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계약이 국가를 창조한다면 사회적 언약은 사회를 창조한다. 사회적 계약은 권력에 관한, 즉 권력은 정치 영역 안에서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반면 사회적 언약은 서로의 차이를 넘어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사회적 계약은 통치에 관한 것이고 사회적 언약은 공존에 관한 것이다. 사회적 계약이 법과 그 집행에 관련된 것이라면 사회적 언약은 우리가 공유하는 공동의 가치와 관련된 것이다. 사회적 계약은 잠재적인 강제력의 사용과 관련되지만 사회적 언약은 도덕적 합의, 공동의 가치 그리고 공공선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이끈다. 235

계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양쪽 모두가 이득을 얻는 것이다. 반면 언약에서는 양쪽 모두가 서로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234

사회가 우리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다면, 정부는 사악성에 의해 생겨난다. 전자 우리의 감정을 통합하여 행복을 장려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면, 후자는 인간의 악덕을 억제시킴으로써 이를 추구하는 부정적인 기능을 담당한다...어떠한 상태에 있어서든지 사회는 하나의 축복이다. 반면 정부는 가장 훌륭한 상태일 때조차도 하나의 필요악에 지나지 않는다.--페인 [상식] 성서의 주된 관심사는 사회에 있었다. 정의, 연민, 인간 존엄, 복지, 고용인과 피고용인 간의 관계, 부의 동등한 분배, 과부, 고아, 이방인들과 같은 힘없는 자들의 사회적 수용 등의 문제와 관련된 위대한 사상들은 사회적 측면에서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사회계약과 사회적 언약의 차이를 이해하고 표명한 인물이 토마스 페인이다. 227-8

철학은 체계로서의 진리를 가르치며, 성경은 이야기로서의 진리를 가르친다. 철학적 진리가 무시간적인 것이라면 성서적 진리는 시간 안에서 규정된다...이야기하기는 언약의 혁신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248-9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과학과 달리 이야기는 구체적인 것을 강조한다. 이야기는 공간 및 시간의 구체적 배경을 담고 있다. 이들은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과학과 철학에서 그래서는 필연성을 나타내는 신호이지만, 이야기에선 그렇지 않다.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하기가 인간됨의 일부인 이유이다. 이야기는 인간이 느끼는 시간 경험을 재요약한다. 이야기는 기억을 창조하며, 기억은 정체성을 창조한다.250-6

 
뱀발. 

1.
언약을 도덕적 행위로 본다는 한계,

여러 부족들을 어떻게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시킬 것인가란 문제와 다름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인식때문이다. 현재의 영국은 구약성경 시대의 이스라엘이 겪었던 문제의 답이 언약이라는 것이다. 언약은 계층제나 전통의 힘을 빌리지 않고 새롭게 통합된 시민적, 정치적 정체성을 창출한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적인 바탕이다. 

2. 저녁 쪽잠을 자고나니 책이 마음에 걸려 다시본다. 책을 주요부분을 보며 몇번 접을까 했는데 계속 여운이 남는다. 언약이란 추상성도 그랬고, 다문화주의에 대한 나머지에 대한 주문도 그러하여 크게 줄거리에 벗어나지 않아 수긍을 가지만 구체적이지 못해 정독의 필요성까지 있을까 하였다.  성서도 그렇구 더구나 구약에 대한 관심. 몇몇 끌리는 부분이 있어 아마 완독을 하게되지 않을까 한다. 

3. 사회에 대한 관심들, 개인이 아니라 이어진 것에 대한 책읽기가 이어진다. 그 한계. 그리고 다른 관점 역시 숙성되었다기보다는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가 하기도 하는데, 책들의 행간이 이어져 경황이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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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마지막장 발제 시작 전에 도착하다. 20년대 후반 일제시대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9장 삼대에 나오는 진고개, 연애, 포르노그라피, 청춘, 편지 등등 일제시대 일상에 관한 소묘가 덧보태진다. 그 가운데 한 질문과 논의가 눈에 띈다. 우리가 일제시대라는 타이틀을 붙이지만 정작 그 시대를 살아가는 생활인은 어떠했을까? 반일감정이 노골적이었을까? 압제와 수탈과 조금 거리감이 있지 않을까? 

