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먹구름이 간간히 비친다. 먹구름은 달을 품고 달을 여는 일을 되풀이 한다. 바람의 조짐이 수상하다. 천천히 몸을 연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바람이 몹시 짙은 날. 조금은 두툼하게 챙겨 나선 주로엔 산책나온 이들이 적다. 서녘엔 별이 드러내고 더 감청인 구름들이 더 짙어지고 있다. 몸에 땀의 기운이 번질 때, 하늘은 옅은 주황을 먹고 있다. 하늘의 절반, 검정 먹구름은 간데 없고 옅은 주황의 기미가 완연하다.

약간의 허기를 간직하는 식사처럼 땀의 갈증이 필요한 날들. 몸은 늘 정직하다. 몸은 긴장을 먹고, 웃음을 머금고, 바램을 먹고 물리적 시간에 바래고 여유의 출입증으로 요구한다. 눅눅해지고 축축해진 몸. 그 몸의 혹사가 빚어낸 순환고리들.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솜이불같은 몸에 뽀송한 땀햇살을 넣다. 그래야 물기가 빠지고 땀한잔의 요기는 몸의 호사를 낳는다.

구름과 달의 숨박꼭질을 보다나니 별들은 더 초롱초롱하다. 일용할 땀들이 반짝인다. 마음들의 행간을 살피다가 잠들다. 철학-심리학-뇌-마음-몸의 변주가 즐겁다. 물론 땀의 후유증으로 꾸벅꾸벅 주황으로 졸긴 하였지만 동원된 근대의 그늘을 마저 살피다가 잠든다.  4k 30'
 


뱀발.  끊임없이 소식들은 퇴행을 거듭한다. 구의회, 구의원을 없애겠다는 폭력들은 사대강만큼이나 일상적이다. 마치 유행처럼 폭압들은 일상을 매운다. 꿈 속에 사랑하는 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의 놀라움만큼 일상이 소스라치게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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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0-04-29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무척 스산하더군요. 바람에 비에...몹시도 곤혹스런 나날입니다. 잘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여름을 찾아야겠어요.
 

 

 

  

 

 

 

 

 

 

 

  

 

------굳이 볼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굳이 보신다면!-------



죽음, 체념, 포기...우리는 늘 좋은 것만 삶에서 발라내려 한다. 그리고 좋은 것만 얻으려하기에 지금을 살지 못한다. 지금을 살지 못하니 늘 내일에서 그것을 채우려고만 한다. 포기가 얼마나 강렬한 유혹인지? 체념이 얼마나 희망인지? 절망의 바닥이 얼마나 화려한지 조차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삶이 숨쉬는 것만큼 죽음이 숨쉰다. 

공포도 두려움도 그러하단다. 욕망이라는 것도 말이다. 나란 놈이 얼마나 추잡스럽고 번잡스러운지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여기저기 널을 뛰고 있는지? 얼마나 안위만 고집하는 놈인지? 얼마나 자존심만 버리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 애써 추스리면 추스릴수록 추스리기가 어렵다. 나란 정체성이 이렇다고 규정짓는 순간, 나는 달아난다. 한심하구, 하루에도 수백번씩 더하거나 좀더 채우려고 발버둥거릴 뿐. 그대로 가엾게 보질 못한다.   

나는 사람을 가린다. 편애를 하며 겉으로 그렇지 않은 척, 그냥 편애를 한다라구 어쩌라구. 그냥 그뿐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마치 공평한 것처럼. 편애한다. 그렇지만 편애의 농도나 양을 줄이려 한다. 편애가 조금씩 나눠지면 좀더 즐거움이 더 클까?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내 사랑이 뚝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소유할 애정의 몫이 줄어들까봐 걱정한다. 그 세속이 나다. 그런데 어쩌라구.

허기가 시작되자마자 식욕은 생기는 것처럼 나란 놈을 비우면서 너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나의 허접의 빈 그림자를 채우거나 매꿔줄 이가 너란 사실을? 그것으로 치부되던 것들이 조금씩 너란 끈으로 나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온전히 허접같은 나를 빈 구멍 그대로 인정하면서부터는 아닐까? 

