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위한 변명
[이야기] 쳐다보는 것과 만든다는 것의 차이.-동심원이 퍼진다는 것. 동심원이 울려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맞는 것도 괜찮겠지만, 흘러가는 것보다 동심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편하고 즐거울 수 있다. 물론 부담도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기적 출발이 아니라면 마음에 맞는 일들을 뭉쳐 물방울 한점 톡! 던져보는 것이 반향이나 파고, 저 맑은 물가의 되돌이킴이 보일지도 모르니 마음과 일들을 버무려 맑은 엑기스 토옥 던져보는 일도 괜찮을 것 같다. 늘 시즌처럼 선거는 다가오고, 선거가 말로만 장이되고 뭐가되고 하니 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이 되지 않게하는 것인지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도 차일, 차차일을 기약한다면 꼭 해봐야 될 흔적들 일 것이다. 아프면 아플수록 상처는 커지겠지만 제대로 아물면, 그 상처를 기억한다면 되돌아가는 길을 설명하기 전에 아는 수도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090912
[백만원]의 연대가 할 수 있는 활동의 비교.-활동가 기금?마련. 활동가가 꽃피지 않으면 사회도 꽃필 수 없다. 활동가가 즐겁지 않으면 사회도 즐거울 수 없다. 활동가가 사유하지 않으면 사유
할 수 없다. 활동가들이 섞일 수 없다면 모임의 연대는 불가능하다. 활동가들이 품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사회는 아무것도 품을 여력이 없다. 그래서 질문의 화두는 삶도 되고,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이 겹치게 할 수 있는가? 좀더 진중한 고민과 전망의 자리로 섞여야 된다. 면접의 질의응답이 꼼꼼하게 단체를 아우르는 시간과 꿈, 여건들이 점점 논의의 중심으로 오는 버릇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090912
[중년남자들] 불안-돈에 노출된 강박이 만드는 일상. [불안한 삶-돈이 해결할 수 있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은 다른 출구를 만들지 않는다. 오로지 볼 수 있는 것은 제한된 시각안으로 침몰시킨다. 불안에 강요된 몸이 할 수 있는 것은 돈독이 올른 뱀의 혀와 기껏 이야기하는 화제의 주제가 골프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담보잡힌 아이의 교육과 과외, 팔 수 없는 집값이 허덕거림이 쳇바퀴처럼 삶을 담보잡힌 채, 그런 비참과 배부름을 동시에 배설하고만 마는 것이다.
[루저]- 엄친아, 양주에 차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양주맛의 감별에 차별이 다가선다. 철학에 무덤덤하지만 철학하는 이가 일상에 있다면 그 미묘한 차이때문에 흔들린다. 엄친아는 욕망의 반영일 뿐 그 이상이 아니란 현실을 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루저는 연대할 수 있는가? 경제단위가 없는 루저의 공간과 삶은 만들어질 수 없다. 철저히 살림살이에 예속되기 때문이다. 얇지만 만명의 루저가 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얇아 표시나지 않은 공간을 부풀릴 수 있다면, 가능성마저 없는 지방대의 현실은 인식의 바깥이고 부풀릴 현실의 표피마저 없는 날현실 그대로이다. 현실을 비참하게 느끼는 것마저도 '특권'이다. 그 경계에 서있을 수 있기에 생기는 감각이다..."비참함을 지각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신보다 아래의 '부속품'들의 삶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090913
[기득권] - 가질 것에 대한 생각에 볼모잡혀 가진 것에 대해 불감하는 사회. 불안을 핑계로 지금의 사유와 현실을 나누지 못하는 몽매. 한통계를 보면 기부를 하는 비율이 가난한 하위층위가 더 많이 한다. 몸으로 느끼는 것이 많은 현실의 부대낌의 어려움은 처지를 넘긴다. 그런데 이땅의 386의 허위는 그룹핑을 하더라도 미래의 불안이 엄습하겠지만, 그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만 백번 양보한다하더라도 [지금]으로 처지를 사고하지 않는다. 기득권의 과실이 당신의 삶을 달콤하게 녹이고 그 단맛으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야 한다. 말은 80년대로 결빙되었다면, 그 시선으로 당신의 [지금]을 보는 눈이 생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말로만이다. 뻔뻔스러움과 가증스러움이 말과 당신의 두어깨에 훈장처럼 쌓여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집 한채있고, 과외시키기에 허덕거려 남을 위해 품을 기부 한점할 여유조차 없다고 그러니 그냥 살게 내버려두라고 이야기하라. 세상 핑계대지 말구. 090912

뱀발. 1. 20대의 글을 보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생각의 깊이. 그리고 생각과 현실의 결들을 세세히 겹쳐 읽을 무렵 이 친구가 이십대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대수냐고 하지만, 십대도, 이십대도 서로 보듬어나갈 친구라는데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십대에 대한 느낌도 또한 다르다. 가까이-멀리서 볼 수 있음 느낌의 나눔이 별반 새로울 것도, 세대의 경계도 없을 수 있다. 서로를 그리고 이사회를 얼마나 절감할 수 있느냐에 따라 친구와 기득권을 번갈아 선다. 제발 더 움켜쥘려 하지말고, 움킨 것을 놓고, 시선을 당신의 이십대로 십대말미로 내려놓는 연습이 절실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다.
2. 주말 십년이 더된 지난 일터동료들을 만났다. 채 한시간이 넘어서자 나오는 이야기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말이다.[루저]의 글이 20대의 이야기다.
3. 아침 나서니 닭의장풀의 색이 곱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