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스웨덴]

 

 스웨덴의 보육 시설 가운데 오늘날의 어린이집은 1900년대 초기의 아동수용소에서, 방과 후 학교는 작업장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사회변화에 따라 아동복지가 추구하는 내용과 기본 가치의 변화를 언어의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동 정책의 목적이 보호와 감독의 뜻을 지닌 ‘틸쉰tilsyn'에서 돌봄, 서비스, 교육적 가치를 복합적으로 담고 있는 ’옴소리omsorg'로 바뀐 것 역시 그런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93

 군나르 뮈르날은 [아메리카의 딜레마]1944와 [아시안 드라마]1968 등으로 유명하며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알바 뮈르달은 198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도시의 아니]1935, [여성의 두역학]1957 등으로 유명하다. 104

 스웨덴빈곤가족돌봄협회는 노동문제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약자들의 모든 생활 문제를 다루었다. 당시 이들은 ‘빈곤’의 개념을 ‘사회적 질병’으로 정의하고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이 병은 심지어 사회적 강자에게까지 전염될 수 있고, 이미 빈곤 상태로 전락한 시민들은 또 다른 시민에게 이를 전염시킬 수 있어서 결국 전 사회를 위협할 수 있다”라며 사회적 책임론을 강하게 피력했다. 120

 이바르 루 효한손은 노인들이 질병 혹은 노령을 이유로 익숙한 집을 떠나 ‘양로원’으로 옮기는 것은 지극히 비인도적 발상이라고 선언하며 재가 서비스의 당위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캠페인의 여파로 스웨덴 적십자사는 저학력 실업 여성을 동원해 초기에는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방문 서비스를 시행했다. 이후 적십자사는 이 서비스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재가 서비스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켰다. 123

 스웨덴 정부는 심각한 사회문제일수록 서둘러 정책을 도입하기보다는 이에 앞서 전국 실태 조사와 전문적 연구를 시작하는 관행이 있다. 재가 서비스 문제에서도 다년간의 조사 연구가 실시된 끝에 ‘모든 사람을 위한’ 사회서비스제도 도입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56년 노인 돌봄 정책에서 노인의 긍지와 자율권이 보장되는 다양한 서비스를 지원하는 정책이 마련되었고 재가 서비스와 노인을 위한 가사 도우미가 직업으로 인정되었다. 123 

 

 뱀발. 제도 자체보다 사회, 역사적 맥락을 주의해서 읽었으면 한다. 장애 및 여러꼭지는 메모를 해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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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차분함이라는 말에 표현되어 있는 촉촉함이란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피부감각의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숨결과 그 숨결의 물결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교실로 이미지화 되는 것이다. 40

 듣는 힘이 교실에 길러졌을 때 비로소 교실에서의 언어 표현도 풍부해지는 것이다.(수동적 능동성) 42

 배움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깊은 조심성’이라고들 이야기해 왔다. 배움에 대해서 언급한 동서고금의 모든 문헌이 배움의 본질을 깊은 조심성에서 찾고 있다. 자주성이나 주체성, 노력이나 의욕이 배움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44

 아이들 한명 한명에 대하여 교사의 신체가 열려 있지 않은 것이며 애초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고나 정서의 기복과 공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46

 시노하라씨는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인 이야기인 ‘단교통’, 서로가 통하는 ‘쌍교통’, 거절되고 차단되는 ‘반교통’ 그리고 서로 엇갈리는 ‘이교통’의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네 가지 교통에 비추어 보면 지금까지 교사가 안고 온 커뮤니케이션은 ‘쌍교통’을 이상화한 나머지 다른 세 가지의 ‘교통’을 소홀히 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쌍교통만을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중층성을 얇게 벗겨내고 ‘쌍교통’조차도 가볍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예정된 조화로 수습되는 것은 아니다. 65