자본의 이식과 더불어 번창하는 것, 지금에서야 일제시대를 반추해서 어떻게 살아냈을까?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시대를 벗어나고자하는 의식을 갖는 사람은 드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그 시대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사진, 희미한 기억들을 접붙이다보면 별반 흥청망청하는 지금과 달라보이지 않는다. 성병이 절반이 걸릴 지경이고 유행병에 여기저기 멋내기 바쁘고, 커피, 차한잔에 기웃거리는 일상이란 오히려 지금의 변화와 풍요에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 더욱 근사할 것이다. 

뒷풀이자리에도 이어지는 얘기지만 '지금'에 대한 감각을 갖는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친일이라는 것이 문화정책을 넘어서고 노골화되고, 이후의 역사적인 자리매김으로 더 강력해진 것이지, 그 시대를 살아내는 지식인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이것도 위험한 발상이지만 열가지 백가지 시선의 하나라고 여겨줘도 괜찮겠다 싶다. 획일화시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삼사십년뒤, 넉넉히 해두고 일제시대 문화정책 국면을 반면삼아 칠십년뒤에 이것저것 역사와 기억을 꿰다보니 친일이 아니라 친자본이라고, 그 시대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제 먹고 살 것만 관심이 있어 얼마나 냉대를 하며 기껏 지식인들이라는 것이, 일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라는 것엔 안중에도 없고 친일이 아니라 친자본을 했던 시대라는 것이 반추된다면, 시대의식이란 것도 없다고 한다면 어떡하겠는가? 숱한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친일보다 더한 친자본을 해서 안위를 보전하려고만 하였다는 평가가 주류라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그 시대 할아버지 할머니는 단란스럽고 골프란 잡기에 빠져서 하루에서 어떻게 하면 돈불릴 생각만 해서 사회에 대한 감수성이 백지에 다다른 암흑기였다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이렇게 도식화하여 말을 한다는 것이 백해한 것이 짝이 없지만, 질문의 행간에 나누고 싶기도 하고, 뒤풀이 자리에서 이십년전의 결빙된 기억을 반추해내는 분도 있어 어줍잖게 말씀을 되받기도 했다. 그리고 몸의 유대에 훨씬 익숙하고 예민한 분들의 삶을 행간으로 유추를 해본다. 그분들의 삶을 자세히 보지 않았고, 세미나 자리에서 논의나 몸짓들로만 한 것이 얼마나 소통에 있어 빈한한지 세삼 느낌이 든다. 많은 분들의 아픔이나 동선에 대한 이해나 앎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 그저 텍스트와 질문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보잘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짓을 늘 해왔는지에 대한 돌이킴도 있던 날이다. 유난히 달은 밝고 달은 맥주잔 안에도, 그(녀)대의 눈에도 당신의 마음에도 맺혀있는 것을 늘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친다는 것이 말이다. 

뱀발.  오늘 하루도 참* 일로 바쁘다. 촬영차 오신분들, 부모님, 교복차림의 고딩. 참* 도색을 위한 이사로 위**이 고생을 하시구 말이다.  

 

뱀꼬리. 정신이 없다. 어제 경제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얘기로 일찍 나서서 올라오기도 했지만, 살림살이에 대해 맹한 개인으로서도 구체적이고 치열한 고민이나 접근이 절실하다고 여긴다. 지난달말 김수행교수님의 자본론 강연에 대한 지역열의, 그 반향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울림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으면, 때를 놓치면 살림살이에 대한 논의의 진척도 지지부진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동시에 솟아오르는 것 같아서이다.치밀하고 치열하고 삶의 대안, 활동의 대한으로서 경제학, 경제에 대한 앎과 공유로 이어지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추진하는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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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펌)[김수행]교수의 '자본론으로 보는 세계경제와 한국경제
    from 木筆 2009-09-06 12:29 
    8월 24일 월요일에 시립미술관에서 김수행교수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던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명강의였습니다. 대전으로 내려오셔서 직접 강의해주신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끼니와 삶 민주주의에 대한 가슴에 와 닿는 질문과 질문을 풀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긴 분량이지만 꼼꼼이 읽어보세요. 저도 참석하지 못해 이렇게 다시보기를 하고 있답니다. 발췌하느라 수고 많았네요. 감사) ----
 
