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시아의 사상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생각해본다. 그것이 과연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통사를 살펴본다해도 유학, 불교, 실학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어떤 것이 우리 사상인가도 확연하지 않다. 한자 중심의 문화로 묶는다는 것도 모호하지 않는가?

 

  • 출발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수준에 맞는 의미를 찾아가는 것으로 의미를 두면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떤가?

 

  • 동아시아 사상이 있는가라는 물음보다는 최근 동아시아 150년에 있어서 상황에 대처하는 지적물음이나 어떤 생각을 하려했는가? 세계체제에서 어떻게 보느냐?는 과정과 상황, 지식인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질문을 바꾸면 어떠한가?

 

  • 아미티아 센의 살아있는 인도를 잠깐 살펴봤는데 16세기 기독교로 획일화되고 르네상스의 시기에 인도는 아티바르 국가였는데 여러 종교를 다 인정해주고, 노예폐지 등 유럽과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인디아대륙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사상의 흐름은 서구와 다르게 움직였다고 봐야 한다.

 

  • 중국, 일본, 한국도 근대에 대한 수용의 역사가 다르다. 중국이 외세에 직면해서 저항한다면 일본은 자발적이었고, 한국은 또 다른 근대경험을 갖고 있다.

 

  •  근대지점을 어떻게, 언제부터로 볼 것이냐?

 

  •  박지원은 열하일기 마지막에 후삼경자로 시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명나라 시작에서 180년이 지난 경자년이라고 청이 아니라 명에 대한 종주국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  네덜란드만의 철학이 있고, 사상이 있는가?라고 볼 수 있는가?

 

  • 우리의 경우 기호학파, 영남학파 주자학의 흐름이 있지만 식민지, 전쟁을 통해 사상의 단절을 겪고 있다고 봐야 한다.

 

  • 중국의 왕우이는 조공시스템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으며 인류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 고 있다. 동아시아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의문이다.

 

 

뱀발. 동아시아 사상은 가능한가라는 홍보문자, 주말 늦은 시간이라 모임이 쉽지 많은 않을텐데 예비모임이라는 공지에도 여러 참고도서와 미리 책들을 읽고 온 분이 많다. 차수를 옮기며 옆자리의 멤버를 바꾸면서 얘기를 섞는다.  고량주와 사케, 막걸리와 소주, 맥주와 안주사이 말많은 멤버들의 화려한 수다와 속얘기가 끊이질 않는다. 일단은 루쉰으로 하고, 다시 한번 동아시아를 묻다라는 책으로 질문과 방향에 대한 의견을 되묻기로 한다. 다음은 140215 16시 아***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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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활 - 창간호 - 2013 7-8월호
말과활 편집부 지음 / 일곱번째숲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말과활 창간호와 2권의 서동진샘의 글을 다시보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그리고 정치와 사회에 대해 다시 짚고 있다. 3권에서 모종의 의도를 이야기할 것 같은데 궁금하다. 시간이 별반 허락치 않아 창간호만 먼저 스크랩해둔다.

99%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80-90년초의 민중운동이 유호하게 먹힌 반면 촛불을 비롯한 시민운동, 월가의 행진이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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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을 안방으로 옮기다. 묶힌 책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누울 자리 서성일 자리, 개다리소반 옆에 조금 책들을 두다. 치우다가 화장대 공간이 마음에 들어 서재로 꾸며놓고 틈틈이 시간을 보낸다.

 

 

 

2. 소개받은 책의 몇 꼭지를 보았는데 마음이 흔들린다. 시간에 바래지 않는 글쓰는 능력이 있다. 소담스런 마음을 받아본다. 떨린다. 아껴 읽기로 하다.

 

 

 

3. 오고가는 길, 추위에 오래 머물지는 못하지만 미술관과 포은 정몽주의 임고서원에 잠시 들르다. 추위에 아랑곳 않는 은행나무 실루엣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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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는 역사에 개입하려고 할 때 오늘날 유행하는 고정된 '비판'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불평등한 현대세계 속에서 일본인은 어떻게 '평등'하게 살아가야 하는가였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상적인 상황으로 '평등'을 말하지 않고, 늘 현실에서 그러한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올바름 선호'를 업으로 삼는 지식인과 달리, 언제나 현상에서 드러난 것을 뒤엎어 그 철학적 '진실'을 드러냈다. 그러한 '진실'은 때로 혀상과 충돌하거나 정반대편에 서기도 한다. 특히 서구이론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다케우치는 그러한 '진실'을 끊임없이 건져올렸다. 13


중국은 어떻게 루쉰이 절망을 담아 끝까지 맞섰던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노예가 주인이 된다고 노예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루쉰은 늘상 이야기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현실에서 부자유스러운 '노예상태'와 자신의 노예상태를 직시하지 않는 노예근성을 구분하여, 루쉰은 '깨어난 노예'라고 철학적으로 지적했다. 이때 그는 '깨어난 노예'는 자기임과 자기이외임을 동시에 거부한다는 정의도 잊지 않았다. 이리하여 절망과 저항이 비로소 연관을 맺게 된다. 20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해체를 진행하면서도 타자를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를 재건한다. 30

