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피다

 

비다. 문을 반틈 열고, 환기하려는 반대편 문을 여니 바람길이 생긴다. 바람을 따라 빗소리가 드나든다. 방안에 있되 처마밑에 있다. 바람따라 빗소리따라 처마밑의 마음길은 이리도 오가기 쉬운데, 삶을 실은 마음들은 피식피식 한치 앞도 다가가질 못한다. 단풍도 첫눈도 와르르 마음 길을 활짝 열지만. 송곳같은 생각엔 나만 찔려버리고 만다. 아물지 않을 상처처럼 깊이 피다.

 

 

볕뉘. 어제 밤은 비가 많이 내렸다. 당기지 않는 저녁이지만 챙겨들었다. 책은 읽히지 않고 답답함은 밀려오고 앙금처럼 남는 말에 짓눌려 어쩔 수 없었다. 지쳐 술에 의지할 생각조차 말라버렸다. 톡톡거리는 빗방울이 툭툭, 뚝뚝 마음에 비수같이 떨어져 고였다. 빗방울인지 핏방울인지  마음을 주기만 했지 틈틈히 나를 위해 채워주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다 내 책임인 것이다. 남을 위해 산다는 것만큼 허망한 것도 없을 것이다. 남을 위해 살아주는 체 한 것이다. 사람 속은 한 길도 알 수 없다. 원하고 바랄수록 목적과 목표에서 멀어지는 것인지 알면서도 그리하지 못한 것이다. 진심도 말라버린 경험을 한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시간이란 녀석이 곁에 있으니 두고보고 모아볼 일이다. 현실은 뜻하지 않게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여기를 직시하게 되는 방편이라고 위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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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삶의 핵심 기제가 무엇인가? 콜린스는 상호작용 의례의 기제라고 한다. 그 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정서적 에너지 추구자 이며, 정서적 에너지는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 삶의 현장, 즉 미시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의례에서 생산된다. 둘째, 성공한 의례는 집단 소속의 상징을 창조하며 개인에게 정서적 에너지를 생성시키거나 높여주지만, 실패한 의례는 정서적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의례에서 창조된 상징은 후속 의례, 개인들의 연결망에서 순환되며 집단의 통합과 유대를 산출한다. 상징은 홀로 있을 때 개인의 내면에서도 재순환되며 집단 소속감과 정서적 에너지를 유지시킨다. 셋째, 개인은 자신이 지닌 문화적 자본에 비해 정서적 에너지 보상이 가장 큰 상호작용에 이끌리며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사회적 삶은 무수히 많은 상호작용 의례들의 사슬 로 구성된다. 5-6

 

일반 이론의 수준에서는 공통분모 없이 각기 구별된 영역의 동기로써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 그 방법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론적 해결책은 고강도 상호작용 의례 시장과 물질적 재화 시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통합된 시장으로 개념화하는 방법이다. 궁극적 동기를 물질 추구에 있다고 보면 거기서 사회적 동기를 도출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적 동기에서 시작하면 두 영역을 통합할 수 있다. 22

 

상호작용 의례는 보통 신경체계가 리듬을 맞추고 상대의 반응에 대한 상호 기대가 조율될 정도로, 그리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한 사람의 신체적인 생리작용이 다른 이의 몸을 관통해 되돌아오는 상호반응의 순환 고리가 형성될 만큼 충분히 밀착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적어도 그 순간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생리적 반응을 자극한다. 이는 술, 담배, 마약, 카페인 따위를 섭취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인간 상호작용의 기초이다. 상호작용의 의례에 기호 식품의 섭취가 곁들이면 생리적 효과는 사회적인 효과와 뒤섞이며 사회적인 형태를 띤다. 나는 여기서 단지 정신적 과정과 정서뿐만 아니라 우리 몸이 섭취하는 물질이 무엇이건 그 체험 효과는 같다고 주장하는 강력한 사회적 구성주의 입장에 선다....대중적인 음식물은 대개 사회적 맥락에 따라 효과가 다양하게 나타나며, 효과는 사회적 용법으로 결정된다. 26-27

 

볕뉘.

