은 묘하게 다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고, 나름 많이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이 책으로 인해 조각나 있던 인상들의 흐름들이 생긴다 싶다. 물론 나에 대한 부분도 그러하다. '한글세대'-소설,라디오,영화, 텔레비전,주간지,여성지의 등장과 대중이 생성되는 시기는 서울의 증폭과 맞물려있다. 250만에서 500만이 되는데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 끌어오르는 60년대의 시작은 이 젊은이들에게 김지하와 김수영과 김승옥이 겹친다. 김수영을 거꾸로 올라가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4.19와 김지하와 시대의 상황과 암울은 다른 경로를 걷게 만든다. 신경숙님을 매혹하게 만든 [무진기행], [1964년 10월...]의 단편들이 보고싶다. 그래서 아*** 도서관을 들러 [사상계] 원본을 보려한다. 좀더 색다르게 그 시대와 삼촌의 시대를 느껴보고 싶다. 바짝 건조하고 타들어가는 이념의 앙상한 뼈만 남은 80년대와 많이 다르다. 문사철이 그래도 대학생 10만 이하의 상아탑은 무엇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던 시대다. 꼼지락거리던 마음들과 고민을 만날 수 있다면 조금은 풍부해질 수도 있다는 어리석은 계산이기도 하다. 늘 고전을 강독하지 못한 존재로서 건조함과 부족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나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2. 

성철스님의 백여일 강연록을 녹취 및 학문적 고증을 거쳐 수십년만에 완성한 책이라 한다. 강연을 하고 계신 무애거사님이 강연비를 털어 수강생들에게 배부한 책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피시에 온라인하기에 앞서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는 책이다. 일전 모대표님이 지적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인도를 거쳐온 장소와 시간을 버티어낸 내력의 스케일은 형언할 수 없을 조차이다. 서양학문의 건조증에 비하면 보고있는 광활하다. 이분법에 손쉽게 바래는 학문과 철학의 근거에 대면 삼분을 넘어선 광분이나 기껏 오감의 회복을 바라는 서양학문의 흐름에 비해 세밀하고 광활하다. 역사적맥락 아래서 읽는 것이나 따로 세세히 읽어내는 것이나 흐름을 잡기에 좋다. 진작 볼 수 있었다면 단편적인 조각으로 덜 헛갈려했을 것이다. 좀더 세세히 강독하기로 마음먹는다. 오늘 종강의 기운이나 단편적인 앎에 대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강연 말미를 참관하려 한다. 떨어져 있는 것이 아쉬움이 묻혀나는 것은 이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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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제도 일터손님으로 인해 저녁을 함께 한다. 한 술하는지라 피곤하지만서도. 어려운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원칙과 친화력은 늘 대단하다. 너무 위계에 서열을 매기는 일상이 늘 원점으로 되돌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스쳐 지나간 해를 돌이켜보면 내려다보려는 오만으로 인해, 생동하거나 풍부함을 보지 못하고 알 수 없던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자주든다. 그래서 늘 배울 것은 한두가지가 아닌 듯 넓고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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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방 뜨자(作)
모임과 참여자의 공진화를 향한 발걸음(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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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늘 걸리는 지점이 있다. 연緣의 그늘이 강하다보면 사私적인 것과 공公적인 것의 경계가 희미해져 그 구분을 못한다는 것이다. 내것, 네것, 기획아이디어가 발원된 곳에 대한 배려도 사라져 그것이 어느새 내것이 되어, 우리의 것으로 되고자 한 의도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한다. 소유의 개념이 없다는 것도 별반 좋은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뭉뚱그려 좋은일로 버무려지거나 [하면좋지]가 되어 좀더 세밀하게 구체화될 여유를 잃거나 조금 더 풍성해져 현실에 맛날 기회가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사私적이란 것은 모둠도 모임도 마찬가지다. 우리모임私에 집착해서 공공재로 올라온 안건들도 모임의 사私적 소유로 그쳐,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맥을 끊기게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여러번 느끼는 것이지만 [수면위로 올라오려는 것]에 대한 임신, 알을 품는 노력이 중요한데 반복되는 것을 보니 늘 올라오기만 하면 처리하는 습속만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2. 

