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뭇잎 도감 - 나무는 덩굴나무 5미터 안쪽의 가지가 많은 떨기나무, 줄기가 있는 키나무는 10미터이상의 큰키나무무 5-10미터의 작은키나무로 나뉜다. 그리고 나뉜 기준이 쉽고 좋다. 홑잎, 겹잎, 갈래잎, 안갈래잎으로 나뉘다보면 그렇게 나뭇잎과 나무를 한품에 안을 수 있다 한다. 나뭇잎도 잎겨드랑이, 턱잎, 잎자로, 잎몸 마음닿는 글말과 입말들이 고맙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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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밀화를 보다

 

 

 

#2.
- 감정이 심리단위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감정은 문화단위이자 사회단위다.
- 감정이 네너지를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덕분이다. 감정이 반성이전 상태, 때로 반의식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 감정에 문화와 사회가 충분하다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다.
- 남녀의 구분도 감정문화들을 통해 재생산된다.
- 남녀의 구분으로 감정의 위계가 만들어진다.
- 경제와 감정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감정의 자제는 남성적 실천이자 남성적 모데리었다.
- 정신분석학이 감정생활을 재구성했다.
- 자아와 자신 간의 관계, 자아와 타인들 간의 관계를 재정식화했다.
- 빅토리아 시대 감정문화는 남자와 여자를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으로 분할했지만 20세기에는 경계와 공사의 영역을 약화시킨다.
- 평범하고 일상적인 자아가 신비롭고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자아가 재구성된다.
- 사유양식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엇비슷한 입장에서 비롯되는 전형적인 상황들 앞에서 지속적으로 취하게 되는 일체의 반응을 뜻한다.
- 평등과 공조라는 문화모티브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과 정서성을 엔지니어링했다.
- 소통모델; 바람직한 경영자와 유능한 사원에 요구되는 감정적, 언어적, 나아가 인성적 특질을 가르핀다.(자기관리 테크놀로지로서 대이적 내부적 감정 조율)
- 능동적 청자 테크닠, 자아의 테크닉이 이상적 기업의 특징이 된다. 공조의 마음기술. 경제영역은 정서로 가득한 영역
- 가치합리화, 감정의 존재론/ 통약- 질적차이를 양적차이로 바꾼다. 언어는 중립적 언로로 텍스트에 고정되고 감정은 고정된 대상으로 포착된다.
- 관계가 사물이 된다.....그렇게 되면 상품의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 인정이란 자기 상실의 통찰에서 시작된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상대속에서 나를 잃는다는 것, 나 자신이다. 나자신이 아닌 어떤 타자속에서 그리고 그 타자에 의해서 전유된다는 것이다.
- 언어 이데올로기;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우리의 사회 환경과 감정환경을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뱀발. 일터일을 매듭짓고 조금 일찍 퇴근길 도**엘 들르다. 간단한 저녁식사가 졸음을 만든다. 졸음이 가실 무렵, 신간에서 고른 감정자본주의가 마음을 끈다. 악셀호네트의 프랑크프루트의 연구원으로 아도르노 강의를 준비했다고 했는데 관점도 신선하고 빨려들게 하는 호흡도 가파르다. 1장과 말미를 보다 시간이 넘어 매듭을 짓지 못하고 메모 흔적만 남겨둔다.  

* 돌아와 먼너의 햇살을 부드럽게 비추는 달님을 만나다 돌아와 연*샘과 한잔 수다다. 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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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벌다, 삶에 말걸다. 삶에 말을 섞다.

'어제 물끄러미 바라본 티브이엔 한 용역 청소미화원이 소개되었다. 미화원도 아니고 앞에 용역이 붙었다. 난이도 높고 중량물이 있는 마을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또 다시 외주를 준 셈이다. 당연히 급료도 백오십만원이라고 했다. 그는 방을 하나 얻었고, 옷 갈아입을 곳도  환경미화라는 이유로 콘테이너박스가 철거되어 사람 눈을 피해 입고 일을 한다. 저녁여섯시부터 새벽세시. 식사는 기껏해야 김치에 김이다. 투잡을 계속했는데 하루 세네시간 자는 것이 힘들어 다른 일은 그만두었다고 한다. 사연인즉 친구 연대보증으로 이천만원을 날렸고,  두딸과 아내를 멀리두고 이렇게 서울외지에서 밤낮없이 일한다. 잠깐 보고싶은 딸들과 아내가 서울로 오고 표정에서 읽히는 큰딸의 반외면과 부쩍 커버린 둘째딸과 겸연쩍은 거리, 그리고 아내의 거리감이 한눈에 느껴진다. 몇년 돈을 벌어 새롭게 시작하자는 삶에 대한 다짐과 이산... ..무엇..'.