 

1. 나, 너 너가 있는 것인지. 관계들은 늘 소진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말라버리는 것은 아닐까. 막다른 길 우연히 펼친 서문이 반갑다. 옮긴이의 상호작용 의례 interaction ritual  , 상징, 정서적 에너지란 말들의 사슬이 날렵하고 상쾌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적 자본보다 정서적 에너지 보상이 큰 쪽으로 상호작용하며 움직인다'는 말이 여운이 많이 남는다. 우리들의 관계라는 것은 기껏 리츄얼도 드물뿐더러, 정서적 에너지를 유도하지도 보상도 되지 않고 갉아먹는데 너무 익숙하다.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비난이 난무하며, 챙겨준다하며 끼리끼리의 리츄얼만 있고, 좀더 다른 열린 리츄얼은 부재하다. 정서적 에너지는 흐를리 만무하며 그 소진의 그늘에 말라버리고 만다.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룹에 갇혀있다. 사회적 삶을 확장하고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수성하지도 못하고 아성을 쌓지도 못한다.

 

2. 저자는 상호작용 의례와 물질적 시장을 통합한다. '개인은 이기적인 존재다. 물질적 가치를 추구한다'라는 추상이론과 환원이론에 빠지지 않는다. 사회적 시장이라는 생생한 그물에 넣어버리는 것 같다. 거시와 미시를 구분해서 나누지 않는다. 느낄 수 있는대로 놓아두지만 잣대로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과 사회라는 이분법에 말려들지 않는다.

 

3.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느낌이 좋다. 옮긴이는 친철하게도 두꺼우니 전부 보기 부담스러우면 제2부 이론의 적용부터 보라고 권면한다. 성 상호작용의 이론, 상황적 계층화, 흡연 의례와 반의례, 사회적 산물인 개인주의와 내면 지향성을 말한다.

 

4. 이론의 정합을 따질 여유가 없다. 늘 분석이란 그림자처럼 뒤에 따라 오는 것이기도 하고, 갈증에 목말라있기도 한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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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뿐만 아니라 이론의 부재 역시 대중을 손에 넣지마자

물질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아도르노의 가치」라는

마지막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물론 저자는 포스트모던의 광분을

★후기마르크스주의★라는 책제목으로 명한다.



그리고 시종 ♥아도르노를 복귀시킨다.

저자 !!프레드릭 제임슨은

소련의 몰락인 1989년을 이론의 시작이라는 징후로 읽었다.

그 시점에 백낙청교수와 나눈 대담이 시선을 충분히 끈다.


 


그때부터

지금여기의 진보?!는 이론을

손에 놓은 것에 비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경제도 정치도 밀물과 썰물같다고 하니,

운명은 그래도 준비한 자의 편이란 말이 남는다.

 

 

 

 

 부드러운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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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던져야하는 질문은 이 모든 구분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즉 사회에서 그것이 어떤 실질적인 목적에 봉사하느냐라는 질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구분에 좀더 정확성을 기하려고 새로운 공식들을 제안한다.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계급에 관한 설명을 수정하여 이를 현대적 경험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입장은 이러한 구분을 대부분 없애도 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대개는 필요없는 노력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471 우리는 여전히 태생에 근거한 사회적 계층 구분에서 돈과 실제적 지위에 의한 계층 구분으로 이행하는 단계에 있다.

 

나는 소상인의 집단과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저 계층의 사람들(상점의 조수들)을 믿을 수 없는가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가장 원색적인 어조로 하면, 그들은 늘 온갖 일에 참견을 한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토론의 절정은 구성원 중 한 명이 스스로를 정상의 비즈니스맨이라고 묘사한 것이었다. 이는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실 이것은 한 집단의 사람들이 가정한 중산계급의 소속과 구분인데, 그들은 동일한 중산계급 내에서 조금만 위로 이동하더라도 자기들이 가게 점원들의 위치를 정하고 경멸했듯이 바로 그렇게 위치가 결정되고 경멸당할 것이다. ---상승하는 중산계급의 힘을 배경에 둔 근본적인 계급 체제가 사회적 의미를 유지하려면 하층계급이 필요하다. 이 하층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사실 계속 돌아가면서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영국의 중산계급이 비현실적인 이유며, 그 모호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475