그러니 기획도 어느 개인의 것이 되고 나-너의 것이 되지 못한다. 여기에 조급증까지 버무려지니 일인들 제대로 되겠는지 의심스럽다. [수면위로 올라오려는 것]은 대부분 현실적응력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냥 하면되기도 하지만 제대로 하려면 품어야 한다. 의외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시간에 약하고 쫓기는 모습이 비일비재한데, 그 습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별반 달라질 일이 없다. 기껏 비대위나 준비위로 꾸려지는 것에 게으름까지 더해져 또다시 성질급한 몇몇의 기획으로 그치는 것이 비참에 일조한다.

3. 

[수면위로 올라오려는 것]은 서로 눈치를 볼 것 없이 마음으로 채어 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다르게 품을 수 있는가이다. 다른 친구보다 어떻게 다른 관점에서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한번은 데리다처럼 끈질기게 명사 사이를 해부해보는 것도 필요하며, 한번은 집행하는 입장에서, 한번은 한국화를 보는 것처럼 입체감있게 보려는 것도, 또 한번은 원근법의 소실점을 달리해보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한번은 처절히 몸의 기억으로 반추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아주 조금 논의가 제법 생동감이 있고, 미처 볼 수 없었던 다른 시각에서 [수면위로 올라오려는 것]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해보고 아주 조금 출산의 기미가 보일 수 있는 것이다.


4.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퇴행이다. 어쩌면 더 큰 퇴행을 온몸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다익선. 좋은 일은 많으면 좋긴하지만서도 정말 좋기만 한 일인가 의심해보아야 한다. 모임들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교육을 하고 기획을 하곤 하지만, 기획이 왜 필요한가? 기획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교육에만 관심이 몰려있을 뿐, 근저에 있는 물음에 대해선, 어떤 물음을 공유해야하는지 부족해 보이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5. 

[고민]을 좀더 오래, 새롭게 하고 싶다면 [수면위로 올라오려는 것]에 제발 딴지를 걸어야 한다. 그래야만 발의자를 넘어서고 혼자만의 기획을 넘어설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그거좋네]로 받아들이지 말고, 온몸의 기억을 반추해서 다르게 틀어야 한다. 그래서야 비로소 나의 기획을 넘어 겨우 너-나의 기획으로 접어들 수 있다. [고민]을 낚아채지 못한다면 회원당신들도 영원히 대행업소의 대행병에 걸려 아주 작은 고민조차 행동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집행하는 일만, 색깔없는 같은 색의 일만 처리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6.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우리가 왜하는거지? 왜 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도 없고, 그 물음에 대한 공유도 없는 것이 실*자 연대의 시류가 아닌가 한다. 지역 흐름의 모임동선을 보다보면, 겉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크지만. 보태는 것이 보태지 않는 것보다 고민되게 하겠기에.


뱀발. 먼댓글을 이어봅니다. 벌써 한해가 지난 일이군요. 그래도 조금은 달라졌다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나란 우물은 우리의 우물은 여전히 깊고 좁은 것은 아닐까 합니다. 우물밖을 나서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여전히 우물 안을 오르고 있고, 생각도 맴돌고 있다는 의혹이 듭니다. 아니 봉우리를 오르고 있나요. 한틈 쉬어갈까요. 너무 바쁜 듯이 올라왔는지도 모르겠군요. 쉬엄쉬엄 쉬멍오르멍 해야겠네요. 마음은 상하지 마시고, 땀 좀 식히면서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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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30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웃니 미

1. 

뉴욕의 부러울 것이 없는 엘리트들은 일주일에 이삼일 정신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너무도 익숙한 일상이 되어, 자아에 대한 심리상담과 치료를 함께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내기 힘들다 한다. 물론 진료비는 작은 액수가 아니란다. 의사의 스케쥴에 맞춰 휴가도 간단다.