그래서 어쩌라구?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문제, 사회와 연루된 인식은 별도로 이야기하자구. 더 할말들이 많지만 그에 앞서 나만 이야기해보자고 한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자유라는 나무는 체념과 죽음, 절망을 거름으로 자란다. 체념을 온전히 맞딱드리거나 받아안을 때, 매일 죽음이 맺는 강열함, 포기의 저편에는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지혜를 준다. 두려워하거나 돌아가려하지 말라고 한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삶밖에 없다. 삶의 너머를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거짓이다. 삶의 바깥을 이야기 하는 것은 허위이다. 삶만 생각해보자고 한다. 삶을 그르친 나를 중심에 넣은 사유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삶은 없고 살아지는 삶, 나만 이야기하고 나의 그림자엔 시선조차없는 앎. 그 앎을 불사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상누각의 탑을 쌓은 기초인 나는 없다. 그 잘난 체 하던 나는 없다. 별볼 일 없는 나만 있다. 별볼 일 없고, 덧칠하지 않는 날것의 나의 바닥을 들여다본 순간. 너가 들어선다. 너의 하루가 궁금하고, 너의 마음이 궁금하다.

뱀발.  

1. 처세나 명상, 그저 배부른 사람들이 말하는 도나 선, 덕으로만 치부한다. 그 책들이, 그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뒤에서야 그 빈자리를 통해 그를 느낀다. 나의 삶에서 그는 없었다. 삶의 안쪽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말이 궁금하여 이것저것을 집어든다. 삶의 바깥만 다루는 앎들을 보다가 삶의 안쪽을 다루는 이야기를 폄하하다가 소스라친다.  

2. 많은 이들이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앎에 얽매여 단 하루도 온전치 못하다. 많은 이들이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단 한시간도 단일초도 혁명하지 않는다. 

3. 도마위에 올리고 싶다. 삶은 계란이니, 장조림을 하든 안주든, 밥반찬으로라도 올리고 싶다. 삶은 양념이 아니니, 아마 거기엔 뭔가 버무려질지 모른다. 이데올로기인지 이념인지 김수영인지 백석인지 ...지식인들은 삶을 발라내고 제 원하는 것만 안주로 올려놓아...그 많던 지식인들이 삶에 잡혀 먹혔는지도 모른다. 김수영의 마누라도 발려내지고, 뜨거운 일상마저 발려내졌는지도 모른다. 삶을 먹고 싶다. 삶은 계란도, 빛바래 말랑말랑해진 삶도 먹히고 싶다. 삶이 횟감처럼 쳐진다면 아마 혁명이란 안주도 꿈틀거릴지 모른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러셀의 나만이 아니라 너도란 책을 읽을지도 모른다. 

4. 어젠 '포기'를 주제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뜨뜻미지근한 모임을 푸념하며 삶의 거죽을 한꺼풀 벗겨내어서 아린, 서로 아린 만남의 될 수는 없는 것이냐고 한다. 결빙이전의 미적지근한 커피같은 관계란 뭥미라며 헛소리를 해본다. 회색으로 삶을 저당잡히지 말고, 있지도 않는 진보를 마중나간다고 하루를 늘 까먹으며 사는 이들. 지난날의 미련을 영광삼아 집요하도록 권력과 명예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이들. 명예와 권력에 삶을 까먹는 이들. 이념에 사로잡혀 단 하루도 즐겁지 않은이들. 

5. 푸념들이 줄을 선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내 마음들이 줄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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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홀로행복이 아닌 서로행복론으로 다가서기??
    from 木筆 2010-05-14 13:42 
    행복한가? 행복에 갇히다보면, 행복의 지침서를 보면 행복의 길이 보이는가? 행복의 길이 나를 열어 젖히는가?  그 행복의 길이 부푼 풍선처럼 머리의 위안만 되는 것은 아닌가? 행복안내서가 한결같이 나를 빵빵하게 만들고, 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기획이 나만의 행복을 전제로 해서 애초 너는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닌가? 행복 지침서는 너를 배제하였으므로 오로지 나에 대한 문건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처음부터 서로행복을 기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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볍씨 한말과 고등어 한손 그리고 난초 한촉
 -입방미터, 평, 마지기, 킬로그램 과 몸말에 대한 관심 



연구자나 조사자, 취재자의 입장에서 보는 시선은 맥락이나 습관화된 몸말에 친근하지 않다. 식민지의 시선처럼, 원주민을 보듯이 데이터로 말을 해내지 못하는 일상에 대해 불쾌하다. 그들은 취재자나 연구자, 조사자의 말로 번역해서 들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면 알고싶어하는 것들이 데이터나 번역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몸말에 응축되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 더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양식있는 학자라면 뒷그늘에서 열심히 분석해내려고 전전긍긍할지 모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정보가 있는 그 몸말에 다른 것을 입히거나 더하여 유통되거나 소통되는 것이 아니다. 그 몸말을 해체해서 알아듣기도 어려운 데이터로 만들어 놓아 몸말은 유통될 수조차 없다.