 

영국의 모든 계급 구분은 부드러운 황혼에 가려진 맨 꼭대기에서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그냥 사라질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적 설명과 경제적 설명 사이의 혼동이 이미 설명한 대로 체제 자체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권력, 지위를 향한 욕구는 자수성가의 특권적 지위라는 별개의 이상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히 오래된 체제로 향하였고, 그 대가로 우리는 혼란스러움 속에 빠져 있다. 476

 

수많은 봉급생활자들은 경제의 다른 부문에 종사하는 다른 봉급생활자나 고용주에 비해서 비용에 대한 세금 공제 등의 측면에서 자신들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집단들 사이에는 여러 세대 동안 냉소적인 공동체들 형성할 만큼 원한이 서려 있다. 나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지만 급여에 대한 특수한 주장들이 준거로 삼을 만한 일반적인 형평의 원칙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을 지지한다. 현재의 원한, 그리고 그것이 투쟁으로 드러나는 조야한 방식은 건강한 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480

 

보통 봉급생활자는 이미 언급된 임금 노동자와 자신의 차이 때문에 자신을 중산계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넘어서서 실제로, 지속적으로 그를 착취하고 있는 진정한 계급을 보지 못한다. 공개적인 차별이라는 제한된 관점에서만 계급 구분을 봄으로써 그는 자유의 상실에 순응하고 심지어 분투하는 중산계급이 흔히 사로잡히기 쉬운 일상적인 상류층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무산계급의 일원이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체제이며 자랑거리인 양 그 자신의 실제 곤경에 동의하기도 한다. 481

 

중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남아있는 차별로 인해 은폐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애초에 의도적으로 은폐된 공동의 운명에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노동계급의 조건이 나아졌으니 그들은 중산계급이 되는 것일까? 중산계급은 대부분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해야 하고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도 자산이 없다는 특징으로 보아 사실은 노동계급이 되어버렸다. 전통적인 규정이 붕괴되었고 그 결과 나타난 혼란은 의식의 심각한 축소로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새로운 일, 새로운 형식의 자본, 새로운 소유 체계는 그러한 것들과 관련하여 인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요구한다. 482

 

진정한 조건은 아직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복잡한 경제적 사회적 조직과 연관하여 우리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상류, 중간, 하류라는 등급을 부여받고, 이러한 등급을 끈질기게 고수하거나 그에 분개하는 하인이라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하인들이 그러하듯이 전반적인 기존의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내부의 용어로만 언쟁을 벌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482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토론하던 누더기 차림의 집단들은 아마도 그들의 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잘 차려입은 노동자들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끊임없는 변화는 실제의 역사적 과정이며,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실상 1930년대의 누더기 집단 시절보다 옷을 잘 차려입은 우리 시대의 노동당 투표자가 더 많다. 사실은 그 과정이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한 상승 그래프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정치적 조건과 전체적인 사회 변화의 국면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에 대한 진지한 분석도 결국은 이러한 실제 역사의 맥락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487

 

수백만의 임금 노동자들과 아내들은 여전히 그 이전 선거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수당에 투표한다. 중요한 질문은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냐 하는 것이며, 그들을 형성하는 새롭고도 영구적인 사회적 패턴이 존재하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힘들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두드러진다. 성별에 의한 투표 성향의 분리는 통상적인 계급 분석을 가로질러 나타나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적인 범주 내에서는 쉽사리 조정되지 않는 문제를 야기한다. 489-490

 

나로서는 노조의식과 혼합된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생겨나는 좀더 넓은 의미의 노동의식 사이에 균열이 생겨난 몇몇 증거들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변화의 조건은 엄연히 존재하며 만들어진 것이다..이렇듯 다양한 흐름에 휩싸인 새로운 공동체의 남녀들은 명시적으로는 전체로서의 사회와 연관되어 있는 학습과 반응의 패턴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나는 현대의 보수주의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복합체를 향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에게 이에 대한 해석을 설득력 있게 제공한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진보?는 제시할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새로운 학습, 새로운 반응은 우리가 아직 그려보지 못한 형식으로 구현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새로운 사회에서 그러하듯이, 새로운 공동체의 남녀에 관한 절대적인 사실은 다른 사람의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이미지에 따라 그들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494-495

