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 가는 길목, 저녁에 숲으로 향합니다. 장대비가 언제 내렸냐는 듯이 숲은 비의 여운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촉촉하고 포근하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다감하고 다정해보이고 친숙합니다. 기대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숲을 거닐다 생각이 걸려 문자를 보냅니다. 때를 지나면 너무 멀리 사람사이가 벌어질까봐 조바심입니다. 생각을 걸고 나누면 어떨까, 놓친 것들이 있지나 않은가하는 염려도 섞입니다.

약속을 하고, 막걸리 한잔을 놓고 모임과 나-너를 안주감으로 올려놓습니다. 모임이 무엇일까?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단체란 무엇일까? 단체의 색깔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예전처럼 그 구분을 짓는 것이 유효한가? 아***는 무엇일까? 색깔없는 것이 색깔인가? 모임은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 맞는가? 아*** 무엇무엇이다. 자유다라고 규정짓는 순간 보듬지 못하는 무엇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누지 않던 고민을 시인에게 들이밉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란 주체가 정말 있는 것인가? 나를 너무 강하게 규정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의 마음의 거울을 통해 반사되거나, 다른 너에게 비추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먼나를 만나야 되는 것은 아닌가? 기껏 관계라는 것이 나-너만 있는 것은 아닌가? 너에게 되비추는 나만 있어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나란 생각도 너로부터 출발하거나 자라고, 나라는 것도 너를 통해 비추는 조각 조각 먼나를 만나야 되는 것이라면 모임을 통한 관계라는 것도 먼나에 대한 관심이나 너를 비켜서는 아픔에 대한 것은 아닌가? 강한 나에 집착한 우리에게 관계는 있기나 한 것인가? 모임이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구 규정하는 순간 모임은 기계처럼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가? 모임이 자라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나-너-나....모임이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인류가 한번도 결사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보지 못했다고 하면 어떨까? 인류가 기껏 가진 사유의 출발인 철학이 이 강한 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망가졌다고 하면 어떨까? 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만 가려고 했지 그 사이 민주주의를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라면 어떨까? 이렇게 뻥을 내지르며 막걸리를 건넨다. 나의 고민은 늘 거기에 멈춰서있으며 모임마다 자라는 속도가 다르며, 그 차이의 한가지가 강한 나에 대한 집착과 환원된 사유로 인한다고 말한다. 너에 대한 나의 중력이 너무나 크기에 그렇게 무중력처럼 떠있는 먼나와 너를 느끼지 못함으로 생긴다고 주장한다면 말입니다.



뱀발.  

1.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다보니 혹시 나는 너의 마음에 갇혀 다른 너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먼나, 먼너는 어디에 있는가? 너로 몰빵하는 것은 아닌가? 너에 올인해 되비추이는 먼나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모임 속에 먼나는 있는가? 나는 그렇게 너의 마음의 거울을 통해 되비추이는가? 

2.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킨 것인지 번개문자에 지인들이 뿔뿔이 번개를 맞고 있더군요. 아쉬움이 밀려들지만 생각을 더 지르거나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이야기만 되새김질 합니다. 유아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야할까요? 관계의 미숙으로 모임은 늘 자라지 못하거나 폐기되는 악순환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요? 관계론이 머리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으로 마음으로 손과 발로 내려오지 못하는 관계는 현실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3. 유아의 미숙함은 강한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모두가 어른이라고 하지만 모임과 관계에서 어른은 없습니다. 미숙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른이임을 눈치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모임이 주어지는 것도 나라는 것도 불쑥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먼나를 먼너로 관계하고 사고하자. 그렇게 생각을 밀고나가니 어색하군요. 구호같기도 하구. 또 다른 환원?이기도 하구 말입니다.  

4. 진리를 살아가는 것은 반진리를 느끼고 아는 것을 전제합니다. 진리를 살아가는 것은 허투루 편할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5.

>> 접힌 부분 펼치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