초복 일터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산책을 나서는 길 생각이 맞선다. 그 삶은 온전할까? 그와 아내의 관계는 괜찮을까? 그와 큰딸의 거리감은 줄어들 수 있을까? 그와 작은딸, 그와 아내와 딸들과 관계, 그리고 그는 돈을 벌어 빚을 갑고......그 프로그램이, 기자가 피디가 의도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말미 이런저런 느낌이 들어온다.

삶이 그렇게 돈을 벌듯이 벌리는 것일까? 돈을 벌으면 삶이 그렇게 생각대로 되는 것인가? 삶은 그렇게 독립채산제이고 관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게 가족이 알아서 할 일일까? 삶에 말을 걸 수는 없을까? 삶이 서열지워지고 좋은 삶, 부자 삶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든 가난한 이든 똑같이 한표라면, 삶이 공평하게 말을 걸거나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삶이 뿔뿔이 길을 갈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말을 섞고, 말을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삶을 불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삶이 평등한 것이라면 지금까지 삶을 서로 공평하게 나눌 수 있고, 섞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무수한 이들이 가면서 아니라는 길을 굳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삶을 섞어 그래도 보살핌도 없고 상처만 생기는 삶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 그래도 살만하다면?  말을 걸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면? 개인의 복지가 아니라 삶의 복지라면? 외로운 노인들에게 수당 한푼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말걸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외로운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열고 섞을 수 있는 것은 뜬구름일까?

외려 별반 사회문화적 기준도 확연치 않는 개인보다는 삶의 이력이나 삶의 흔적이 더 구체적인 것은 아닌가? 삶에 말걸 수 있는 사회라면? 삶은 독립채산제가 될 수 없는 것이라면? 네 삶이 동등하게 한표이므로 네 삶의 가슴과 아픔에 내 삶을 번지게 할 수 있다면? 삶의 길에 말걸고 그것은 아니다 싶다면? 삶의 영역이 그렇게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담보에 처리되는 것이 정녕 아니라면, 삶을 놓아두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가족에 대한 인권이라면?

삶은 서로 품고 나뉘고 섞여 자랄 수 있는 것이라면?... ... 

뱀발. 저녁 자리, 일터 일로 이야기를 나눈다. 가슴으로 토해내는 말들은 눈에 가려진 것들을 모두 뱉어내려는 듯하다. 몇차례 말의 갈피를 잡지만 감정을 먹은 말들은 연신 그릇을 넘친다. 그의 삶은 위태롭다. 하지만 일터는 삶이 있기나 한 듯 외면한다. 행여 삶을 기획하거나 돈의 줄기에 보탠다면 이 사회에서 좀더 나을까? 생각은 일터로 들어서기도 하고, 지금 마음 나누는 이들에게도 향하고 저기 어둠에 친숙한 별들과, 소나기를 맞은 습기에도 향한다. 어떻게 살아라가 아니라 산 것이나 살아진 것, 살아온 것이 이 묽은 습기에도 눅눅해지거나 겹치는 한지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삶과 삶 사이를 관통하는 것은 없는 것일까? 삶을 살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을 도모하거나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그저 좋고 아름다운 삶에 점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허망한 삶에 말을 걸고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덜 아프고 덜 쓰리도록 예방할 수는 없을까? 홀로 홀로 원자로 뿔뿔이 생각하는 미련한 사회의 망각을 되짚을 수는 없는 것일까?  