 매주 두세 곳의 학교를 방문하여 약 10개의 교실을 참관해 왔으니 1천개가 넘는 학교를 방문하고 7천이 넘는 교실을 참관해 온 셈이다. 그것과 병행하여 10년간에 걸쳐 미국의 약 200여 개의 학교에서 1천에 가까운 교실도 관찰해 왔다. 돌이켜 보면 어떤 학교도 같은 학교가 없었으며 어떤 교실도 같은 교실은 없었다. 79

 수업연수의 목적은 수업에서 어려웠던 점과 재미있었던 일을 함께 공유하는데 있다. 우선 수업의 어디가 재미있었는가를 서로 이야기하는 일, 수업의 어디가 어려운가를 서로 공유하는 일, 그리고 서로 이야기하는 가운데에서 항상 아이들이 배우는 구체적인 모습을 부상시키는 일, 그러한 연수를 모든 교사들은 요구하고 있다. 92

 배움이란 교육내용인 대상세계(사물)와 만남과 대화이며 그 과정에서 수행되는 다른 아이들의 인식이나 교사의 인식과 만남과 대화이며, 새로운 자기자신과 만남과 대화이다. 배움은 세계만들기(인지적 실천)와 친구만들기(대안적 실천)와 자기만들기(자기내적 실천)의 세 가지 대화적 실천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배움의 삼위일체이다. 135

“활동적이고 협동적이며 반성적인 배움”을 하나하나의 단원으로 조직하는 것이 교육과정만들기라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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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퇴근길 ㅂㄹ재를 들러 임도를 산보하다. 그 많던 산딸기는 객들이 한웅큼씩 가져가 버린다. 한낮 꽃들은 벌써 몇순배를 돌고 칠월을 맞이한다. 이제 색깔도 고개를 넘어 내리막인 듯 가을로 향한다. 짙고 얕아진다. 1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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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평과 비난사이__반짝반짝 삼랄회(신랄~,발랄~,지랄~)
  - 신랄할 책한권, 발랄하여야하는 발제자, 지랄할 참여자(준비)
 


 - NL/PD 논쟁은 아직 유의미한가? 바라보는 이의 관점, 살아가는 이의 관점, 유지하고 있는 이의 관점, 현실에서 합이 가능한 지점은 무엇인가?
 - 지역의 전교조교사, 교사와 사회활동, 어떻게 나누고 세울 것인가?
 - 연구단지 노조 바라보는 이와 참여하는 이, 그리고 그 중간의 여백을 어떻게 채우고 보듬을 것인가?
- 시민단체 왜 권력감시만할까? 왜 이해는 생각지도 않고 가치가 주구장창인가?회원과 친밀도를 높이는 것은 불가능한가?
- 학생운동 과연 불가능한가? 할 수 있는 접점들에 대해 고민해보나?
- 주민운동, 풀뿌리, 나는 왜 풀이 아닌데 가능한가?
- 삶을 섞다. 따로 또 같이 살다. 어떻게 가능한 삶을 튕겨보다
- 공동체, 도시 또는 시골. 다 가능한가? 모두 가능하지 않은가? 왜, 무엇때문인가? 어떻게?의 문제인가?
- 월50만원으로 기획해볼 수 있는 활동에 대해? 얼마나 오래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의 아이디어는? 당신이 1년동안 해보고싶은 활동은?
- 운동을 섞다. 활동을 섞다. 함께 하고싶은 단체, 함께 기획해보고 싶은 꺼리들
- 왜 선거때만 되면, 지역은 지역다운 전략을 못쓰는걸까? 왜 선거때만되면 연대인가? 왜 선거전에는 다 남남일까? 왜 일상에서는 만나지조차 못하는가? 만나거나 섞을 수 있는 넛지는 없는 것일까?
- 국회의원 왜 줄어야 하나? 늘어야 한다.
- 왜 대학교수 줄여야 하나? 늘어야 한다.
- 소비보다 직접 생산을 장려하는 분위기라면 수강보다 직접 강의....작품....
 

** 위 꼭지 하나씩 신랄한 텍스트 하나. 중심에 있는 발제자, 그리고 지랄할 각오를 한 님들... 


2.