 
밀밭 2009-09-07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말이 더 바쁘씬 여울마당님...정신은 없더라도 건강은 잘 챙기세요.ㅎㅎ

여울 2009-09-07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마워요. 몸이 아니라 맘이 바쁜가봐요. ㅎㅎ
 

과잉투사  


제도권 안과 인물: 그곳에 해야할 일을 동그랗게 오무려 던지게 되면, 받아 안게된 인물이나 제도는 꼭 정해진 기간안에 해결해야한다는 강박이 여물게 된다. 그런데 솔직히 시간을 깃들여 이해타산을 해보면 이것이 되돌이표처럼 맴돈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인물에 대한 과잉투사는 제도권영역에 가면 그 인물들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스타에 대한 갈증과 비슷해진다. 제도에 대한 굶주림도 이어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제도곁과 제도밖을 어떻게 연결하고 여물게 할 것인지?는 들어갈 수도 없고, 제도안으로 이어지는 잔뿌리를 몽땅 잘라내고 생각하는 버릇에 익숙하다보니, 늘 결과만 가지고, 늘 뒷북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인물이라는 것도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같은 과잉된힘에 대한 친화성이 몸에 배었다면, 언제든지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에 착륙하려 발버둥을 칠 것이다. 몇번 날개짓으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친하고 좋아한다는 취향은 변함없는 것이다. 제도곁과 제도밖, 그리고 제도안의 실뿌리가 견고하다면 과잉된힘 추종자들과 삶을 끌어나가는 사람들은 다르게 뿌리내리고 있는 행위로 구분되어야 한다. 만약 요원한 일이겠지만, 이런 식견들이 자랄 수 있고 생기게 된다면 많은 사람은 욕심과 인물을 구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 속의 과잉투사는 늘 이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와 동선에 대해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쇠사슬로 온몸을 칭칭 묶어, 자신은 마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마냥, 그리고 가르키는 저 인물들과 저 제도가 할 수 있는 것의 사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질려고 해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삶과 그 삶이 뿌리내리고 있는 여기저기에 대한 관심.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하고 있는 틀에 대한 더 진지한 관심. 끊임없이 타성에 절은 일상에 균열을 내고, 너에게 그 마음도 아픔도 나누고 빌려오고 주는 일. 삶의 단순함을 균열내지 못하는 진보를 가장한 친력力성이 지금을 만들어내고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셨는가?  우리란 건물의 저 지하층엔 식민근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힘에 대한 무의식과 갈망이 굽신거리고 있다. 식민백년의 위대성인지도 모른다. 몇년만에 제도권이 인물 몇몇으로 바뀌었으면 바뀌어도 한참 변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물에 대한 과잉투사를 그치고 그것을 노출시킨 비릿한 감싸고 있는 나머지 것에 대한 뼈를 깎아내는 처음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인물은 없는 것이다.라는 것이, 인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기껏 마음의 위안일뿐, 홍수처럼 흘러가는 시류를 거슬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은 아닐까? 더구나 인물들이 제도안에 착상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자본에 포위된 관성의 얼굴에 화장만 곱게 단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현실들이 반복된 것을 보면 사회라는 이름이 붙은 단체를 거치는 것도, 제도밖의 단단한 뿌리를 열외자와 아픈이들에 내리려는 진지함이 관통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힘의 단계도 타산하지 못하거나, 교묘하게 권력과 명예욕이 버무려져, 제도밖의 곁의 단맛만 인물들을 통해 빠져나가 소멸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게 바쁘다는 핑계로 대행을 핑계로 투사한 공모가 만들어낸 현실은 아닐까?

