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일을 훔치러가는 틈새, 하늘은 노을의 기운이 번지고 드넓은 평야는 고요하고 어스름이 다가 선다. 어느 틈인지 하늘 귀퉁이를 들어선 달님은 눈물을 머금다.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행여 놓친 것은 아닌지? 일들이 가파르게 언덕을 오를 즈음, 마음은 가슴으로 오르고 등줄기로 눈시울로 향한다. 일의 봉우리로 올라갈 즈음, 몸으로 밀고가는 일들은 마음과 가슴에 이슬을 채운다. 그렇게 채우다가 채우다가 일산비탈의 막바지를 다다를 무렵, 몸은 생각지도 않은 눈물을 토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밝은 곳에서 보이지 않던 님은 어두움에 스며들수록 찬찬히 비춘다. 그림자가 조금조금 선명해지는 것도 그러하며, 별빛도 그렁그렁해지는 것도 그러하다. 어둠을 찾고 어둠의 품으로 찾아들고 싶은 것은 그런 님이 그립기때문이다. 님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별의 눈물이 초롱해질 때 눈물도 일도 가파는 산비탈의 끝자락을 향하고 있고, 그 봉우리에서 난 그렇게 몸으로 차오른 눈물을 토해내고 맑아진 일의 평상에 누워 좀 쉬어야겠다. 그리고 다른 봉우리로 발걸음을 옮겨야 겠다.
오늘 달에, 그렁그렁한 별빛에 취하고, 갑천에 비친 아파트의 눈물에 취한다. 일의 매듭이 어디에서 접힐지는 모르겠지만 일숲의 마지막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도 몸도 가슴을 섞는 일들은 뭉클하다. 뭉클뭉클한 것은 안개이며 액체이며 고인다. 녀석들이 어떻게 몸과 가슴, 마음으로 난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몸으로 밀어가는 일들은 이슬을 만들고 이슬을 토해낸 뒤에야 다음 어떻게 다가설지 모르는 일들 앞에 선다.

뱀발.
오랫만에 얼핏본 달님이 그리워 산책길로 나선다. 조명빛이 다한 후에야 어둠속 달무리에 비친 반달이 환하고 반갑다. 별빛도 여기저기, 강가에 불빛마저 다정하다. 다정이 병인냥 하다. 돌아오는 길 기술영향평가가 아니라 활동영향평가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숙고민주주의는 어떨까? 활동도 병인냥하여 잘 되는 방법은 없을까? 밤새도록 나눌 수는 없을까? 7k 60'
허 전
어느 순간 부르지도 않던 허전이 끼어든다. 일과 마음의 간극, 미묘한 틈새를 비집고 녀석은 자꾸 제대로 자리잡으려 엉덩이를 튼다. 마음이 들썩이며 한귀퉁이를 내주는 듯, 그 틈이 시리고 허하다. 마음도 그 아귀맞지 않는 틈으로 들썩거린다. 녀석이 그렇게 자리하여 구멍이라도 생길 듯 위험천만이다. 일도 마음도 들쑤실 듯 넘실거리는 녀석때문에 좌불안석이다. 몸과 마음, 그리고 일의 미세한 어긋남이 덜컥 들어서버렸다. 며칠 앓을 듯하다. 치통처럼 부은 기가 가라앉을 시간동안 말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그나마 삐걱거리는 틈의 아귀를 맞춰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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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의 통로를 지납니다. 불쑥 걸음을 내밀면 그래도 강에 닿을 수 있고, 플라타너스 바람의 색깔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안위입니다. 얘기를 모으고 섞어야 하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말을 뱉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생각의 터널도 또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충동도 불쑥 다가서기도 합니다. 이것저것 선택을 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음을 확인하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삶을 몸으로 섞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강가를 배회하는 듯합니다.
되돌아보는 지점 가운데 하나는, 너무 생각이나 고민이 한쪽 길로만 간 것은 아닌가 합니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가다보니, 출발이나 아픔을 달리하는 다른 고민의 길은 많지 않고 길들도 서로 연결되는 구석이 부족한 듯 보입니다. 마음의 정원이나 생각의 정원이라는 것도 이렇게 몸이나 강도에 따라 달리 커지니 말입니다.
'정의의 선택이 아니라 배려-(정의)의 선택이 보다 많은 것을 구원한다. 그러니 정의보다는 배려를 생각의 중심점에 놓아야 한다.'- 아침 악셀 호네트의 말줄거리가 생각나 다시 뱉어 놓습니다.
삶의 가운데서 가족의 울타리에 얼마나 구멍을 숭숭 낼지 모르겠습니다. 반발하시겠지만 열린 가족의 울타리를 얼마나 유연하고 멀리 만들 수 있겠느냐는 질문 이지만, 방향만 반대입니다. 사실의 방점만 달리 찍혔네요. 선수냐, 후수냐 삶의 질과 방향엔 차이가 많겠죠.
세상의 공기층이 너무도 각박하고 퍽퍽하지만, 다른 세상의 향기도 맡을 수 있는 것인지? 어둠의 터널끝이 힐끗 힐끗 여명을 주는 것인지? 세상의 갈피들은 서로 충돌하고 섞이길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생각과 고민들이 뾰족해지고 섞다보면 이렇게 두꺼워 틈을 낼 수 없는 장막같은 것들이 어느 한 곳 뚫려 그래도 다른 세상의 바람결을 맡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봅니다. 생각과 고민들이 얼마나 삶에 다른 햇살을 비추이고 조금은 다른 느낌이나 속도로 삶의 진전이 있게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검정 일색의 지금의 삶보다는 낫다고 여겨봅니다.
일과 사랑, 우정 단락단락 끊긴 일상들, 점점 갇혀지는 삶들이 무섭기도 합니다. 일상의 단절이 그래도 마음을 더 강열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마음의 강열이 약해지기 전에 마음이 노닐 수 있거나 이어질 일들이 사는 틀을 만들어놔야 한다는 아쉬움이 짙어지는 나날입니다. 뭐 대단하겠는가 하겠지만, 새일도 마음도 노닐 틀이 없다면 오목한 것이 아니라 볼록한 것이 되어 늘 담기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들이란 것이 한 곳에 모이고 줄기를 이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들 사이사이 느낌이나 아픔이나 관심이 자라줘야하는 것이기에 강도가 세어지는 밥벌이와 그외의 일들의 병행이 쉽지 않은 나날입니다.
생각 편린과 고민의 편린들, 사금파리처럼 서걱거리는 조각들을 붙이다보면 삶의 결이 불쑥 손을 베어 아픕니다. 그렇게 아파야지만 그나마 다른 말을 하려는 삶의 결에 아주 작은 편린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라고 채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또 한번 찔리고 베이고 고민과 고민 사이 잘못 덧붙여진 곳에 베여 찔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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