가로등에 비친 목련잎과 잎들 사이 그늘이 탐스럽다. 삶들도 그렇게 빛에 겹치면 탐스러울 수는 없는 것일까? 홀로 살기보다 겹쳐사는 법은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5k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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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일을 훔치러가는 틈새, 하늘은 노을의 기운이 번지고 드넓은 평야는 고요하고 어스름이 다가 선다. 어느 틈인지 하늘 귀퉁이를 들어선 달님은 눈물을 머금다.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행여 놓친 것은 아닌지? 일들이 가파르게 언덕을 오를 즈음, 마음은 가슴으로 오르고 등줄기로 눈시울로 향한다. 일의 봉우리로 올라갈 즈음, 몸으로 밀고가는 일들은 마음과 가슴에 이슬을 채운다. 그렇게 채우다가 채우다가 일산비탈의 막바지를 다다를 무렵, 몸은 생각지도 않은 눈물을 토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밝은 곳에서 보이지 않던 님은 어두움에 스며들수록 찬찬히 비춘다. 그림자가 조금조금 선명해지는 것도 그러하며, 별빛도 그렁그렁해지는 것도 그러하다.  어둠을 찾고 어둠의 품으로 찾아들고 싶은 것은 그런 님이 그립기때문이다. 님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별의 눈물이 초롱해질 때 눈물도 일도 가파는 산비탈의 끝자락을 향하고 있고,  그 봉우리에서 난 그렇게 몸으로 차오른 눈물을 토해내고 맑아진 일의 평상에 누워 좀 쉬어야겠다. 그리고 다른 봉우리로 발걸음을 옮겨야 겠다. 

오늘 달에, 그렁그렁한 별빛에 취하고, 갑천에 비친 아파트의 눈물에 취한다. 일의 매듭이 어디에서 접힐지는 모르겠지만  일숲의 마지막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도 몸도 가슴을 섞는 일들은 뭉클하다. 뭉클뭉클한 것은 안개이며 액체이며 고인다. 녀석들이 어떻게 몸과 가슴, 마음으로 난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몸으로 밀어가는 일들은 이슬을 만들고 이슬을 토해낸 뒤에야 다음 어떻게 다가설지 모르는 일들 앞에 선다.  



뱀발.  

오랫만에 얼핏본 달님이 그리워 산책길로 나선다. 조명빛이 다한 후에야 어둠속 달무리에 비친 반달이 환하고 반갑다. 별빛도 여기저기, 강가에 불빛마저 다정하다. 다정이 병인냥 하다. 돌아오는 길 기술영향평가가 아니라 활동영향평가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숙고민주주의는 어떨까? 활동도 병인냥하여 잘 되는 방법은 없을까? 밤새도록 나눌 수는 없을까? 7k 60' 

허 전 

어느 순간 부르지도 않던 허전이 끼어든다. 일과 마음의 간극, 미묘한 틈새를 비집고 녀석은 자꾸 제대로 자리잡으려 엉덩이를 튼다. 마음이 들썩이며 한귀퉁이를 내주는 듯, 그 틈이 시리고 허하다. 마음도 그 아귀맞지 않는 틈으로 들썩거린다. 녀석이 그렇게 자리하여 구멍이라도 생길 듯 위험천만이다. 일도 마음도 들쑤실 듯 넘실거리는 녀석때문에 좌불안석이다. 몸과 마음, 그리고 일의 미세한 어긋남이 덜컥 들어서버렸다. 며칠 앓을 듯하다. 치통처럼 부은 기가 가라앉을 시간동안 말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그나마 삐걱거리는 틈의 아귀를 맞춰줄 것이다.