 

차별이란 단지 특수한 사회의 작동 기능일 뿐이며, 한 부류의 노동자를 다른 부류와 대조하여 그 내부에서 좀더 치열한 경쟁을 장려하는 것은 전체적인 시스템을 영속화하는 형식으로 사회의식을 이끄는 효과를 지닌다. 내가 생각하기에 차별은 수정되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기반은 진정한 공동체의식 우리가 자신과 서로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진정한 앎 이다. ...이러한 대안들 사이의 결정은 계급에 대한 중대한 결정이될 것이며, 우리가 계급 체제를 종결시키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견고한 경제적 중심을 볼 때까지 다른 구별이 남아 있게 해서도 안되고 부적절성이나 혼란을 제거해야 한다. 498

 

문화적 형식은 어쨌거나 변화하지만, 교육을 통해서는 의미 있는 반응의 능력을 깊이 있고 세련되게 하기 위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변화하는 사회, 따라서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우리는 비평의 방법만이 아니라 행동의 형식도 배워야 한다. 500

 

가치있는 성장의 요소를 장려하지만 그것으로 문제의 뿌리까지 다다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저급하고 파괴적인 요소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선전되고 있다는 사실, 예를 들어 관현악단이나 화랑을 지원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비누를 광고하는 데에 더 많은 돈을 쓰고 듣기 좋은 어구를 붙인다는 것, 그리고 새 잡지를 두 가지 창간하려고 할 때 하나는 진지하게 새로운 작업을 하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단지 이미 알려진 대중 시장의 한몫을 잡으려고 경쟁하는 것뿐인데도, 두 잡지의 투자액을 비교해보면 터무니없게도 전자에 대한 투자는 바닥이고, 후자에는 엄청난 양의 돈을 쏟아 붓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501

 

순수한 새 잡지의 경우 보통 헌신적인 사람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지만, 실제로는 누군가가 들춰볼 수 있을 정도로 평균적인 책 가판대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구매를 기다릴 가능성조차 없는 반면, 새로운 상업 잡지는 널리 전시되어 거의 그것을 피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된다. 그러니까 진정한 경쟁이 없는 상태에서 직접적인 결과만을 가지고 대중의 천박성이 변함없다는 증거로 삼는 것은 바보 같고 심지어 악의적인 일이다. 대중들의 문화적 조건에 대한 의례적인 분개와 절망 대신 문화제도 대부분이 사회의 건강과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부족한 경험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이윤을 챙기는 데에만 관심 있는 투기꾼들의 손 안에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501-502

 

우리는 투기꾼과 관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 같다. 503

 

아무리 민주적인 나라라도 지나치게 큰 조직은 결국 경직되고 어떤 면에서는 뚤고 들어가기 어렵게 되어버린다는 위험이 여기에 상존한다. 모든 적절한 문화 조직은 공개적이고 유연해야 하며, 진정한 표현의 다양성에 헌신해야 한다. 다양한 문화 조직을 운영하는 최상의 사람들이란 자신의 작품 생산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간단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그 조직을 유연하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할 가장 심오하고도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504

 

괜찮은 서점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는 도시가 수백 개나 된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좋은 독립적인 서점은 특히 소중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운이 좋지 않으며 파산하게 된다. 현존하는 체인식 서점은 책이나 정기 간행물에 단순히 양적인 기준만을 적용한다. 즉 어떤 숫자 이하가 되면 그들은 특정한 품목을 다룰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이것을 자유, 혹은 입수 가능성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출판업자와 서적상, 저자들을 대표하고, 다른 편으로는 의회를 대표하는 출판 위원회를 만들어서 출판의 지속적인 독립성을 보장할 의무를 갖게하고, 동시에 국내외에서 최상의 서적과 정기간행물 배급을 담당할 책임도 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07

 

