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볼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굳이 보신다면!-------



죽음, 체념, 포기...우리는 늘 좋은 것만 삶에서 발라내려 한다. 그리고 좋은 것만 얻으려하기에 지금을 살지 못한다. 지금을 살지 못하니 늘 내일에서 그것을 채우려고만 한다. 포기가 얼마나 강렬한 유혹인지? 체념이 얼마나 희망인지? 절망의 바닥이 얼마나 화려한지 조차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삶이 숨쉬는 것만큼 죽음이 숨쉰다. 

공포도 두려움도 그러하단다. 욕망이라는 것도 말이다. 나란 놈이 얼마나 추잡스럽고 번잡스러운지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여기저기 널을 뛰고 있는지? 얼마나 안위만 고집하는 놈인지? 얼마나 자존심만 버리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 애써 추스리면 추스릴수록 추스리기가 어렵다. 나란 정체성이 이렇다고 규정짓는 순간, 나는 달아난다. 한심하구, 하루에도 수백번씩 더하거나 좀더 채우려고 발버둥거릴 뿐. 그대로 가엾게 보질 못한다.   

나는 사람을 가린다. 편애를 하며 겉으로 그렇지 않은 척, 그냥 편애를 한다라구 어쩌라구. 그냥 그뿐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마치 공평한 것처럼. 편애한다. 그렇지만 편애의 농도나 양을 줄이려 한다. 편애가 조금씩 나눠지면 좀더 즐거움이 더 클까?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내 사랑이 뚝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소유할 애정의 몫이 줄어들까봐 걱정한다. 그 세속이 나다. 그런데 어쩌라구.

허기가 시작되자마자 식욕은 생기는 것처럼 나란 놈을 비우면서 너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나의 허접의 빈 그림자를 채우거나 매꿔줄 이가 너란 사실을? 그것으로 치부되던 것들이 조금씩 너란 끈으로 나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온전히 허접같은 나를 빈 구멍 그대로 인정하면서부터는 아닐까? 

그래서 어쩌라구?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문제, 사회와 연루된 인식은 별도로 이야기하자구. 더 할말들이 많지만 그에 앞서 나만 이야기해보자고 한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자유라는 나무는 체념과 죽음, 절망을 거름으로 자란다. 체념을 온전히 맞딱드리거나 받아안을 때, 매일 죽음이 맺는 강열함, 포기의 저편에는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지혜를 준다. 두려워하거나 돌아가려하지 말라고 한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삶밖에 없다. 삶의 너머를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거짓이다. 삶의 바깥을 이야기 하는 것은 허위이다. 삶만 생각해보자고 한다. 삶을 그르친 나를 중심에 넣은 사유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삶은 없고 살아지는 삶, 나만 이야기하고 나의 그림자엔 시선조차없는 앎. 그 앎을 불사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상누각의 탑을 쌓은 기초인 나는 없다. 그 잘난 체 하던 나는 없다. 별볼 일 없는 나만 있다. 별볼 일 없고, 덧칠하지 않는 날것의 나의 바닥을 들여다본 순간. 너가 들어선다. 너의 하루가 궁금하고, 너의 마음이 궁금하다.

뱀발.  

1. 처세나 명상, 그저 배부른 사람들이 말하는 도나 선, 덕으로만 치부한다. 그 책들이, 그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뒤에서야 그 빈자리를 통해 그를 느낀다. 나의 삶에서 그는 없었다. 삶의 안쪽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말이 궁금하여 이것저것을 집어든다. 삶의 바깥만 다루는 앎들을 보다가 삶의 안쪽을 다루는 이야기를 폄하하다가 소스라친다.  

2. 많은 이들이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앎에 얽매여 단 하루도 온전치 못하다. 많은 이들이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단 한시간도 단일초도 혁명하지 않는다. 

3. 도마위에 올리고 싶다. 삶은 계란이니, 장조림을 하든 안주든, 밥반찬으로라도 올리고 싶다. 삶은 양념이 아니니, 아마 거기엔 뭔가 버무려질지 모른다. 이데올로기인지 이념인지 김수영인지 백석인지 ...지식인들은 삶을 발라내고 제 원하는 것만 안주로 올려놓아...그 많던 지식인들이 삶에 잡혀 먹혔는지도 모른다. 김수영의 마누라도 발려내지고, 뜨거운 일상마저 발려내졌는지도 모른다. 삶을 먹고 싶다. 삶은 계란도, 빛바래 말랑말랑해진 삶도 먹히고 싶다. 삶이 횟감처럼 쳐진다면 아마 혁명이란 안주도 꿈틀거릴지 모른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러셀의 나만이 아니라 너도란 책을 읽을지도 모른다. 

4. 어젠 '포기'를 주제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뜨뜻미지근한 모임을 푸념하며 삶의 거죽을 한꺼풀 벗겨내어서 아린, 서로 아린 만남의 될 수는 없는 것이냐고 한다. 결빙이전의 미적지근한 커피같은 관계란 뭥미라며 헛소리를 해본다. 회색으로 삶을 저당잡히지 말고, 있지도 않는 진보를 마중나간다고 하루를 늘 까먹으며 사는 이들. 지난날의 미련을 영광삼아 집요하도록 권력과 명예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이들. 명예와 권력에 삶을 까먹는 이들. 이념에 사로잡혀 단 하루도 즐겁지 않은이들. 

5. 푸념들이 줄을 선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내 마음들이 줄을 선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홀로행복이 아닌 서로행복론으로 다가서기??
    from 木筆 2010-05-14 13:42 
    행복한가? 행복에 갇히다보면, 행복의 지침서를 보면 행복의 길이 보이는가? 행복의 길이 나를 열어 젖히는가?  그 행복의 길이 부푼 풍선처럼 머리의 위안만 되는 것은 아닌가? 행복안내서가 한결같이 나를 빵빵하게 만들고, 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기획이 나만의 행복을 전제로 해서 애초 너는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닌가? 행복 지침서는 너를 배제하였으므로 오로지 나에 대한 문건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처음부터 서로행복을 기획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