뿌리의 단맛을 안 인물들이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흘러가고, 또 똑같은 군상들의 박수를 받으며 안착할 제도안을 기웃거리고. 또 실망했으므로 다른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거기에 끼워놓으려 발버둥치는 민초들. 3김은 가고 4김은 오고 5노도 오고... 점점 잔인해져가는 세상은 땅에 착근하지 않으려하고 부영양화된 호수처럼 과잉에 뿌리를 내리려한다.  


뱀발. 090907 신문기사의 흐름있는 집적을 위한 시스템에 대해 - 사회적 활동에 대한 기사들이 사회적 현황에 대한 전면적인 내용들만 있어, 사고의 분권이나 뿌리들이 자라지 않는다. 대정부가 있다면, 대지식인, 대제도, 대제도밖, 대계층에 대한 이야기들이 달라질 수 있음에도 사안이 벌어지면 늘 한가지에 시선이 머무르고 사라진다. 그래서 이야기는 늘 같다. 대정부나 제도안에 대한 지적만 머무르고 잠재적인 행위에 대해 시선이 늘 분산되지 않고 모인다. 시간만 지나면 잊혀진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나 충고로 가져가지 않는다. 한명의 마녀나 지탄받을 대상만 만들어지고 마음의 위락만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 위락을 얻고나면 울분도 분노도 눈녹듯이 녹고 왜 그랬는지? 왜 분노했는지도 잊혀지고 또 그렇게 분노가 생기면 또 대상에 삿대질만 해대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면에서 때만되면 지식인은 나타난다. 일상으로 뿌리내린 고민은 마치 하면되지 않는 것처럼, 그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달리해보면 어떨까? 인물에 대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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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그머니(클릭)

살그머니, 살포시, 살긋.  정끝별의 [와락]과 다르다. 모임의 시공간에서 늘 부딪는 일 가운데 하나는 서로 내면화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익숙해지다보면 관계를 끌어당기려는 욕심들이 생겨나, 누구때문에로 시작한 발단은 소원해짐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닐까? 관계에 대한 애착. 그 구심력으로 인해 정작 마음나누려 했던 처음의 의도는 저기 변두리로 물러 서있다. 모임의 울타리가 더 넓고 깊고 편안해지길 바라던 그래야 좀더 익숙하고 편하리란 생각들은 자라지 못한다. 울타리의 문은 빗장이 걸려있고, 관계에 대한 사私유는 [때문에]로 증폭된다. 살그머니 다가섰던 사람들, 살그머니 어루만진 사람들, 살그머니 움직인 동선들은 잊혀진다. 

살그머니.. 와락은 처음과 끝을 관통한다. 어느 것 하나 망치려하거나 틀거나 하지 않는다.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의 상태를 느끼는 것처럼 온몸으로 보고 만진다. 살그머니는 없어도 있다. 모임을 하다보면 늘 부사의 주도력은 부족하거나 있더라도 찰라로 머문다. 부사의 감수성과 세심함이 없는 것이 진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살그머니때문에 당신의 존재가 빛날 수 있는데도 아이보채듯 보채기만 한다. 봐달라고 떼를 쓴다. 모임도 활동도 나에 대한 애착이 너무도 강해 늘 그 나르시스란 구심력으로 정작 볼 것을 보지 못한다. 너도, 나-너-나로 이어진 세세한 불쑥불쑥 다가서는 [살그머니]를 보지 못한다. 살그머니 두꺼워지지 못한다. 그저 [머니]에만 눈이 번쩍하는 것은 아닌가. 

 

당신의 오늘 하루도 [살포시나 살긋]한가? 아니면 제발 봐주세요라고 떼를 쓰고 있는 중은 아닌가?   

