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던져야하는 질문은 이 모든 구분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즉 사회에서 그것이 어떤 실질적인 목적에 봉사하느냐라는 질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구분에 좀더 정확성을 기하려고 새로운 공식들을 제안한다.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계급에 관한 설명을 수정하여 이를 현대적 경험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입장은 이러한 구분을 대부분 없애도 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대개는 필요없는 노력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471 우리는 여전히 태생에 근거한 사회적 계층 구분에서 돈과 실제적 지위에 의한 계층 구분으로 이행하는 단계에 있다.

 

나는 소상인의 집단과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저 계층의 사람들(상점의 조수들)을 믿을 수 없는가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가장 원색적인 어조로 하면, 그들은 늘 온갖 일에 참견을 한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토론의 절정은 구성원 중 한 명이 스스로를 정상의 비즈니스맨이라고 묘사한 것이었다. 이는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실 이것은 한 집단의 사람들이 가정한 중산계급의 소속과 구분인데, 그들은 동일한 중산계급 내에서 조금만 위로 이동하더라도 자기들이 가게 점원들의 위치를 정하고 경멸했듯이 바로 그렇게 위치가 결정되고 경멸당할 것이다. ---상승하는 중산계급의 힘을 배경에 둔 근본적인 계급 체제가 사회적 의미를 유지하려면 하층계급이 필요하다. 이 하층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사실 계속 돌아가면서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영국의 중산계급이 비현실적인 이유며, 그 모호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475

 

영국의 모든 계급 구분은 부드러운 황혼에 가려진 맨 꼭대기에서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그냥 사라질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적 설명과 경제적 설명 사이의 혼동이 이미 설명한 대로 체제 자체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권력, 지위를 향한 욕구는 자수성가의 특권적 지위라는 별개의 이상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히 오래된 체제로 향하였고, 그 대가로 우리는 혼란스러움 속에 빠져 있다. 476

 

수많은 봉급생활자들은 경제의 다른 부문에 종사하는 다른 봉급생활자나 고용주에 비해서 비용에 대한 세금 공제 등의 측면에서 자신들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집단들 사이에는 여러 세대 동안 냉소적인 공동체들 형성할 만큼 원한이 서려 있다. 나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지만 급여에 대한 특수한 주장들이 준거로 삼을 만한 일반적인 형평의 원칙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을 지지한다. 현재의 원한, 그리고 그것이 투쟁으로 드러나는 조야한 방식은 건강한 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480

 

보통 봉급생활자는 이미 언급된 임금 노동자와 자신의 차이 때문에 자신을 중산계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넘어서서 실제로, 지속적으로 그를 착취하고 있는 진정한 계급을 보지 못한다. 공개적인 차별이라는 제한된 관점에서만 계급 구분을 봄으로써 그는 자유의 상실에 순응하고 심지어 분투하는 중산계급이 흔히 사로잡히기 쉬운 일상적인 상류층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무산계급의 일원이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체제이며 자랑거리인 양 그 자신의 실제 곤경에 동의하기도 한다. 481

 

중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남아있는 차별로 인해 은폐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애초에 의도적으로 은폐된 공동의 운명에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노동계급의 조건이 나아졌으니 그들은 중산계급이 되는 것일까? 중산계급은 대부분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해야 하고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도 자산이 없다는 특징으로 보아 사실은 노동계급이 되어버렸다. 전통적인 규정이 붕괴되었고 그 결과 나타난 혼란은 의식의 심각한 축소로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새로운 일, 새로운 형식의 자본, 새로운 소유 체계는 그러한 것들과 관련하여 인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요구한다. 482

 

진정한 조건은 아직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복잡한 경제적 사회적 조직과 연관하여 우리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상류, 중간, 하류라는 등급을 부여받고, 이러한 등급을 끈질기게 고수하거나 그에 분개하는 하인이라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하인들이 그러하듯이 전반적인 기존의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내부의 용어로만 언쟁을 벌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482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토론하던 누더기 차림의 집단들은 아마도 그들의 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잘 차려입은 노동자들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끊임없는 변화는 실제의 역사적 과정이며,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실상 1930년대의 누더기 집단 시절보다 옷을 잘 차려입은 우리 시대의 노동당 투표자가 더 많다. 사실은 그 과정이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한 상승 그래프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정치적 조건과 전체적인 사회 변화의 국면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에 대한 진지한 분석도 결국은 이러한 실제 역사의 맥락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487

