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사회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성을 되도록 따로 분리해서 간직하려고 노력하고, 자기 삶의 충만함을 가능하면 혼자서 확보하려고 하지.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삶의 충만함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파괴로 이어져. 왜냐하면 자기실현 대신 완전한 고독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지. 우습게도 요새는 어디서나 사람들이 진정한 안정감이란 고립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적인 연대감에서 온다는 사실을 점점 잊고 있어." 159-160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개인사회를 추상화하는 것의 가장 큰 폐단은 우리의 사고를 둘 사이의 관계로만 한정시킨다는 점이다.....새로운 개념들은 늘 어려운 것이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부터 적절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배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167

 

이동성이 증가하고, 최소한 일부의 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 그의 사회적 역할과 분리할 수 있는 의미의 개인이 된다는 생각도 힘을 얻는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그에 따른 엄청난 사회적 변화는 개인을 그의 자유로운 기업을 통한 경제 활동의 원천으로 보도록 했다. 이제 고정된 질서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활동을 시작하고 특정한 방향을 택하는가가 문제이다. 어떤 경우 이러한 변화가 가져오는 사회적 지리적 이동성 때문에 개인-‘나는 무엇인가’-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그리고 내 노력으로 무엇이 되었는가하는 정도까지 확장해서 다시 정의 된다. 131-132

 

본질적으로 개인의 개념은 그가 이제까지 통상적으로 규정된 관계들의 복합체에서 추상해낸 개념이다. 이러한 과정의 반대편에 해당하는 것이 사회라는 비슷한 추상화인데, 처음에는 실질적인 관계-동년배와의 교제-를 표시하던 것이 16세기 말부터는 좀더 근대적인 의미의 공동생화의 체제’-즉 하나의 사물 그 자체인 사회로 발전되었다. ‘공동체17세기에 와서 비슷한 발전과정을 겪었으며, ‘국가는 이 단계에 훨씬 더 먼저 도달하여, 그전에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 의미 - ‘민족의 상태에서와 같이 공동생활의 상태를 의미하거나, ‘왕의 지위에서와 같이 어떤 조건이나 지위의 표시를 의미하는 것에다가 공동생활의 기구’, 즉 공동생활의 틀이나 질서체계라는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이 분리되어서 마침내 한편에는 개인, 다른 한편에는 사회’, ‘공동체’, ‘국가가 각기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133

 

프롬의 연구가 특히 유용한데, 그는 사회 성격이라는 새로운 매개적 묘사를 발전시켰다. 이는 사회적 행위가 개인적 성격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자 한 것이다. 즉 이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억제와 전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관계를 포함하는 형성과정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 성격은 아이가 태어난 공동체의 대다수에게서 일어난 경험에 대한 선택적인 반응이며, 감정과 행동의 학습된 체계이다. 이때 가족은 그 공동체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사회 성격을 만들어내는 동인이다.137

 

사회를 유일하고도 단일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는 현실적인 집단들과 그들 간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협력관계일 뿐만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특수한 방향감각을 가지고 있는 개인은 그가 속한 사회의 대안적인 방향들에서 다양한 성장을 사회적인 용어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재료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 내에서 집단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이들 개개의 집단은 뚜렷한 사회적 성격혹은 문화의 패턴을 가질 것이고, 그러한 방향으로 그 구성원들을 훈육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감싸고 있는 것은 특수한 개개인들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며, 그러한 집단에서는 사회와 마찬자지고 새로운 방향들이 출현할 것이다. 144

 

우선 구성원이란 묘사를 들 수 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구성원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개인이 긍정적으로 동일시 되는 것을 묘사하는 방식으로서 유용하다. 한 사회의 구성원은 그 사회에 본질적인 방식으로 속해 있다고 느낀다. 즉 그 사회의 가치는 그의 가치이며, 그 사회의 목적이 그의 목적이어서, 그는 자신을 사회의 관점에서 묘사하며 자부심을 느낄 정도이다. 145

 

키르케고르는 사회가 우리에게 객관적이고 전형적인 인간이 되도록 압박하므로 우리는 이것을 뚫고 자신의 실존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는 진정하지 않는 자아가 마치 인간의 전부인 것처럼 제시한다고 야스퍼스는 주장한다...이와 비슷하게 니체도 사회의 정형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속물적이라고 표현했고, 사르트르는 진정하지 않은인간에게나 유효한 역할혹은 의무라는 식의 사회적 개념들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실존주의의 주장에 실체를 부여하는 관계들을 구분해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46-7

