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한마지기, 고등어 한손 그리고 난초 한촉(酌)

목련이 익어 유성처럼 툭툭 떨어질 듯 싶다. 맑스의 자본론 제1장을 읽는다.  

20아마포=1저고리 

를 놓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이 얘기도 저 얘기도 한참을 이야기한다. 가치형태에 대한 모든 배려를 하는 듯이, 산은 이야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나무들 꽃들에 대한 수다다. 그러다가 개인적인 생각을 툭툭, 정작하고 싶은 이야기는 압축을 해놔서 몇번이고 되돌이켜 읽지 않으면 빗나갈 정도로 해놓았다 싶다. 작은 고개에서 풍경을 보고 쉴 즈음에 다가 톡톡 서문에서 봤던 얘기를 슬쩍 건들여놓는다 싶다.

등호 =는 산술의 등식이 아니었다. 물신의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보게 하는 다양할 것을 권면하는 장치는 아닌가?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보지 못하거나 뒷심이 부족해 결코 보지 못했던 추상적 노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뒷풀이엔 젊은 친구와 *보*당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첫강의보다는 나았다는 평으로 시작한다. 마지기가 수확기준이라는 이야기, 고등어한손처럼 도량형의 통일이 어쩌면 이렇게 몸말이나 느낌이 살아있는 말들을 죽이고 있다. 표준어와 사투리처럼 획일화의 문제점들에 대해 콕콕 짚어본다. 청년 맑스의 행간을 보며, 뭔가 통찰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에둘러 보이기도 하고, 이렇게 고전을 보는 재미는 요약본과 해설서의 번역과는 남다르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고전의 생명력이란 늘 전후시대적 맥락이 이해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잠깐 나오지만 그는 [좋은 삶]을 이야기했다. 그 이후에 번진 자유, 평등, 박애를 나눠 이야기하지 않았다. 앞집 형과 같은 이가 맥주한잔하며 [좋은 삶]에 대해 이야기는 표준어나 도량형이 통일된 회색톤이 아니었을 것이다. 들으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꿈적거리는 몸말이지 않았을까? 가끔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멋진 선배, 친구, 연인을 제대로 사귄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게 고전이야기를 보탠다. 그 점에서 맑스는 글감으로 보건데, 가슴이 따듯하고 두루두루 살필 줄 아는 친구이자 하고픈 말이 많은 친구는 아닐까?

한친구와 교육와 교양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진보는 가분수다. 머리만 큰. 당장만 관심이 있다. 헌데 시간의 길이에 바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래지 않으려면 방법은 없을까? 책읽는 인문학모임을 내심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닐까? 현안이 산적해있는데... ... 시간을 길게 잡으면 다들 문화, 교양,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에 쫓기고 머리의 의욕이 가슴도, 손발도 감당하지 못하는 체계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거나 감당하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당원이나, 단체의 회원을 그저 소비자처럼 개인으로 환원시켜 보는 것에도 한가지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서사적인 나, 이웃의 이웃, 이웃의 3승처럼 연결되어 있는 그물속의 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입을 시켜야 하는 개인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가? 머리말만 겹쳐는 것이 아니라 몸이 겹치고 겹쳐, 한 일곱번쯤 겹쳐야 친구의친구에게 진심이 동심원처럼 퍼지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이념이나 하고자하는 정치적 판단을 주입시켜서 당장을 끌고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관심을 둬야하는 것은 당원이 회원이 끌고 가는 아우라를 함께 봐야하는 것은 아닐까?

함께 느껴야 하는 가슴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이념과 정치적 양식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진보는 순수한 것이 아니라 순진하기 그지 없는 것은 아닐까?

제발 가입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것보다, 친구의친구의 아우라속에 몸의 겹침이 일곱번 있는 것과 어느 쪽이 회원가입율이나 당원 가입률이 높을까? 해보기나 한 것일까? 그런면에서는 다단계나 보험의 집요함은 벌써 과학과 철학을 몸으로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만 관심이 있어서 그렇지만... ...
 

[ 강독 조금 + ]

 


댓글(0)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성적에 목숨 거는 대학
    from 파란여우의 뻥 Magazine 2011-04-14 15:06 
     올해들어 카이스트에서 네 명의 대학생이 자살을 했다. 징벌적 등록금 제도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자가 죽는 것이 미안해서 교수도 죽었다. 카이스트는 영재들이 모인 학교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방식을 ‘미국식 명문대’ 로 지향하는 카이스트의 ‘강제된 경쟁’ 방식은 공감이 안된다. 미국대학이 세계대학의 롤모델로 이상적인 대상인가? 한국풍토에 맞는 방식이란 정녕 없단 것인가? 그렇다면 미국식 경쟁위주 교육이 대세라는 말인데 학문의 탐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