 

다케우치는 계몽가의 자세를 취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일본의 '마땅한 모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지 않았다. 역으로 그는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혼돈스런 부분에 진입하려 했으며, 조금이나마 역사를 변화시키려 했다. 31

 

"오로지 각각의 특수한 용어를 주문처럼 암송하는 능력만을 진보의 지표로 채용하는" 진보주의와 달리, 다케우치는 언어(개념, 카데고리)에 구애되면 역사를 희생시킬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말에 배반당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담았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모든 카테고리에 대해 역설적인 태도를 취했다. 38 모든 역사상 인물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스스로 묻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심판이나 변호를 멈출 때, 비로소 역사상 인물의 '원리성'이 떠오른다. 그 원리성이야말로 역사의 논리를 품고 있다. 39

 

'비판'이 생산성을 갖는지 여부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길들여져온 기준이란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듬어진 살아 있는 이론 판단이라기보다는 서양에서 빌려온 이론의 결론이 압도적으로 많다. 바로 그 점이 원인이 되어 이론의 결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워 '올바름'에 대한 욕구가 이상하리만큼 강해진다. 생산적인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이론감각을 결여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감각을 결여하고 있어 우리의 문화에서는 '올바름 선호'가 압도적인 풍조가 된다. 그러한 '선호'에서 빚어진 논의나 비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생산적인지는 근래 학문세계의 상황을 한 번 둘러보면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43 "관념을 추출하는 것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는 과학적이라는 관념 속에 있을 뿐이다. 인간을 추출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사고, 인간은 궁극적으로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 문학가는 문학이라는 관념 속에 인간을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을 싣고 움직이는 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생각한다면 그들의 학문됨, 문학됨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학자가 된다 했을 때, 모든 것을 의심해도 좋지만 최후의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의심하면 그는 학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44


"인간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하나 만사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며, 차라리 주체의 의도와 객관적 결과가 불일치하는 쪽이 현실적이지 않은가라는 인식. 이러한 진리는 젊은 다케우치가 역사 자체의 힘을 인식하는 선열한 계기가 되었다." 383 '말을 신용하지 않되 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담는' 태도, 바로 말을 사고의 탄성으로 삼아 사상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384

 

세계가 단지 평면이 아니라 경계이자 위계이며 그래서 깊이를 갖는다고 여긴다면 비판의 행위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습니다.386


쑨거에게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비판이란 비판의 주체가 그 비판 행위로 전혀 상처입지 않는 비판입니다. 또한 자신의 비판하는 행위에 의해 자신이 다치지 않을 안전한 곳에서 하는 비판입니다. 비판행위로 비판의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비판의 옳고 그름으로서는 따질 수 없습니다. 아마도 비판의 대상 안에 비판하는 주체가 내재하고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며, 이때는 비판의 올바름이 아닌 비판의 윤리성이 문제로 등장하게 됩니다...차라리 비판의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엄밀함보다는 자신을 걸 수 있는 판돈의 크기일 것입니다.  388


다케우치가 말하는 저항에는 두 가지 다른 저항이 포개져 있습니다. 첫번째 저항은 나를 패배하게 만든 상대에 대한 저항이며, 두번째 저항은 패배를 잊으려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저항입니다. 따라서 저항은 계속되는 패배감 속에서 지속됩니다. 다케우치는 이런 이중의 저항에 의해서만 동양은 진정 자신의 근대를 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390

 

 

뱀발.  몸 컨디션이 여의치 않아 대부분의 나날들을 숙소에서 독서 갈증을 풀고 있다. 잔뜩 포개어진 새책들 사이 맛만 보려던 것이 진도를 나가버린다. 서구 이론은 우리 몸에 맞는가? 맞지 않다면 동양이론은 잘 맞는가? 잘 맞는다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이론이 무엇이 문제인가? 동아시아의 사상이 잘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관조하지 않고 역사란 몸에 담그는 일...그 안에 느끼고 보고 바꾸고....루쉰이 몸을 끌며 바꿔내는 것들은 보지 않고 바꿔진 것만 보는 습속은 여전히 서양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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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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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달이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눈 한 번 떼지 않고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폴오스터의 달의궁전 마지막 대목이다. - 유행과 사물의 감수성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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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빠'와'까' 그리고 광장과 밀실
    from 木筆 2014-02-12 09:13 
    '빠'와'까' 그리고 광장과 밀실 ㅡ 노명우라는 저자는 군중과 공중을 구분한다. 열광을 그 속에서도 느끼며 밖에서도 볼 줄 아는 법을 논한다. 철없는 무리도 아니며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는 이도 아니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드나든다.' 또하나의 가족' 후원자 가운데 이*재의 이름이 나오도록 본다. 아프다는 것을 안고 사는 것, 아비의 입장이 된다는 것과 관료조직의 역할을 한다는 건 다르다. 안타깝게도 해치워야 할 일과 삶들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