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론은 단순할수록 좋다. 사람은 하늘이다처럼 한마디에 군더더기 근육은 없다. 한마디에 설레이고 쿵쾅거린다. 이론의 숲을 서성거리다가 그 길끝엔 안개로 자욱하다. 안개를 더듬어 더듬어 가다보니 낭떠러지다. 숨이 가빠지고 손발이 떨린다. 길을 되돌아 또 다른 길을 찾는다. 외롭다. 힘들다. 함께 걷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 저기~  인기척이 있지만 사람들은 없다. 

 

이론을 찾는다는 것이 애걸이다. 삶의 유한성을 이겨보려는 자만이다.  안달을 주체할 길이 없어 이론을 길을 접어든 것이 애초 잘못이다. 이론의 끈을 부여잡는 순간, 어느 순간 빛에 바래 삭아 사라질지 모른다는 감수를 해야한다.

 

중동난 이론의 끈을 몇가닥 수선한다. 쓸모를 가정하는 알량함이 배인다. 하지만 난 이 쓸모를 당분간 믿기로 한다.

 

2.

 

묘연한 이론을 버린다. 하나를 가정하는 이론을 버린다. 개인을 합리적주체라고 하는 이론을 버린다. 과정을 즐기지 않은 이론을 버린다.  저기를 집착하는 이론을 버린다. 하나가 아니라하며 다른 어느 것도 볼 수 없게 하는 몽매를 버린다.  아마 좋아하는 사람도 운동도 취미도 그러하듯, 몸에 맞는 이론이 있으리라.  먹는 만큼 소화하고 활력을 주게하는 그것이 있으리라.


3.

 

이제 이론의 숲을 하산하려한다. 별처럼 반짝이는 이들의 추억만 가진 채,  몸에 맞는 꽃한송이를 들고 간다. 달도 별도 반짝이는 밤, 산과 강을 지나 커다란 달덩이를 품고 간다. 삶은 짧다. 이론의 흐름에 쓸쩍 올라타 또 다른 색깔과 향기를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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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중 '욕망의 미시정치'는 거시적인 정치의 신화로 이루어졌던 맑스주의와 가족 내의 사생활로 이루어진 프로이트주의를 동시에 비판한다. 이것은 구체적인 삶의 욕망과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미시적으로 움직이며, 미시파시즘적 분리와 차별에 맞서 어떤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용기 있는 행동에 나서는가에 대한 그림을 그려낸다.

 

프로레타리아트의 형이상학적 신화가 아니라, 사회의 주변부와 가장자리에 있는 소수자와 접속과 변용이 만들어낼 색다른 움직임에 주목한다. 노동자 가장이 가정에 돌아와서 여성에 대해서 차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본주의와 색다른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것이며, 아이에 대해서 교육적인 면에서 권위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지식권력과는 다른 방식의 집단지성을 획득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에 대한 태도, 감수성, 지각형태가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재구축되는 삶이 바로 스피노자의 내재적인 역능의 차원을 의미한다.

 

47 공통성에 주목하는 후렴구들은 대부분 거시적인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질생성은 매우 미세한 삶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특이성 생산' 즉 '이질생성'의 차원은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구도가 욕망하는 주체성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주체들의 구체적인 움직임과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 또한 집단의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가 풍부하게 관계망을 생성할 수 있으며, 색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여부는 바로 이질생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공통성만을 강조하다보면 특이한 개개인들이 어떻게 움직이며 생산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원천이 신비한 부재의 고리로서 작동하게 된다. 그러나 가타리는 특이성 생산의 원동력을 미시적인 변용(=사랑)과 욕망의 움직임으로 보면서, 살아가면서 사랑하며 실천하고 욕망하는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본다.

 

73 가타리는 초기 프로이트의 입장을 더 발전시켜 무의식으로 세상을 설명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의 일환으로 욕망하는 기계 개념을 만들어낸다. 무의식은 더 이상 개인의 심리상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게 되며 현실에서 작동되는 욕망의 흐름, 관계망, 상호작용 속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타리는 욕망하는 기계는 결코 은유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이주체성이자 관여적 주체성을 의미하며 프로이트의 부분충동에 대한 혁신적인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부분충동은 유아기 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전체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합과 접속/연결을 달리 할 수 있는 기계가 된다.

 

86 가타리에게 비기표적 기호계의 차원은 무의식을 그려나갈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비언표적 기호에 주목하는 이유는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흐름, 관계망, 상호작용을 그려내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부엌이라는 공간을 생각해 본다면, 요리 매뉴얼이나 오가는 대화와 같은 언표적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의 흐름, 불의 흐름, 음식의 흐름, 쓰레기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흐름의 구도를 잡고 그려본다는 단순한 말의 차원이 아니라 말이 아닌 색다른 방식의 기호작용에 대해서 주목해볼 필요성이 생긴다.

 