 

그릇된 동조의 표시는 우리의 사회적 경험에서 매우 명백했지만, 그것을 낡은 개인사회의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성원과 대비하여 기껏해야 신민 혹은 하인의 역할이라 묘사할 수 있다. 149

 

신민은 이론적으로 좀더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역사적으로나 현대의 미개발국에서는 아주 흔한 경험이기도 하다. 현대 유럽과 미국에도 하인의 경험이 훨씬 더 자주 기록되긴 하지만, 여전히 신민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듣고 있지만, 정도는 서로 다르게 우리의 다수는 공적인 활동의 패턴이 결국 사적인 욕망과 거의 상관이 없다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개인사회의 구별에서 오는 주된 현대적 힘은 바로 이러한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신명을 유지하면서도 반복해서 진심으로 사회의 목적들을 신봉하는 척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인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150

 

구성원뿐만 아니라 신민과 하인도 있다면, 이제 반역자뿐만 아니라 망명자부랑자도 있다. .,,혁명가개혁가 혹은 비평가 사이에 분명 중대한 구분을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가와 비평가는 내가 이제까지 내놓은 정의에 의하면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삶의 측면에서 이런저런 점을 바꾸려고 하는 진실한 열망은 그 삶의 일반적인 가치들에 대한 충성과, 개혁가들과 비평가들이 일상적으로 고수하려 하는 사회의 본질적인 연속성 내지 통일성과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혁명가는 개혁가나 비평가가 결국에는 그 사회의 현존하는 형식 내에서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정한 사회의 구성원 의식이 없다. 151

 

현대 사상에서는 부랑자의 조건이야말로 사회 속의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기색도 보인다. 인간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사람은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고, 특정한 사회적분위기를 전제하면 심지어 굳이 다른 척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순응과 반항, 봉사와 망명은 모두 부적절하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변화를 위해 싸우지 않으며, 당장의 편리함을 위해서 어떤 주인에게든 봉사하고 어떤 봉사를 하건 원칙이 아니라 편리에 따라 할 뿐이다. 부랑자가 확신하는 것은 부랑자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의미 없는 의미를 위해 스스로를 죽이며 오로지 중요한 것은 자신밖에 없는 상황, 그것도 의미 있는 자신이 아니라 단지 그저 살아가는 유기체 자체만 있는 상황에서도 의미가 있는 척하는 바보라는 것이다. 155

 

 

볕뉘. 

 

1. 뭉뚱그려 요지위주로 보다가 마음이 걸린다.  기나긴 혁명의 1부의 개인과 사회는 봐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결론으로 튀기보다는 , 마르크스주의와 문화에서도 용어에 대한 설명을 먼저 짚고 가는 것, 그리고 그것이 본론 강독에 유연성을 발휘하게 하는 마력같은 것이 있다. 제임슨이 언제나 역사화하라는 문구를 결론이나 매듭으로 지시한다면 저자는 말하고자 하는 핵심어에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짚어준다. 결론이나 쓰임새가 어떨지 비교할 수 없지만, 일단 유용하고 실용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수고를 아끼는 것은 결코 제것이 될 수 없다는 면에서는 제임슨의 방식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2. 우리는 무심코 개인과 사회로 나누어본다. 이분법적 사고다. 하지만 그 사이 구성원과 반역자, 망명자, 신민, 하인, 부랑자로 그 사이를 다시 짚어본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은 하인이나 부랑자의 삶을 살기에 딱 알맞다고 말이다. 얼마나 불쾌한 사실인가. 체제와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다른 삶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그저 하루를 살아지는 것이지 살아갈 궁리를 나누지도 못하는 처지임을 감안한다면 맞는 말이다.

 

3. 개인, 사회, 사회적인 것 들 사이 여백을 더 선명히 해보는 것을 통해서 어쩌면 지금 시대를 견디고 있는 나를 더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여백들이 백지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들을 무의식중에 그렇게 압박하고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들일 것이다. 개인을 발라내고 색깔을 칠하고 돋보이게 할수록 점점 더 외로워진다는 모두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돋보이는 사이 당신의 연대감은 같은 속도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자존감은 공동체나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사이 구성원의 입장에서, 망명자, 혁명가, 개혁가, 비평가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그 간극을 매워보는 상상의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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