한마지기가 몇평일까? 한마지기가 몇 입방미터일까?  고등어 한손은 몇 그램일까?
 
어느 쪽이 정보가 많을까? 말을 섞고 나누고, 물건을 사고 팔고 할 때, 저자거리에서 상황을 고려해보면 어떨까? 아마 한마지기엔 호남과 경상도가 다르다고 한다. 볍씨 한말을 가지고 뿌릴 수 있는 논의 크기와 지역의 차이란 정보를 가지고 있다. 고등어를 파는 입장과 사는 입장, 그리고 한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정보다 담겨있다. 그리고 난초를 구하고 싶은데 몇 그램 주세요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표준화를 빌미로 거래를 일방적으로 한다는 빌미로 살아가거나 나누거나, 주고받는 관계가 돈의 거래로 일방화된 것은 아닐까?

시장에서 세는 단위가 생명력이 긴 이유는 현실성과 관계성이 녹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현장에서 생산되거나 나눠지는 말은 살아있다. 군더더기도 없으며 환원된 구석도 적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분석해내는 말이 아니다. 주고 받고 나눌 수 있는 생생한 말이자 압축적 정보가 스며있는 것은 아닐까?  계량화하고 표준화하는 단위는 대량유통에는 적합한 일이겠지만, 그 관계에는 사람의 손맛이나 정나미가 없다. 물건을 매개로 이어지는 관계의 잔가지를 모두 잘라버린 이유는 아닐까?

 

표준어와 지방어

마을 단위의 말들, 산을 넘기 못하는 말들에는 역사도, 사연도, 관계도 고스란히 담겨있을지 모른다. 산에 길을 내었다고 해서 그 관계, 역사의 맥락을 불태우는 짓은 과연 합당한가? 삶이 있다면 그 관계를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말들이 생길 것이다. 돈으로만 환원되어 움직이고 대화를 나뉘는 관계가 아니라면, 동선이 겹치고 나눠지고 관심사, 그 공간을 풀어갈 지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다른 시선과 다른 동선이 겹치다보면, 그것을 쉽게 풀어나눠야할 말들이 생길 것이다. 누구나 소통의 단위, 관계의 단위, 삶을 압축적으로 풀어내는 삶의 말, 몸말들이 생겨날 수 있다.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나 정보를 담뿍 담는 말들. 관계를 발생시키는 언어들. 추상이나 관념이 담겨있는 언어가 아니라 몸말, 가슴말로 대화가 채워진다면 ... ...

 
표준화와 계량화의 독주는 아직 한옥의 치수단위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시장을 점령하지 못했다. 지방어를 말살시키지 못했다. 산과 강, 마을의 삶들 마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표준어를 배우는 것보다 지방어를 배우는 것이 미묘한 정서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지름길일 수도 있다. 사람사이의 교감의 수준을 그 산과 강의 곡선을 닮아 자연스러움을 전달할 수 있는 사교의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꾸 변두리로 몰아버리거나 부끄럽게 하는 전도된 문화는 여전히 서울 중심, 경기 중심의 문화를 재생산해나가는 저변으로 기능하는지도 모른다. 정말 분권을 말한다면, 자치를 말하고 싶다면 정규과정에서 지방어로 대화하는 법, 그 뉘앙스, 역사 문화적 맥락, 앞으로의 의미, 사교의 배경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될지도 모른다.

 
지방어를 부끄러워하는 서열의 반의식, 쓰지 말아야할 언어로 치부하는 부모의 편견, 가르치면 되지 않는 제도권의 경직성, 다른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실, 마을은 없고 서울만 가슴에 들어앉은 현실은 모두 표준어와 지방어의 서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의 말이 정서도 뉘앙스도, 역사적 맥락, 사회적 맥락을 담는다고 하면, 새롭게 소통되는 몸말들이 그 마을의 색깔을 담는다면 지방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할 때가 올 수 있을까? 요원하겠지만 말이다.