                            A4지 한장의 만남
( 일상과 삶이 녹아있는 만남 )
- 오시는 분들은 유명한분이나 아니나 달랑 한쪽만 준비해주세요. 글씨가 크든 적든 관계없답니다. 


- 내 인생에서 제일 설레일 때?
- 올해 여기 모임에서 가장 기쁜 날? 올해 가장 열받는 날?
- 가족이 합쳐진다면~, 민중의 집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귀농을 왜 생각해봤는가? 보는가? 왜 생각하지 않는가? 왜 가르는가?
- 가족? 당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홀로가족? 또 다른 가족-가족의 연대의 삶은 불가능한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 친구?
-   



 


3. 



백만원 받고, A4지 3장의 에세이  

- 당신의 삶과 주제를 걸어라, 무엇을 하고 싶은가? 도와주겠다. 진심으로 온몸으로~

 


4.

- 찾아가는 강연회시리즈는 가장 먼저 참*란 모임에서 시도한 것 같은데 다들 지적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 걸까?

- 글꼭지에 가장 먼저 0.을 쓴 것 같은데 다른 이는 왜? 0을 쓰는 것일까? 쓰기 시작한 것일까?

- 왜 여기 서재는 사회적이슈를 다양하게 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의 산실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신변잡기의 산실도 되지 못하는가? 사회적 이슈를 만드는 기술이 너무 없는 것은 아닌가? 물밑 연결망은 살아있는가? 공감하는 아픔이란 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공감하는 아픔의 경계가 서로 넓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왜 자유주의적 주부는 주제의 공론화를 꺼리는 것일까? 왜 농담에 까르르 함께하지 못하며 농담이 자라지 못할 정도로 진지한가? 가벼움은 왜? 섹시함은? 왜 디테일한 경망이라고 꼬리표를 붙여야 하는가? 왜 오프모임은 자라지 못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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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 대적하기 위한 무기라든가? 앎이 거느릴 해박함에 대한 유혹이라든가? 앎이 비교우위를 점하게 한다는 알량함때문은 아니다. 현실은 끊임없이 몸의 강박과 적대를 생산하기에 몸에붙은 앎이 유효한 무기라는 것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세상은 앎의 거드름을 피우는 이로 넘치고, 그런 우쭐이 횡행하기에 앎을 피력하는 것은 이들을 견제하기 적절한 방법임을 안다. 그런데 앎에 대한 충동이 생기는 것은 무지와 망각으로 인한 아픔때문이다. 그래서 강박처럼 앎을 기획해야겠다는 욕심이 이는 것은 아니다.  


 


앎이 그저 설계도처럼 여기저기 구획지어 수평면에 갖다 박아놓는 것이 아니라, 앎이 여기저기 막힌 광맥처럼 이어지지 않음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앎이란 것도 적절하게 품어 떡잎이 나고, 자라고 나뭇가지를 팔벌릴 줄 알고, 짙은 바람에 몸을 기우뚱 뉘기도 했으면 하는 바램때문이다. 앎이 당신을 점령에 휘하에 두고 내려보는 것이 아니라, 앎의 서로의 몸을 타고 올라 어깨동무도 할 줄 알고, 저기 보이지 않는 어둠을 챙기고 싶은 연유이기도 하다.

얕은 바람에도 예민하고, 능개비에도 촉촉히 스며들고, 햇살에 때론 장대비에 쑥쑥 자라는 맛이 있는 앎, 뿌리로 튼튼한 연대로 삼킬 줄 알아 하늘로 무장무장 커버리는 앎에 대해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앎이 때론 근육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사소한 것들과 조응하며 서로 키워내는 맛이 그립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앎의 욕심들이 짐짓 잘난체 하지 못하며 앎들이 서로 다양하게 크고 또 다른 그늘에 다른 앎을 키워내는데 도움줘야 한다는 나무와 숲의 변주도 기대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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