공공 자원을 분별 있게 사용하여 문화적 생산자들이 지배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기능적으로 쓸모없는 재력가 집단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를 단절하고,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 데 책임감을 유지하면서도 생산자들에게 그들의 실제 작업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계약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문화적 생산자들의 자유를 엄청나게 확장해줄 문화적 조직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512

 

기나긴 혁명에서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의 낡은 형식에 주는 압력과 제한을 뚫고 새로운 공동의 제도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이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성공과 실패를 모두 포함한다. 514

 

이걸로 충분해라는 목소리는 변화를 멈추거나 늦추고 싶어하는 부자들, 지배적이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일 뿐 아니라, 더 이상 관심이 없으며 자신의 실질적인 소득을 걸고 싶어 하지 않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516

 

우리는 기나긴 혁명을 지속적으로 제한하고 방해하는 세 가지 사고방식을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여러 특권 집단이 그들의 특별한 지위에 영향을 줄 만한 부, 민주주의, 교육, 문화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직시할 배짱만 있다면 그들이 선 곳에서도 엄청난 천박성과 편협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게 점원들, 공산주의자, 혹은 기사 작위를 받은 노조지도자.....스스로를 대중화에 내맡기는 것...대중은 스스로를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제공된 열등한 위치도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의 종말을 의미한다. 517-518

 

사회적 빈곤의 정의에서 문화적 빈곤과 부적절한 민주주의에 관한 정의 또한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새로운 사회 분석뿐만 아니라 인간적 기대에서 새로운 관계 해석과 새로운 감성을 필요로 한다....의식은 변화하고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해석을 찾는다. 이것이 영속적인 창조의 과정이다....새로운 세대가 수행한 가장 유용한 봉사는 사회로 하여금 그 이상과 실천을 비교해보도록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이다.....나는 우리 모두가 주변부의 여백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것이고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불균등하게, 잠정적으로 우리는 움직임을 느끼며 의미와 가치관들이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523-524

 

볕뉘.

 

1. 계급, 그것 도대체 필요한가? 그 분석도구를 써서 분석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은 쳇바퀴처럼 상층,중간,하층을 나뉘어서 끊임없이 밟고 일어서고 그 순환을 반복하는데 말이다. 대부분이 중간층이라고 얘기하고 할 수밖에 없고, 더 못한 낙인을 찍어두는 층이 있어야 살 수 있는데 말이다. 무산계급도 보라는 듯이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말이다. 사회를 낫게 만드는데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해왔는가 말이다.

 

2. 계급,  그것은 필요하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중산계급은 노동계급과 다르다고 한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살 수밖에 없는데도 그렇다고 한다. 노동계급 의식조차 희미해져 자신이 어떤 맥락에 위치해있는지도 못해 두려움에 판단력이 흐려진 중산계층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3. 새로운 일, 새로운 자본, 새로운 소유체계가 자리를 잡고 있어도 무감각하다. 낡은 의식의 도구란 잣대로 재고 재단한다. 잘라버리는 남는 것이 천지다.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새로운 것을 새롭게 바라보려고 하지 않으니 맨날 그모양이다. 투기꾼에게 발목이 잡혀있는지 관료에게 발목이 잡혀있는지조차 눈치채질 못한다. 아둔하다. 역사는 늘 창조되어왔다. 새로운 인간의 이미지를 창조해내지 못하면 늘 낡은 그림에 잡혀 그 그물을 헤어날 수 없다.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살고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한 것은 없다.

 

4. 저자는 출간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지금에 살고 있어도 똑같이 이렇게 새로운 흐름을 잡으려고, 소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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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사회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성을 되도록 따로 분리해서 간직하려고 노력하고, 자기 삶의 충만함을 가능하면 혼자서 확보하려고 하지.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삶의 충만함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파괴로 이어져. 왜냐하면 자기실현 대신 완전한 고독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지. 우습게도 요새는 어디서나 사람들이 진정한 안정감이란 고립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적인 연대감에서 온다는 사실을 점점 잊고 있어." 159-160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개인사회를 추상화하는 것의 가장 큰 폐단은 우리의 사고를 둘 사이의 관계로만 한정시킨다는 점이다.....새로운 개념들은 늘 어려운 것이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부터 적절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배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167