 


-1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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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책책책

 



시 기


텍스트


소모임


시대의 흐름


2005년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


 


노무현정권후반 (2004탄핵)


(민족주의,계몽주의,사민주의고찰)


 


8월 대연정제안


 


 


황우석신드롬과 황우석사태


2006상반기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고원


 


 


(근대에 대한 재인식)


 


평택 대추리 사건


2006하반기


사다리 걷어차기


 


5.31지방선거


쾌도난마한국경제


 


한미fta


남쪽으로튀어,나의아름다운정원,빼앗긴자들


 


2007상반기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민주화 20주년


선진화전략/한국자유주의의 기원/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007하반기


(보수,자유주의세력의 결집)


 


이랜드/비정규직


윤수종, 소수자운동


 


디워논쟁


소금꽃나무


(사회적 독서)


아프칸사태


88만원세대


 


대선/삼성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2008상반기


위험사회


미학모임


 


파시즘/공화주의/복지국가 혁명


 


 


 


티벳


촛불,광우병


2008하반기


토지/본동에내리는비/내가춤출수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근대사산책

다이나믹핀란드


조류독감

미국서브프라임

 



 

 

2005년 - 2006년

 

탄핵국면을 이은 17대 총선의 여운이 가실 때 쯤이겠군요. 노무현정권도 후반기에 들어설 무렵, 아카데미 오비팀들은 그때 이렇게 어려운 주제의 논문들을 보고 있더군요.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사회민주주의 역사와 한국의 접근 가능성, 그리고 분단체제의 세계화 등등을 통해 앎의 문제, 사민주의의 사례, 민족주의와 평화의 문제들의 속살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도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지적한 최장집교수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초창기 지적에 대한 여러 문제점들이 가시기도 전, 세상은 황우석신드롬과 정지선을 넘어 황우석사태와 황빠의 논란까지 증폭될대로 커져 과학-경제의 논리공간을 만들고 이어집니다. 경제논리와 성장의 발목에 정신을 잃은 듯 돌아온 386과 개혁입법도 지지부진하고 빛이 바래는 시점이기도 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진행된 세미나는 한국사회의 현상과 문제점을 알아보자고 이어졌고 현재 한국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 중에서 서구의 근대 이후의 사고와 제도가 우리 사회를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서구에서도 근대를 연 생각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니체를 찾게 되었습니다. [니체의 천개의 눈, 천개의 고원]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세미나 하는 가운데 물론 해석의 문제나 이견이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 다양성과 다양한 시선, 여러 집단을 부여잡고 놓치 않는 논리들이 세미나 성원들 사이에도 새롭게 번지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다른 시점, 시각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서로의 사고도 근대의 방식에 꽉 묶여 쉽사리 헤어나지 못했던 기억도 함께 합니다. 그러는 와중 우리의 몸에 철두철미하게 배여있는 경제논리는 서서히 물밑을 넘어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수면위로 올라와 버리게 됩니다. 비대칭적인 힘의 관계나 규모에 대한 고민은 없고 성장의 신화와 정치 논리는 어김없이 미디어와 현실의 공간을 압도하게 됩니다. 한미 경제 고속도로를 내자는 주장이 거침없이 나오고, 비판적인 의견과 강연회는 정책적인 반대 방향으로 미치는 상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미 fta가 우리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고 잇는 시점, fta를 포함하는 세계화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을 교재로 진행합니다.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를 통해 신자유주의와 fta가 선진국이 사다리를 통해 안정적인 위치에 다다른 후 사다리를 걷어차는 정책들에 대해 인상깊게 파악된 세미나였습니다. 세계경제에 대한 관점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 계기였고, 장교수의 책 [국가의 역할]도 논의가 되었습니다. 딱딱하고 무거운 책들로 이어진 세미나였습니다. FTA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더 다양하게 분석이 시도되었는데 이런 고민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시국의 상황은 거듭 팍팍한 일상으로까지 침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천개의 눈, 천개의 고원. 서로 바라보고 싶은 논리들의 함정에서 조금은 탈출할 수 있었을까요? 계속이어지는 세미나는 시대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무겁고 굵직한 주제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첫 기억인데 그래도 말랑말랑한 소설을 년말에 집어들었습니다. 남쪽으로 튀고 싶기도 하고, 나의 아름다운 정원, sf 명작을 통해 진보의 생각과 삶, 언어, 지향에 대해 산책을 해보면서 한해를 마무리합니다. 따듯하고 꿈결같고, 현실의 팍팍하고 퍽퍽함은 이렇게 상쾌함이나 유쾌함으로 벗어나야 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다른 세미나보다 따듯하고 포근해서, 그 감성과 감정들이 서로 이어주고 지금까지 잔여운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2007년

 