조심스레 나가려다 보니 와당탕 문턱에 걸렸다. 아이도 깨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잔가지는 꺾이고...늘 내가하는 일이 그렇지..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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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교감은 이와 같이 독자적이고 보편적인 상상력의 창조적인 작용을 함축하고 있는데, 그 작용은 이미지가 상상 가운데 떠오르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시적 교감,-달리 말해 시적 이미지가 느끼게 한 원인, 즉 그것의 과거를 조사할 게 아니라, 상상 가운데서 그것이 목하 창조적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 그 자체를 묘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슐라르의 이미지의 현상학이다. 13

시나 문학작품들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그 최초의 신선한 감동으로 밤하늘에 별들처럼 빛나고 있기 때문에, 독서의 체험도 실생활의 그것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깊게 우리들의 영혼에 자국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공간의 시학]의 독창적인 점은 이미지의 현상학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이미지의 현상학의 이와같은 깊은 정신적인 효과, 달리 말해 우리들의 독서 체험의 영혼적인 깊이를 드러낸 데에 있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14

시의 주된 기능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의 전환'을 잉태하고 있으며 문학은 우리들의 존재를 생성케하는 힘을 그 진정한 차원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15

바슐라르적 인간의 자유는 기실, 우리들 각자가 우연적으로 시공적인 좌표에 내던져져 있는 우리들의 실존에서 우리들을 해방시켜 인류의 보편적인 본질로 나아가게 하는 자유라 할 수 있다.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는 역설같지만 우리들의 삶에 대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정될 수 있을 듯한 상상력, 문학과 예술, 심미적 체험이 기실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여 이끌어 갈 수도 있는 것, 그 본질적인 차원에서 우리들의 삶에 바로 닿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18-9


시적 행위, 그 느닷없이 떠오르는 이미지, 상상력 속에서 존재가 타오르는 그 불꽃. 시적 이미지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밝혀 보기 위해서는 필경 [상상력의 현상학]에 이르러야 한다. - 그것은 시적이미지가 인간의 마음의, 영혼의, 존재의 직접적인 산물 - 그 현행성에서 파악된 - 로서 의식에 떠오를 때, 이미지의 현상을 연구하는 것. 44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차라리 영혼의 현상학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 이미지는 그 단순성 가운데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소박한 의식의 재산일 따름이다. 그 표현에 있어서 그것은 젊은 언어이다. 시인은 그의 이미지들의 새로움으로 하여 언제나 언어의 원천이 된다. 이미지의 현상학이 어떤 것인가를 아주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이미지란 사상에 앞서는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46-7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이와같은 울림에 의해 우리들은 일체의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을 그 즉시 넘어섬으로써, 우리들 내부에 시적인 힘이 소박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울림이 있은 다음에야 우리들은 반향을, 감정적인 반응을, 우리들 자신의 과거가 회상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50-1..시의 독서가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그 이미지가 다음 순간 정녕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뿌리를 내린다. 우리들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인데, 그런데도 마치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창조할 수 있었으리라는, 마치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창조해야 했으리라는 인상에 눈뜨게 된다.

개념적인 언어의 원자상 조직은 고정의 이유와, 중심적인 응축의 힘을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시행은 언제나 움직임을 가지며, 이미지는 시행의 선 속에 살며시 끼어들어 상상력을 이끌고 간다. 그것은 마치 상상력이 신경 섬유를 만들어 늘이는 것과도 같다. 58 

뱀발. 1. 정지한 것이 아니라 벡터에 대한 사유. 삶과 존재는 새롭게 응축될 수 있다. 불꽃, 촛불. 김우창님의 시적 삶과 약간은 겹쳐보이기도 하지만, 상상력에 대해 이렇게 사유의 폭에 걸린다. 우체국직원에서 소르본대 교수. 물리학과 언듯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다른 과로 석사, 그리고 철학박사. 시적 행위에 대해 시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고 어렵게 하는 이야기는 처음인 듯하다. 그래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익숙한 원자, 힘, 신경섬유...라는 비유가 익숙해서 인가? 시적행위와 삶, 존재론까지 들먹거리니 어찌 관심가지 않는가?  

2. 근처 가까운 곳에 오붓한 도서관을 발견해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조용하고 정갈하다. 인기척이 너무 적어 그렇긴 하지만... 가끔 집중이 필요하면 들러야겠다 싶다. 3. 돌아와 달님을 벗삼아 한바퀴 달음질해주다. 벌써 갈치배가 등을 환하게 하구 바다의 한가운데를 점거하고 있다. 8k. 맥주 한모금 생각을 밀어넣다.

 

-베란다 - 서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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