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우치 요시미는 역사에 개입하려고 할 때 오늘날 유행하는 고정된 '비판'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불평등한 현대세계 속에서 일본인은 어떻게 '평등'하게 살아가야 하는가였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상적인 상황으로 '평등'을 말하지 않고, 늘 현실에서 그러한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올바름 선호'를 업으로 삼는 지식인과 달리, 언제나 현상에서 드러난 것을 뒤엎어 그 철학적 '진실'을 드러냈다. 그러한 '진실'은 때로 혀상과 충돌하거나 정반대편에 서기도 한다. 특히 서구이론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다케우치는 그러한 '진실'을 끊임없이 건져올렸다. 13
중국은 어떻게 루쉰이 절망을 담아 끝까지 맞섰던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노예가 주인이 된다고 노예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루쉰은 늘상 이야기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현실에서 부자유스러운 '노예상태'와 자신의 노예상태를 직시하지 않는 노예근성을 구분하여, 루쉰은 '깨어난 노예'라고 철학적으로 지적했다. 이때 그는 '깨어난 노예'는 자기임과 자기이외임을 동시에 거부한다는 정의도 잊지 않았다. 이리하여 절망과 저항이 비로소 연관을 맺게 된다. 20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해체를 진행하면서도 타자를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를 재건한다. 30
다케우치는 계몽가의 자세를 취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일본의 '마땅한 모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지 않았다. 역으로 그는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혼돈스런 부분에 진입하려 했으며, 조금이나마 역사를 변화시키려 했다. 31
"오로지 각각의 특수한 용어를 주문처럼 암송하는 능력만을 진보의 지표로 채용하는" 진보주의와 달리, 다케우치는 언어(개념, 카데고리)에 구애되면 역사를 희생시킬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말에 배반당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담았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모든 카테고리에 대해 역설적인 태도를 취했다. 38 모든 역사상 인물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스스로 묻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심판이나 변호를 멈출 때, 비로소 역사상 인물의 '원리성'이 떠오른다. 그 원리성이야말로 역사의 논리를 품고 있다. 39
'비판'이 생산성을 갖는지 여부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길들여져온 기준이란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듬어진 살아 있는 이론 판단이라기보다는 서양에서 빌려온 이론의 결론이 압도적으로 많다. 바로 그 점이 원인이 되어 이론의 결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워 '올바름'에 대한 욕구가 이상하리만큼 강해진다. 생산적인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이론감각을 결여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감각을 결여하고 있어 우리의 문화에서는 '올바름 선호'가 압도적인 풍조가 된다. 그러한 '선호'에서 빚어진 논의나 비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생산적인지는 근래 학문세계의 상황을 한 번 둘러보면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43 "관념을 추출하는 것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는 과학적이라는 관념 속에 있을 뿐이다. 인간을 추출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사고, 인간은 궁극적으로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 문학가는 문학이라는 관념 속에 인간을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을 싣고 움직이는 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생각한다면 그들의 학문됨, 문학됨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학자가 된다 했을 때, 모든 것을 의심해도 좋지만 최후의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의심하면 그는 학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44
"인간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하나 만사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며, 차라리 주체의 의도와 객관적 결과가 불일치하는 쪽이 현실적이지 않은가라는 인식. 이러한 진리는 젊은 다케우치가 역사 자체의 힘을 인식하는 선열한 계기가 되었다." 383 '말을 신용하지 않되 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담는' 태도, 바로 말을 사고의 탄성으로 삼아 사상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384
세계가 단지 평면이 아니라 경계이자 위계이며 그래서 깊이를 갖는다고 여긴다면 비판의 행위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습니다.386
쑨거에게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비판이란 비판의 주체가 그 비판 행위로 전혀 상처입지 않는 비판입니다. 또한 자신의 비판하는 행위에 의해 자신이 다치지 않을 안전한 곳에서 하는 비판입니다. 비판행위로 비판의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비판의 옳고 그름으로서는 따질 수 없습니다. 아마도 비판의 대상 안에 비판하는 주체가 내재하고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며, 이때는 비판의 올바름이 아닌 비판의 윤리성이 문제로 등장하게 됩니다...차라리 비판의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엄밀함보다는 자신을 걸 수 있는 판돈의 크기일 것입니다. 388
다케우치가 말하는 저항에는 두 가지 다른 저항이 포개져 있습니다. 첫번째 저항은 나를 패배하게 만든 상대에 대한 저항이며, 두번째 저항은 패배를 잊으려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저항입니다. 따라서 저항은 계속되는 패배감 속에서 지속됩니다. 다케우치는 이런 이중의 저항에 의해서만 동양은 진정 자신의 근대를 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390
뱀발. 몸 컨디션이 여의치 않아 대부분의 나날들을 숙소에서 독서 갈증을 풀고 있다. 잔뜩 포개어진 새책들 사이 맛만 보려던 것이 진도를 나가버린다. 서구 이론은 우리 몸에 맞는가? 맞지 않다면 동양이론은 잘 맞는가? 잘 맞는다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이론이 무엇이 문제인가? 동아시아의 사상이 잘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관조하지 않고 역사란 몸에 담그는 일...그 안에 느끼고 보고 바꾸고....루쉰이 몸을 끌며 바꿔내는 것들은 보지 않고 바꿔진 것만 보는 습속은 여전히 서양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