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 대적하기 위한 무기라든가? 앎이 거느릴 해박함에 대한 유혹이라든가? 앎이 비교우위를 점하게 한다는 알량함때문은 아니다. 현실은 끊임없이 몸의 강박과 적대를 생산하기에 몸에붙은 앎이 유효한 무기라는 것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세상은 앎의 거드름을 피우는 이로 넘치고, 그런 우쭐이 횡행하기에 앎을 피력하는 것은 이들을 견제하기 적절한 방법임을 안다. 그런데 앎에 대한 충동이 생기는 것은 무지와 망각으로 인한 아픔때문이다. 그래서 강박처럼 앎을 기획해야겠다는 욕심이 이는 것은 아니다.
앎이 그저 설계도처럼 여기저기 구획지어 수평면에 갖다 박아놓는 것이 아니라, 앎이 여기저기 막힌 광맥처럼 이어지지 않음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앎이란 것도 적절하게 품어 떡잎이 나고, 자라고 나뭇가지를 팔벌릴 줄 알고, 짙은 바람에 몸을 기우뚱 뉘기도 했으면 하는 바램때문이다. 앎이 당신을 점령에 휘하에 두고 내려보는 것이 아니라, 앎의 서로의 몸을 타고 올라 어깨동무도 할 줄 알고, 저기 보이지 않는 어둠을 챙기고 싶은 연유이기도 하다.
얕은 바람에도 예민하고, 능개비에도 촉촉히 스며들고, 햇살에 때론 장대비에 쑥쑥 자라는 맛이 있는 앎, 뿌리로 튼튼한 연대로 삼킬 줄 알아 하늘로 무장무장 커버리는 앎에 대해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앎이 때론 근육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사소한 것들과 조응하며 서로 키워내는 맛이 그립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앎의 욕심들이 짐짓 잘난체 하지 못하며 앎들이 서로 다양하게 크고 또 다른 그늘에 다른 앎을 키워내는데 도움줘야 한다는 나무와 숲의 변주도 기대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