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투사
제도권 안과 인물: 그곳에 해야할 일을 동그랗게 오무려 던지게 되면, 받아 안게된 인물이나 제도는 꼭 정해진 기간안에 해결해야한다는 강박이 여물게 된다. 그런데 솔직히 시간을 깃들여 이해타산을 해보면 이것이 되돌이표처럼 맴돈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인물에 대한 과잉투사는 제도권영역에 가면 그 인물들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스타에 대한 갈증과 비슷해진다. 제도에 대한 굶주림도 이어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제도곁과 제도밖을 어떻게 연결하고 여물게 할 것인지?는 들어갈 수도 없고, 제도안으로 이어지는 잔뿌리를 몽땅 잘라내고 생각하는 버릇에 익숙하다보니, 늘 결과만 가지고, 늘 뒷북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인물이라는 것도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같은 과잉된힘에 대한 친화성이 몸에 배었다면, 언제든지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에 착륙하려 발버둥을 칠 것이다. 몇번 날개짓으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친하고 좋아한다는 취향은 변함없는 것이다. 제도곁과 제도밖, 그리고 제도안의 실뿌리가 견고하다면 과잉된힘 추종자들과 삶을 끌어나가는 사람들은 다르게 뿌리내리고 있는 행위로 구분되어야 한다. 만약 요원한 일이겠지만, 이런 식견들이 자랄 수 있고 생기게 된다면 많은 사람은 욕심과 인물을 구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 속의 과잉투사는 늘 이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와 동선에 대해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쇠사슬로 온몸을 칭칭 묶어, 자신은 마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마냥, 그리고 가르키는 저 인물들과 저 제도가 할 수 있는 것의 사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질려고 해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삶과 그 삶이 뿌리내리고 있는 여기저기에 대한 관심.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하고 있는 틀에 대한 더 진지한 관심. 끊임없이 타성에 절은 일상에 균열을 내고, 너에게 그 마음도 아픔도 나누고 빌려오고 주는 일. 삶의 단순함을 균열내지 못하는 진보를 가장한 친력力성이 지금을 만들어내고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셨는가? 우리란 건물의 저 지하층엔 식민근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힘에 대한 무의식과 갈망이 굽신거리고 있다. 식민백년의 위대성인지도 모른다. 몇년만에 제도권이 인물 몇몇으로 바뀌었으면 바뀌어도 한참 변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물에 대한 과잉투사를 그치고 그것을 노출시킨 비릿한 감싸고 있는 나머지 것에 대한 뼈를 깎아내는 처음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인물은 없는 것이다.라는 것이, 인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기껏 마음의 위안일뿐, 홍수처럼 흘러가는 시류를 거슬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은 아닐까? 더구나 인물들이 제도안에 착상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자본에 포위된 관성의 얼굴에 화장만 곱게 단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현실들이 반복된 것을 보면 사회라는 이름이 붙은 단체를 거치는 것도, 제도밖의 단단한 뿌리를 열외자와 아픈이들에 내리려는 진지함이 관통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힘의 단계도 타산하지 못하거나, 교묘하게 권력과 명예욕이 버무려져, 제도밖의 곁의 단맛만 인물들을 통해 빠져나가 소멸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게 바쁘다는 핑계로 대행을 핑계로 투사한 공모가 만들어낸 현실은 아닐까?
뿌리의 단맛을 안 인물들이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흘러가고, 또 똑같은 군상들의 박수를 받으며 안착할 제도안을 기웃거리고. 또 실망했으므로 다른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거기에 끼워놓으려 발버둥치는 민초들. 3김은 가고 4김은 오고 5노도 오고... 점점 잔인해져가는 세상은 땅에 착근하지 않으려하고 부영양화된 호수처럼 과잉에 뿌리를 내리려한다.
뱀발. 090907 신문기사의 흐름있는 집적을 위한 시스템에 대해 - 사회적 활동에 대한 기사들이 사회적 현황에 대한 전면적인 내용들만 있어, 사고의 분권이나 뿌리들이 자라지 않는다. 대정부가 있다면, 대지식인, 대제도, 대제도밖, 대계층에 대한 이야기들이 달라질 수 있음에도 사안이 벌어지면 늘 한가지에 시선이 머무르고 사라진다. 그래서 이야기는 늘 같다. 대정부나 제도안에 대한 지적만 머무르고 잠재적인 행위에 대해 시선이 늘 분산되지 않고 모인다. 시간만 지나면 잊혀진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나 충고로 가져가지 않는다. 한명의 마녀나 지탄받을 대상만 만들어지고 마음의 위락만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 위락을 얻고나면 울분도 분노도 눈녹듯이 녹고 왜 그랬는지? 왜 분노했는지도 잊혀지고 또 그렇게 분노가 생기면 또 대상에 삿대질만 해대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면에서 때만되면 지식인은 나타난다. 일상으로 뿌리내린 고민은 마치 하면되지 않는 것처럼, 그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달리해보면 어떨까? 인물에 대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