 

이동성이 증가하고, 최소한 일부의 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 그의 사회적 역할과 분리할 수 있는 의미의 개인이 된다는 생각도 힘을 얻는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그에 따른 엄청난 사회적 변화는 개인을 그의 자유로운 기업을 통한 경제 활동의 원천으로 보도록 했다. 이제 고정된 질서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활동을 시작하고 특정한 방향을 택하는가가 문제이다. 어떤 경우 이러한 변화가 가져오는 사회적 지리적 이동성 때문에 개인-‘나는 무엇인가’-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그리고 내 노력으로 무엇이 되었는가하는 정도까지 확장해서 다시 정의 된다. 131-132

 

본질적으로 개인의 개념은 그가 이제까지 통상적으로 규정된 관계들의 복합체에서 추상해낸 개념이다. 이러한 과정의 반대편에 해당하는 것이 사회라는 비슷한 추상화인데, 처음에는 실질적인 관계-동년배와의 교제-를 표시하던 것이 16세기 말부터는 좀더 근대적인 의미의 공동생화의 체제’-즉 하나의 사물 그 자체인 사회로 발전되었다. ‘공동체17세기에 와서 비슷한 발전과정을 겪었으며, ‘국가는 이 단계에 훨씬 더 먼저 도달하여, 그전에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 의미 - ‘민족의 상태에서와 같이 공동생활의 상태를 의미하거나, ‘왕의 지위에서와 같이 어떤 조건이나 지위의 표시를 의미하는 것에다가 공동생활의 기구’, 즉 공동생활의 틀이나 질서체계라는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이 분리되어서 마침내 한편에는 개인, 다른 한편에는 사회’, ‘공동체’, ‘국가가 각기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133

 

프롬의 연구가 특히 유용한데, 그는 사회 성격이라는 새로운 매개적 묘사를 발전시켰다. 이는 사회적 행위가 개인적 성격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자 한 것이다. 즉 이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억제와 전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관계를 포함하는 형성과정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 성격은 아이가 태어난 공동체의 대다수에게서 일어난 경험에 대한 선택적인 반응이며, 감정과 행동의 학습된 체계이다. 이때 가족은 그 공동체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사회 성격을 만들어내는 동인이다.137

 

사회를 유일하고도 단일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는 현실적인 집단들과 그들 간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협력관계일 뿐만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특수한 방향감각을 가지고 있는 개인은 그가 속한 사회의 대안적인 방향들에서 다양한 성장을 사회적인 용어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재료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 내에서 집단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이들 개개의 집단은 뚜렷한 사회적 성격혹은 문화의 패턴을 가질 것이고, 그러한 방향으로 그 구성원들을 훈육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감싸고 있는 것은 특수한 개개인들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며, 그러한 집단에서는 사회와 마찬자지고 새로운 방향들이 출현할 것이다. 144

 

우선 구성원이란 묘사를 들 수 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구성원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개인이 긍정적으로 동일시 되는 것을 묘사하는 방식으로서 유용하다. 한 사회의 구성원은 그 사회에 본질적인 방식으로 속해 있다고 느낀다. 즉 그 사회의 가치는 그의 가치이며, 그 사회의 목적이 그의 목적이어서, 그는 자신을 사회의 관점에서 묘사하며 자부심을 느낄 정도이다. 145

 

키르케고르는 사회가 우리에게 객관적이고 전형적인 인간이 되도록 압박하므로 우리는 이것을 뚫고 자신의 실존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는 진정하지 않는 자아가 마치 인간의 전부인 것처럼 제시한다고 야스퍼스는 주장한다...이와 비슷하게 니체도 사회의 정형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속물적이라고 표현했고, 사르트르는 진정하지 않은인간에게나 유효한 역할혹은 의무라는 식의 사회적 개념들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실존주의의 주장에 실체를 부여하는 관계들을 구분해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46-7

 

그릇된 동조의 표시는 우리의 사회적 경험에서 매우 명백했지만, 그것을 낡은 개인사회의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성원과 대비하여 기껏해야 신민 혹은 하인의 역할이라 묘사할 수 있다. 149