데이터와 몸말, 그리고 학문

표준화, 표준어 세대가 겪는 곤혹스러움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어떤 나라엔 컵 등 용기에 눈금표시가 되어있다. 어디에 가나? 눈금표시가 합리적인가? 배우는 속도는 어떠한가? 머리 속의 말에만 익숙한 세대. 한 소끔이, 한 되를 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세대, 한꾸러미, 한 바리의 의미를 몸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문제풀이로만 느끼는 세대. 끊임없이 암기하고 잊어버려야만 하는 세대. 요리를 배우며 끊임없이 계량스푼과 용기의 크기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세대. 우리는 어쩌면 머리말만 가득찬 도통 가슴말이나 내장말, 몸말을 모르고, 끊임없이 머리말로 환산해야만 이해하는 세대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법전처럼 책 속에 갇힌 말만 난무하고, 열마디 가운데 일곱마디를 느낄 수 없는 언어로 치장하는 전문가의 말의 체계는 어떠한가? 몸말이 소통될 수 없고, 설교의 기도문과 암호문으로만 무소통하는 사회는 어찌된 일일까? 현실에 녹아내리지 못하는, 현실에 감응하지 않는 가방끈은 별반 소용이 없다. 더구나 가방끈을 빌미로 현실의 몸말을 무참히 뭉게버리는 시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서 꾸미듯 현실의 음지나 그림자를 관통하는 몸말을 의식조차 않는 얕은 앎의 소유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와인마시는 법과 종류가 교양인척하는 분위기는 어떠한가? 정작 와인의 종류와 와인마시는 법에 대해서는 와인업계 종사자나 종업원보다 많이 알겠는가? 와인의 경계를 교양으로 응고시키는 어리숙함은 별반 술맛을 즐기는데 도움되지 않는다. 술맛을 음미하는데는 몸과 마음을 비우는 편이 가장 빠르다. 앎이 맛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책속에 갇힌 말과 살아있는 말의 섞임(ing)

 

듣고 싶은 말과 들리는 말(ing)

 
고민의 자장이 들리는 거리, 생각이 들리는 범위의 마을 사람들이 있다면 듣고 싶은 말들을 끊임없이 구걸하지도, 가까운 곳도 살리지 못하는, 고민에 귀기울여 지는 범위가 있겠다. 멀리 유명세나 권위의 말을 구걸하거나 약 삼아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가까운 고민의 범위 안에서 들리는 일상을 섞을 수 있는 영역에 있다면, 얼마든지 앎이나 관심은 증폭되면서 자랄 수 있다. 어린이에서도, 동네가게 아저씨에게도....강의를 부탁할 수 있다. 정녕 부족한 것은 삶의 고민을 섞을 수 있는 자세나, 마음의 태도, 얻고 싶은 것이나 알고 싶은 것에 대해 제대로 고민을 해본 것인지?  

알아서 서로의 생각정원, 마음의 정원을 넓힐 수 있는지에 대한 소통은 있기나 한 것인지를 먼저 짚어보아야 한다. 유명한 것도 좋지만, 너무 찾다보면...유명함으로 인해 정작 얻지 못하는 시선들...빠져나가는 시선들....어쩌면 똑같이 그 유명의 시선만 찾게 될지 모른다. 유명의 강도를 점점 높이는 우려에 빠질 수도 있다. 그 강렬한 단맛으로 향하기만 할지 모른다. 깊은맛, 그 고비를 함께 넘어섬을 가정하지 않으므로 끊임없는 반복....서로 달라지지 못하는 강연바라기, 앎바라기....그래서 머리말에 별반 쓸모없는 다른 단어를 꽉꽉 주입해넣는 상황에 다다를 수도 있다.

 
머리말도 중요하겠지만, 옆에 있는 가슴의 말을 꺼내고 섞고, 몸말을 만들려는 몸짓, 삶의 고민을 내어놓고, 다른 이의 고민의 타래를 엉키는 일들.....모임의 얼킨고민들이 섞이다보면 모임의 말이 생기지는 않은까?  정작 중요한 것은 모임이 뱉어내는 머리말이 아니라 모임이 옹알이하는 몸말들이다.  우리모임은 하고싶은 말, 뱉고 싶은 말들은 있는가? 아하면 어하는...그리고 그 말에 서로는 관계되어 있는가?


맺음

 
단위가 호명되고 불려진다거나,  일머리를 통해 몸의 켜로 거듭난 말들을 살려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생하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가 아니라 정보 소통의 속도와 그로 인한 관계의 회복, 아래로만 향하는 시선의 회복에 가능성이 있기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정보와 시선을 회복하는 일, 그리고 그 말들을 살리고 그로 인해 소통이 넓어지는 일은 관료적 냄새도 한결 줄이기 때문이다. 법조문이나 학문의 언어가 이런 언어나 단위를 중심으로 재번역된다면, 법률행위의 추상어들은 별반 발붙일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 말들은 정말로 현실의 이해수준이 아니라 저 꿈나라에서 춤추는 언어이기때문이다.