노무현정권 집권후반, “놈현때문에“라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기득권세력은 연일 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재벌은 물론이고 언론과 교육 모두 개선되는 가시적인 효과는 없게 됩니다. 우파는 물론이고 진보진영도 민주정부가 생겨 일정정도 개혁을 한다고 했는데, 개혁정치가 사회적으로도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어 암담해지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문제의식과 함께 경제위기 이어 fta 공방, 노무현정부의 실패는 진보진영 전체의 실패라는 인식, 87년체제, 97년체제 등 노무현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인식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87년이후 20년, 경향신문사에서 나온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이란 책으로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진보진영에 대한 전반적이 문제의식과 점검, 생활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것, 진보가 보지 못하고 간과했던 점들이 자성과 함께 세미나 속에서 뒤풀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습니다. 머리는 좌파인데 생활은 우파라든가 참진보는 무엇인가? 기업의 논리에 대해 무원칙으로 대응했던 것이 아닌가? 조금씩 의견이 개진되었지만 뒤편으로 밀린 흔적들과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출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물꼬가 트이게 된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요? 진보세력의 소통과 연대에 대한 화두도 조금씩 지역의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현실은 점점 노무현 정권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뉴라이트와 보수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우파 사회단체도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 인식의 소화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왜 지금의 자유주의가 문제가 되는지? 어떻게 보수 또는 자유주의 세력이 결집되고 활동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대응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심화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사회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한국자유주의 기원], 좋은 것은 다 묶어놓은 듯한 박세일의 [선진화 전략],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이영희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세미나가 이어집니다. 아쉽게도 안타까운 점들은 서구와 달리 보수주의의 맥락도, 자유주의의 맥락도 깊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 더욱 답답해지는 과정이었던 기억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경험과 미국의 개입이 조선의 흐름과 근대의 공백을 갖게한 것은 아닌지 동시에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던 피상적인 자유와 정책에 대한 반성도 이어지는 계기가 된 세미나였습니다.

 

대기업의 논리와 자본의 요구는 그와중에 더욱 드세지고, 권력에 힘을 얻어 보이지 않는비정규직의 삶까지 위태롭게 합니다. 이랜드, 기륭전자로 파열음을 내고, 경제성장의 논리는 황빠에 이어 심형래의 디워논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극단의 상황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런 일들이 너무도 당연한 듯이 우리의 일상을 점거하게 됩니다. 자신의 경제논리와 자신의 삶을 섞어보는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요? 부자되세요란 덕담이 자신을 부자로 일체화시키는 모습은 저기 일그러진 식민근대의 황국신민과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내면화가 어느새 부메랑처럼 돌아와 세계화된 자본의 생리는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무너지는 우리의 다른 모습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정신없이 살아왔지만 엄연히 세대간의 장벽을 만들어 놓은 현실, 좀더 조밀하게 우리의 삶을 넘보게 되어야하는 자각이 생기는 지점이지 않나싶습니다.

 

세미나팀도 소수자에 대한 관심, 아프칸 사태를 통한 이주노동자와 문화에 대한 관심, 비정규직에 대한 아픔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일부 사회적 독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함께 책을 읽는 흐름들이 지역에도 이어지게 됩니다. 윤수종교수 초청강연, 우석훈의 [88만원 세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등 년말 삼성공화국의 비리가 터지는 시점에서 시대상황은 여기저기 발생하는 문제들의 서로 연관성을 갈구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좀더 입체적으로 총괄적으로 세상을 보는 힘을 요구하는 듯 싶었습니다.

 

 

2008년

 

2007년 대선에서 여러 의혹에도 압도적인 표차이로 이명박정부가 탄생합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기술이라는 것도, 인문이라는 것도 경제와 자본을 위한 치장정도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은 점점 더 암울이 색깔이 더 진해집니다. 잠깐 잠깐 제도 안은 인문의 위기를 들먹였지만 본질적인 인문의 부활이 아니라 자체 기능적인 수혈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근본적인 노력이 없습니다. 경제와 성장에 매몰된 정부는 작은 일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계의 아픔, 그리고 아픔이 불쑥불쑥 터지는 파열음은 주변에 있는 작은 이들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습니다. 대자본은 점점 더 치밀하게 중소상인의 영역까지 보란 듯이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년초 세미나를 한 뒤 우리나라에 방문한 울리히 벡은 별반 흥행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가 [위험사회]를 통해 제기한 문제는 별반 다뤄지지 않고, 서구의 유명한 학자로서 대접할 뿐이었습니다. 지적한 위험과 점점 가속페달을 밟아 위험을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상황과 위험이 합쳐져 어떻게 되돌아오는지에 대해 우리사회 어느 곳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회자되지 못합니다.