 

신민은 이론적으로 좀더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역사적으로나 현대의 미개발국에서는 아주 흔한 경험이기도 하다. 현대 유럽과 미국에도 하인의 경험이 훨씬 더 자주 기록되긴 하지만, 여전히 신민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듣고 있지만, 정도는 서로 다르게 우리의 다수는 공적인 활동의 패턴이 결국 사적인 욕망과 거의 상관이 없다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개인사회의 구별에서 오는 주된 현대적 힘은 바로 이러한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신명을 유지하면서도 반복해서 진심으로 사회의 목적들을 신봉하는 척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인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150

 

구성원뿐만 아니라 신민과 하인도 있다면, 이제 반역자뿐만 아니라 망명자부랑자도 있다. .,,혁명가개혁가 혹은 비평가 사이에 분명 중대한 구분을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가와 비평가는 내가 이제까지 내놓은 정의에 의하면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삶의 측면에서 이런저런 점을 바꾸려고 하는 진실한 열망은 그 삶의 일반적인 가치들에 대한 충성과, 개혁가들과 비평가들이 일상적으로 고수하려 하는 사회의 본질적인 연속성 내지 통일성과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혁명가는 개혁가나 비평가가 결국에는 그 사회의 현존하는 형식 내에서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정한 사회의 구성원 의식이 없다. 151

 

현대 사상에서는 부랑자의 조건이야말로 사회 속의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기색도 보인다. 인간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사람은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고, 특정한 사회적분위기를 전제하면 심지어 굳이 다른 척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순응과 반항, 봉사와 망명은 모두 부적절하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변화를 위해 싸우지 않으며, 당장의 편리함을 위해서 어떤 주인에게든 봉사하고 어떤 봉사를 하건 원칙이 아니라 편리에 따라 할 뿐이다. 부랑자가 확신하는 것은 부랑자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의미 없는 의미를 위해 스스로를 죽이며 오로지 중요한 것은 자신밖에 없는 상황, 그것도 의미 있는 자신이 아니라 단지 그저 살아가는 유기체 자체만 있는 상황에서도 의미가 있는 척하는 바보라는 것이다. 155

 

 

볕뉘. 

 

1. 뭉뚱그려 요지위주로 보다가 마음이 걸린다.  기나긴 혁명의 1부의 개인과 사회는 봐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결론으로 튀기보다는 , 마르크스주의와 문화에서도 용어에 대한 설명을 먼저 짚고 가는 것, 그리고 그것이 본론 강독에 유연성을 발휘하게 하는 마력같은 것이 있다. 제임슨이 언제나 역사화하라는 문구를 결론이나 매듭으로 지시한다면 저자는 말하고자 하는 핵심어에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짚어준다. 결론이나 쓰임새가 어떨지 비교할 수 없지만, 일단 유용하고 실용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수고를 아끼는 것은 결코 제것이 될 수 없다는 면에서는 제임슨의 방식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2. 우리는 무심코 개인과 사회로 나누어본다. 이분법적 사고다. 하지만 그 사이 구성원과 반역자, 망명자, 신민, 하인, 부랑자로 그 사이를 다시 짚어본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은 하인이나 부랑자의 삶을 살기에 딱 알맞다고 말이다. 얼마나 불쾌한 사실인가. 체제와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다른 삶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그저 하루를 살아지는 것이지 살아갈 궁리를 나누지도 못하는 처지임을 감안한다면 맞는 말이다.

 

3. 개인, 사회, 사회적인 것 들 사이 여백을 더 선명히 해보는 것을 통해서 어쩌면 지금 시대를 견디고 있는 나를 더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여백들이 백지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들을 무의식중에 그렇게 압박하고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들일 것이다. 개인을 발라내고 색깔을 칠하고 돋보이게 할수록 점점 더 외로워진다는 모두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돋보이는 사이 당신의 연대감은 같은 속도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자존감은 공동체나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사이 구성원의 입장에서, 망명자, 혁명가, 개혁가, 비평가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그 간극을 매워보는 상상의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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