 

수백만의 임금 노동자들과 아내들은 여전히 그 이전 선거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수당에 투표한다. 중요한 질문은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냐 하는 것이며, 그들을 형성하는 새롭고도 영구적인 사회적 패턴이 존재하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힘들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두드러진다. 성별에 의한 투표 성향의 분리는 통상적인 계급 분석을 가로질러 나타나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적인 범주 내에서는 쉽사리 조정되지 않는 문제를 야기한다. 489-490

 

나로서는 노조의식과 혼합된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생겨나는 좀더 넓은 의미의 노동의식 사이에 균열이 생겨난 몇몇 증거들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변화의 조건은 엄연히 존재하며 만들어진 것이다..이렇듯 다양한 흐름에 휩싸인 새로운 공동체의 남녀들은 명시적으로는 전체로서의 사회와 연관되어 있는 학습과 반응의 패턴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나는 현대의 보수주의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복합체를 향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에게 이에 대한 해석을 설득력 있게 제공한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진보?는 제시할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새로운 학습, 새로운 반응은 우리가 아직 그려보지 못한 형식으로 구현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새로운 사회에서 그러하듯이, 새로운 공동체의 남녀에 관한 절대적인 사실은 다른 사람의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이미지에 따라 그들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494-495

 

차별이란 단지 특수한 사회의 작동 기능일 뿐이며, 한 부류의 노동자를 다른 부류와 대조하여 그 내부에서 좀더 치열한 경쟁을 장려하는 것은 전체적인 시스템을 영속화하는 형식으로 사회의식을 이끄는 효과를 지닌다. 내가 생각하기에 차별은 수정되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기반은 진정한 공동체의식 우리가 자신과 서로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진정한 앎 이다. ...이러한 대안들 사이의 결정은 계급에 대한 중대한 결정이될 것이며, 우리가 계급 체제를 종결시키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견고한 경제적 중심을 볼 때까지 다른 구별이 남아 있게 해서도 안되고 부적절성이나 혼란을 제거해야 한다. 498

 

문화적 형식은 어쨌거나 변화하지만, 교육을 통해서는 의미 있는 반응의 능력을 깊이 있고 세련되게 하기 위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변화하는 사회, 따라서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우리는 비평의 방법만이 아니라 행동의 형식도 배워야 한다. 500

 

가치있는 성장의 요소를 장려하지만 그것으로 문제의 뿌리까지 다다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저급하고 파괴적인 요소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선전되고 있다는 사실, 예를 들어 관현악단이나 화랑을 지원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비누를 광고하는 데에 더 많은 돈을 쓰고 듣기 좋은 어구를 붙인다는 것, 그리고 새 잡지를 두 가지 창간하려고 할 때 하나는 진지하게 새로운 작업을 하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단지 이미 알려진 대중 시장의 한몫을 잡으려고 경쟁하는 것뿐인데도, 두 잡지의 투자액을 비교해보면 터무니없게도 전자에 대한 투자는 바닥이고, 후자에는 엄청난 양의 돈을 쏟아 붓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501

 

순수한 새 잡지의 경우 보통 헌신적인 사람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지만, 실제로는 누군가가 들춰볼 수 있을 정도로 평균적인 책 가판대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구매를 기다릴 가능성조차 없는 반면, 새로운 상업 잡지는 널리 전시되어 거의 그것을 피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된다. 그러니까 진정한 경쟁이 없는 상태에서 직접적인 결과만을 가지고 대중의 천박성이 변함없다는 증거로 삼는 것은 바보 같고 심지어 악의적인 일이다. 대중들의 문화적 조건에 대한 의례적인 분개와 절망 대신 문화제도 대부분이 사회의 건강과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부족한 경험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이윤을 챙기는 데에만 관심 있는 투기꾼들의 손 안에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501-502

 

우리는 투기꾼과 관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 같다. 503

 

아무리 민주적인 나라라도 지나치게 큰 조직은 결국 경직되고 어떤 면에서는 뚤고 들어가기 어렵게 되어버린다는 위험이 여기에 상존한다. 모든 적절한 문화 조직은 공개적이고 유연해야 하며, 진정한 표현의 다양성에 헌신해야 한다. 다양한 문화 조직을 운영하는 최상의 사람들이란 자신의 작품 생산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간단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그 조직을 유연하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할 가장 심오하고도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504