2. 

예술을 하는 사람은 순수해야 한다고 한다. 순수병에 걸린 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왜 예술을 하는지조차 순수하게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순진이 무지몽매를 낳은 것이다.

3. 

텔레비전은 말한다. 국회활동하는 정치인이 순수하지 못하게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소리는 어제 오늘일이 아니지만 정치인이 정치를 하지 말라는 소리인지 순수가 정치를 납치한 것인지 모르겠다.

4. 

원하는 것을 얻고나면 공허해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르고 살아간다. 기껏 원하는 것이 돈이나 사랑이나 로또같은 유행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돈만 사랑만 로또만이기때문에 더욱 문제다. 그렇게 유행만 원하기에 돈도 사랑도 로또도 얻을 수 없다. 쾌락은 부나비처럼 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파내야만 흘러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를 담보잡혀 그들 사이엔 불행하다는 공통점밖엔 없다.

5. 

학문하는 사람은 말한다. 그것은 제 전공이 아니기에 감히 말씀드릴 수 없다고, 아니면 아는 것이 없다고, 겸손인지 겸양인지 무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학문했다는 사실은 기껏 처세나 존재의 근거를 확신시켜줄 뿐 문턱만 넘어서면 모르지가 된다.학교만 넘어서면 그 잔뿌리는 흔적조차 사라진다.

6. 

기초의원도 단체장도 국회의원도 공무원들도 모두 성장해야 한다고 한다. 돈되게 하지 못하면 표떨어지므로 그 문턱을 넘을 수 없다. 표심을 잡고 발전하려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탐해야 한다. 어느새 신파의 딜레마에 빠졌는데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마 그럴 것이다. 상인도 동네도 지역도 더 성장해야 내몫이 많아진다는 행복은 충족될 수 없다. 쓴맛이 얼마나 당신주위를 점거했는지 냉정해지지 않는 이상.

7. 

경제인들은 이야기한다. 돈을 수중에 넣게 된 것은 모두 내가 잘해서 된 것이라고,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아이디어에서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룰을 만든 것은, 그 룰 가운데 하나만 삐걱거렸어도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룰마저 갈아치우자고 한다. 버릇이 없는 것은 그 룰이 아니라 룰도 지키지 않는 파렴치한 근성이다. 그 근성때문에 사회공헌이란 마음이 싹튼다는 것은 어렵다. 마음에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을 의식하기때문이다.

그런데 더 더욱 허탈한 것은 남의 눈이 많아져야 하는데 그 눈은 그 파렴치한의 돈이 마치 제것인냥 부러워만 한다는 것이다.

8. 

사람들은 제 발딛는 곳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책도 읽지 않지만 나쁜 신문은 열독하며, 열마디 가운데 아홉마디를 돈만 이야기하므로 늘 현실이란 문화는 그 모양 그 꼴이다. 아마 열에 아홉은 문화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저 지껄여보는 소리다.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 수수방관자일 뿐이다. 고루하다는 욕을 쳐먹지 않는 이상 뜨끔거리지도 않는다.

9. 

아이를 키우다보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애지중지는 희석이 되기 마련이다. 과잉기대가 너나들이로 바뀌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 따지고 보면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나치게 애지중지했기 때문이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새끼가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한명의 사회인으로 대접을 할 생각이 없고 소유만 하려하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어차피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해보는 연습과 사회인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상, 자식은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과잉투사를 감당할 수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몸을 가지고 있지 부모의 몸과 경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땅의 부모들이 자식의 삶을 대신살려고 아둥바둥거리는 이상.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질 않는다.


10. 

공공연히 부모가 빨리돌아가시길 바라는 놈들을 본다. 공공연히 물려받을 돈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움켜쥐어야 자식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출처나 재산을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런데 더 끔직한 일은 제 처자식은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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