 

뱀발. 

 
1. 몸의 말을 만난다. 묻는 말과 대답하는 말의 간극이 있다. 계량화되거나 수치화된 말을 요구한다. 기록하기 좋은 말들을 골라낸다. 대답하는 말은 어떤가? 몸의 켜로 녹아있거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단위의 말들이다. 이것을 데이터로 풀어내는 일들은 학문을 하는 유용성은 있겠지만, 압축적인 정보를 갖는 말들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나을지 모른다.

2. 이렇게 책에 갇힌 말로 *부려대는 스스로가 밉다. 하지만 어쩌랴. 수준이 그러한 것을 말이다. 하지만 저편의 언어가 있다는 자각과, 그 무게에 대해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과 아파한다는 것에 위안을 던져본다. 던지다보면 던지다보면 말들도 저쪽 말들로 기우뚱하지 않겠는가?  

3. 지난 토요일 일터일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데이터로는 도저히 알 수 없던 일들이 그들은 몸으로 각인되어 있다. 데이터에 집착하였다면 도저히 풀 수 없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심결에 지나가는 스치는 말들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을까? 사실만 알려고 해서 말하려는 박자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거나, 마음의 진입장벽을 두는 일들도... ...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생각만 들낙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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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르바에 대한 소회
    from 木筆 2010-06-11 09:14 
    0. 지난 기억의 단편들을 다른 이의 말들에서 찾는다. 모임의 말미쯤 중동난 흔적들이 어렴풋이 맥락을 잡는다. 먼댓글로 이은 개인적인 흔적도 생각나질 않았는데, 지금 다시보니 몸으로 뱉은 말들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마음도 생각도 울타리를 갖는 것이고, 그 정원이 넓어지는 것은 머리의 욕망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어쩌면 손, 발의 영역이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손과 발, 그 몸의 영역이 새롭게 피거나 자랄때, 그 생각도...꿈꾸는 마음도 지평
  2. 110413 한 일곱번쯤 너(-나)와 몸이 겹친다면
    from 木筆 2011-04-14 11:10 
    목련이 익어 유성처럼 툭툭 떨어질 듯 싶다. 맑스의 자본론 제1장을 읽는다.20아마포=1저고리를 놓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이 얘기도 저 얘기도 한참을 이야기한다. 가치형태에 대한 모든 배려를 하는 듯이, 산은 이야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나무들 꽃들에 대한 수다다. 그러다가 개인적인 생각을 툭툭, 정작하고 싶은 이야기는 압축을 해놔서 몇번이고 되돌이켜 읽지 않으면 빗나갈 정도로 해놓았다 싶다. 작은 고개에서 풍경을 보고 쉴 즈음에 다
 
 
파란여우 2010-04-2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중심', '서울기준'이 '서울권력'으로 거듭 남을 종종 목도합니다.

여울 2010-04-26 13:13   좋아요 0 | URL
근친관계의 무한생산이 무섭군요. 아이들의 언어에, 몸에 배여있는 일상을 넘어서 있어 많이 불편합니다. 너무...
 

 

아침, 눈발이 내리는 줄 알았다. 꽃눈이 날리고 쌓인다. 모임들도 겹치고 누적된다. 마음을 흔들어 보려 말틈 사이를 들어가본다. 말틈 사이에 마음을 넣고, 시간을 넣어보고, 삶의 실낱같은 향기를 보내본다. 점으로 만나고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의 농도가 진해지거나 고민의 온도가 높아지거나 일상들이 조금이라도 자라면 좋겠다. 

나눈 마음들을 가져와 품 속에 넣는다. 마음갈피에 넣어본다.  

 

 

 

 

 

 

 

뱀발. 바쁘다. 몸이 축이 난다 싶다. 꽃은 떨어지고, 생각들은 자라지 못하고 건조한 기후에 그대로 말라버리는 듯하기도 하지만....꽃들의 여운을 따라..마음들의 여운을 따라...일상을 좀더 겹치게 하고 싶은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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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오는 밤....
    from 木筆 2010-04-22 01:23 
    일터일로 여러 곳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금에서야 이 자리에 섭니다. 비는 촉촉히 떨어지고, 꽃잎도 떨어지고......일터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꽃들이 정말 화사하게 조팝나무부터 철쭉, 목련, 개나리...벚꽃,..매화....진달래....아마 이런 합주나 변주들을 평생토록 목도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장관일 수 있다고....자꾸 말하니 푸념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아마 꽃에 취하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