 

괜찮은 서점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는 도시가 수백 개나 된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좋은 독립적인 서점은 특히 소중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운이 좋지 않으며 파산하게 된다. 현존하는 체인식 서점은 책이나 정기 간행물에 단순히 양적인 기준만을 적용한다. 즉 어떤 숫자 이하가 되면 그들은 특정한 품목을 다룰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이것을 자유, 혹은 입수 가능성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출판업자와 서적상, 저자들을 대표하고, 다른 편으로는 의회를 대표하는 출판 위원회를 만들어서 출판의 지속적인 독립성을 보장할 의무를 갖게하고, 동시에 국내외에서 최상의 서적과 정기간행물 배급을 담당할 책임도 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07

 

공공 자원을 분별 있게 사용하여 문화적 생산자들이 지배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기능적으로 쓸모없는 재력가 집단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를 단절하고,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 데 책임감을 유지하면서도 생산자들에게 그들의 실제 작업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계약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문화적 생산자들의 자유를 엄청나게 확장해줄 문화적 조직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512

 

기나긴 혁명에서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의 낡은 형식에 주는 압력과 제한을 뚫고 새로운 공동의 제도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이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성공과 실패를 모두 포함한다. 514

 

이걸로 충분해라는 목소리는 변화를 멈추거나 늦추고 싶어하는 부자들, 지배적이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일 뿐 아니라, 더 이상 관심이 없으며 자신의 실질적인 소득을 걸고 싶어 하지 않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516

 

우리는 기나긴 혁명을 지속적으로 제한하고 방해하는 세 가지 사고방식을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여러 특권 집단이 그들의 특별한 지위에 영향을 줄 만한 부, 민주주의, 교육, 문화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직시할 배짱만 있다면 그들이 선 곳에서도 엄청난 천박성과 편협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게 점원들, 공산주의자, 혹은 기사 작위를 받은 노조지도자.....스스로를 대중화에 내맡기는 것...대중은 스스로를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제공된 열등한 위치도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의 종말을 의미한다. 517-518

 

사회적 빈곤의 정의에서 문화적 빈곤과 부적절한 민주주의에 관한 정의 또한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새로운 사회 분석뿐만 아니라 인간적 기대에서 새로운 관계 해석과 새로운 감성을 필요로 한다....의식은 변화하고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해석을 찾는다. 이것이 영속적인 창조의 과정이다....새로운 세대가 수행한 가장 유용한 봉사는 사회로 하여금 그 이상과 실천을 비교해보도록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이다.....나는 우리 모두가 주변부의 여백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것이고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불균등하게, 잠정적으로 우리는 움직임을 느끼며 의미와 가치관들이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523-524

 

볕뉘.

 

1. 계급, 그것 도대체 필요한가? 그 분석도구를 써서 분석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은 쳇바퀴처럼 상층,중간,하층을 나뉘어서 끊임없이 밟고 일어서고 그 순환을 반복하는데 말이다. 대부분이 중간층이라고 얘기하고 할 수밖에 없고, 더 못한 낙인을 찍어두는 층이 있어야 살 수 있는데 말이다. 무산계급도 보라는 듯이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말이다. 사회를 낫게 만드는데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해왔는가 말이다.

 

2. 계급,  그것은 필요하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중산계급은 노동계급과 다르다고 한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살 수밖에 없는데도 그렇다고 한다. 노동계급 의식조차 희미해져 자신이 어떤 맥락에 위치해있는지도 못해 두려움에 판단력이 흐려진 중산계층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3. 새로운 일, 새로운 자본, 새로운 소유체계가 자리를 잡고 있어도 무감각하다. 낡은 의식의 도구란 잣대로 재고 재단한다. 잘라버리는 남는 것이 천지다.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새로운 것을 새롭게 바라보려고 하지 않으니 맨날 그모양이다. 투기꾼에게 발목이 잡혀있는지 관료에게 발목이 잡혀있는지조차 눈치채질 못한다. 아둔하다. 역사는 늘 창조되어왔다. 새로운 인간의 이미지를 창조해내지 못하면 늘 낡은 그림에 잡혀 그 그물을 헤어날 수 없다.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살고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한 것은 없다.

 

4. 저자는 출간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지금에 살고 있어도 똑같이 이렇게 새로운 흐름을 잡으려고, 소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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