 

어렵고 딱딱한 책만큼이나 현실은 더 단단한 껍질을 씌우는 듯 싶습니다. 아픔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지구 저편의 아픔을 지금여기로 가져오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함께 읽고 나눕니다. 그 기아의 문제는 서로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지구안에서 일입니다. 같이 숨쉬고 호흡하기에 그 아픔의 공기는 정화될 수 없습니다. 나라 안에 갇힌 부는 저 반대편의 굶주림을 유발하며, 지금 당장의 편리는 후 세대에게 불편으로 대물림됩니다. 과학만, 인문만, 예술만으로 갇힌 학문은 이 현실을 이겨내기에 도움이 별반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연결됩니다. 아픔의 강도만큼이나 우리는 잘 느낄 수 없습니다. 과학-기술-법-인문-예술-철학--- 모두 문제이며 서로 장벽을 쌓을수록 이해하기 힘든 세상은 서로 물꼬를 내고 함께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합니다. 단단하고 날이선 세미나 틈 사이로 좀더 현실을 다른 각도로 느낄 수 있는 미학모임이나 티벳현실에 대한 접근과 근대사 모임을 통해 좀더 천천히 몸에 스미게 하는 다른 시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연결시키려 하지 않았던가요. 좀더 아픔을 예민하게 만들고 멀리 전달될 수 있도록 서로 마음의 촉수를 가다듬었던 때입니다. 이명박정권은 세월을 돌려놓으려는듯, 복고의 상상력 수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휘되어 압박되었던 지점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봄은 지나고 의도된대로 제도권을 착착 권력의 수중에 넣는 와중에 여중학생들로 촉발된 광우병 집회로 새롭게 발화됩니다.

 

세미나팀은 [파시즘], [공화주의]를 통해 여러 논리와 현실사이를 비집고 나가게 됩니다. 50년전, 200년전, 300년전으로 문제의 본질과 해결점의 고리와 열쇠는 없는 것일까하는 의문과 고민의 시도를 전환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문제는 이명박정권의 탄생, 일상의 문제, 해외의 사례 등등 너무 과도하게 보거나 소심하게 보는 것을 경계하며 좀더 현실의 문제로 예민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공화주의]란 책으로 시작한 세미나는 수차례 논쟁이 심화되기도 했는데 애초의 의도는 1980-90년의 버전이 아니라 좀더 대중들과 고민하고 주장해야할 이론이나 이념이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에 대해, 그리고 공화주의에 대한 공부는 지금 국가와 정부의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법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논의를 통해 얼마나 밀도가 높았던 것인지 그 폭과 깊이에 대해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대한민국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정체에 관한 촛불의 생각으로까지 번지는 우연도 맞게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촛불정국은 많은 고민과 현실적인 한계를 동시에 고민하게 합니다. 좀더 현실적인 사례, 다르게 사는 국가의 모습들은 어떨까? 똑같은 삶을 고민하고 있지만 왜 나라마다 다 다른 것인가? 왜 같은 사람인데 허술하고 문제있는 기준을 감수하라고 하는 것인가? 말로는 경제논리를 들이지만, 우리의 경제가 아니라 저기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아이러니, 그 괴리감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위정자의 논리는 되짚어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세미나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례를 공부하게 됩니다. [다이나믹 핀란드], [복지국가 혁명] 북유럽의 사례들과 삶에 깊숙이 마음을 열게 됩니다.

 2008년 말미 미국의 서브프라임으로 세계가 휘청합니다. 자본의 열망이 다다르는 지점을 명백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본동에 비가 내리고, 박경리선생님의 흔적을 찾고, 나와너의 춤출 수 있는 혁명 사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 사이를 채우는 일, 나만의 삶이 아리라 나-너의 삶으로 이어지는 길. 우린 어떻게 그 사이길을 나누고 보듬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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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 가는 길목, 저녁에 숲으로 향합니다. 장대비가 언제 내렸냐는 듯이 숲은 비의 여운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촉촉하고 포근하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다감하고 다정해보이고 친숙합니다. 기대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숲을 거닐다 생각이 걸려 문자를 보냅니다. 때를 지나면 너무 멀리 사람사이가 벌어질까봐 조바심입니다. 생각을 걸고 나누면 어떨까, 놓친 것들이 있지나 않은가하는 염려도 섞입니다.

약속을 하고, 막걸리 한잔을 놓고 모임과 나-너를 안주감으로 올려놓습니다. 모임이 무엇일까?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단체란 무엇일까? 단체의 색깔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예전처럼 그 구분을 짓는 것이 유효한가? 아***는 무엇일까? 색깔없는 것이 색깔인가? 모임은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 맞는가? 아*** 무엇무엇이다. 자유다라고 규정짓는 순간 보듬지 못하는 무엇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누지 않던 고민을 시인에게 들이밉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란 주체가 정말 있는 것인가? 나를 너무 강하게 규정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의 마음의 거울을 통해 반사되거나, 다른 너에게 비추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먼나를 만나야 되는 것은 아닌가? 기껏 관계라는 것이 나-너만 있는 것은 아닌가? 너에게 되비추는 나만 있어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나란 생각도 너로부터 출발하거나 자라고, 나라는 것도 너를 통해 비추는 조각 조각 먼나를 만나야 되는 것이라면 모임을 통한 관계라는 것도 먼나에 대한 관심이나 너를 비켜서는 아픔에 대한 것은 아닌가? 강한 나에 집착한 우리에게 관계는 있기나 한 것인가? 모임이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구 규정하는 순간 모임은 기계처럼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가? 모임이 자라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나-너-나....모임이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인류가 한번도 결사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보지 못했다고 하면 어떨까? 인류가 기껏 가진 사유의 출발인 철학이 이 강한 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망가졌다고 하면 어떨까? 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만 가려고 했지 그 사이 민주주의를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라면 어떨까? 이렇게 뻥을 내지르며 막걸리를 건넨다. 나의 고민은 늘 거기에 멈춰서있으며 모임마다 자라는 속도가 다르며, 그 차이의 한가지가 강한 나에 대한 집착과 환원된 사유로 인한다고 말한다. 너에 대한 나의 중력이 너무나 크기에 그렇게 무중력처럼 떠있는 먼나와 너를 느끼지 못함으로 생긴다고 주장한다면 말입니다.



뱀발.  

1.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다보니 혹시 나는 너의 마음에 갇혀 다른 너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먼나, 먼너는 어디에 있는가? 너로 몰빵하는 것은 아닌가? 너에 올인해 되비추이는 먼나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모임 속에 먼나는 있는가? 나는 그렇게 너의 마음의 거울을 통해 되비추이는가? 

2.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킨 것인지 번개문자에 지인들이 뿔뿔이 번개를 맞고 있더군요. 아쉬움이 밀려들지만 생각을 더 지르거나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이야기만 되새김질 합니다. 유아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야할까요? 관계의 미숙으로 모임은 늘 자라지 못하거나 폐기되는 악순환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요? 관계론이 머리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으로 마음으로 손과 발로 내려오지 못하는 관계는 현실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3. 유아의 미숙함은 강한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모두가 어른이라고 하지만 모임과 관계에서 어른은 없습니다. 미숙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른이임을 눈치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모임이 주어지는 것도 나라는 것도 불쑥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먼나를 먼너로 관계하고 사고하자. 그렇게 생각을 밀고나가니 어색하군요. 구호같기도 하구. 또 다른 환원?이기도 하구 말입니다.  

4. 진리를 살아가는 것은 반진리를 느끼고 아는 것을 전제합니다. 진리를 살아가는 것은 허투루 편할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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