89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신경증 유형의 가족 무의식을 통해서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가타리는 초자아의 작동방식이 신경증 유형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순된 메시지를 발신하는 이중구속의 상황으로 내몰고, 결국 분열증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사고한다. 정신분석의 해석, 전이, 가족주이라는 요소와 달리 분열분석은 탈영토화하는 욕망을 가진 집단분석을 위한 도구이다. 결국 프로이트가 가족무의식적 차원에서 세상을 설명하는데 그쳤다면, 가타리는 사회적 장에서 욕망의 집단적 투여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138 라이히의 성정치와 욕망의 미시정치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성정치가 성욕망의 억압을 벗어나려는 입장에서 서있지만 주체를 이미 노동대중으로 설정하고 있음에 반해, 욕망의 미시정치는 주체성 생산의 시각에서 욕망의 차원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139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왜 인간은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생각하는가?라고 서술하면서 당대 대중이 갖고 있었던 욕망에 대해 의문점을 던진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후에 라이히는 왜 대중은 억압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가타리도 역시 라이히의 문제의식과 동일선상에서 문제의식을 가지며, 예속에 대한 욕망의 이유를 탐색한다. 그러나 성억압이 제거되는 것을 통해서 권위주의적 질서가 붕괴되면 사회변혁이 이루어진다는 것보다 문제의식을 확장시킨다…”예속되기 위한 욕망은 무의식의 질서까지 들어와 있으며, 이러한 작동방식 때문에 욕망투쟁의 방향성은 무의식 해방과 주체성 해방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가타리의 문제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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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광인이 하나의 사건, 상황, 관계 등에 왜곡된 사고에 사로 잡혀 있다면, 정상인은 자동차, 아파트, tv, 육류, 상품, 화폐 등 여러가지에 대해 왜곡된 사고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정상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광인이 자본주의의 욕망을 정지시키고 재배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광인 되기는 소수자 되기의 기본적 구도를 가르쳐 준다.

 

17 소수자되기는 단순히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동물, 식물, 광석, 분자, 자연도 포함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의 도구가 되어 낮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의 처지가 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육식문명에 대한 반성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동물은 원래 무리를 짓고 광야를 누비던 존재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모품으로 전락시킨 동물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고 절박하다. 이러한 동물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뭇 생명에 대한 감성어린 교감과 그들과 비 언어형태로 관계맺기, 그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이 새로운 삶의 형태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17 하  소수자되기는 기존 통념에서 드러나는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걸고 나서는 역동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의 힘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차원을 열 수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사랑이 약속하는 새로운 생태적 삶이다.

 

18 인민의 진실한 욕망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자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욕망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 상 미래로 향하는 무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색다른 관계맺음이다.

 

20 하  무의식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관계망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개인이 지닌 매우 은밀하고 신기한 심리상태를 분석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어떤 관계맺음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에서 나올 수 있다. 무의식이 모든 곳에 깃들어 있다.

 

21중 무의식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가 새로운 관계망을 만드는 행동에 나서는 것, 예를 들어 경쟁관계가 아닌 호혜관계를 만들거나, 입시 경쟁을 중심으로 한 학교가 아니라 대안학교를 만들게 되면 색다른 관계망에 따라서 새로운 무의식이 만들어지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수성이 생겨난다.

 

21하 '관계망에 대한 배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망에 대한 배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거나, 별명이 있는 공간, 시간의 리듬 바꾸기, 새로운 관계맺음의 차원으로 기존 관계를 바꾸기, 물질과 에너지, 화폐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구상과 실행, 동식물과 독특한 관계맺기, 음악, 미술, 춤, 몸짓, 가면을 통한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관계망 만들기 등 공동체의 실험과 실천으로 새로운 무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미래를 향하고 있으며 늘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5중 사람들 사이에서 욕망의 흐름은 무의식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욕망의 흐름은 '바로너'라고 지목하거나 혹은 '바로 나만이'라고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어디에선가 '어느 누군가'가 될 수 있다. 공동체가 갖고 있는 강렬한 욕망의 흐름에 스스로 몸을 맡기거나 느끼며, 홀연히 등장하는 욕망의 주체성이 있다.

 

26하 누군가를 지명하고 호출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강렬함 속에서 새로운 주체가 나타나고 자율적인 행동양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정말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할 때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느냐'라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욕망이 갖고 있는 자율 능력을 평가절하하고 전체의 구도를 생각하며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결정권과 권한을 많이 주게 된다. 문제는 책임이라기보다는 주체성 생산이 가능할 만큼 그 공동체의 관계망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이며 그만큼 욕망이 강렬한가이다.

 

34중 공동체의 부분들이 자기생산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한 명이냐 두 명이냐 혹은 여러 명이냐의 차원을 떠나 바로 독자적인 자기 자신을 생산해 낼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이다. 여러 명이라도 자기생산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지 못할 수 잇고, 한 명뿐이라도 자기생산적인 기계를 갖고 있을 수 있다. 기계의 본질은 자기생산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34 하 공동체는 외부로 공동체를 확장하거나 외부를 배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늘 새로운 형태로 공동체 자체를 자기생산하는 것이 목표이며, 이러한 자율성이 기계적 자율성을 뜻하는 것이다. 도한 자본주의를 하나의 거대한 구조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잘 들여다보면 작은 기게부품들이 조립되고 연결되어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자본주의를 통째로 바꿀 수 없지만, 기계부품의 연결을 달리하거나 작동방식을 바꿔 자본주의를 고장 나게 하거나 색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35 자기생산은 스스로 집요하게 폐쇄되어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다양한 타자 관계 형태들을 유지하는 진화적이고 집합적인 본질체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제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40하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가 언어를 쓰지는 않지만, 춤, 후각, 무리짓기, 반복동작, 울음소리 들을 통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가타리는 동물들에게 도표의 기호화양식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이성의 존재로서가 아닌 욕망의 존재로서 존엄의 영역을 발견해낸다. 아이, 동물, 광인이라는 욕망의 존재들은 말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존엄하다.

 

41중. 똑딱거리는 시계소리처럼 단조롭게 반복되는 자본주의의 등-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 탈주와 횡단의 자유가 갖고 있는 웅대한 폭의 화음이 보여주는 생명의 횡당-리듬을 구성하여 삶의 리듬을 바꾸어 나가자

 

45 공동체는 특이한 입장, 독특한 주체성, 색다른 욕망이 나타날 경우 자신의 관계망 자체를 그러한 특이성의 화음, 색깔, 물들임, 공명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공동체의 관계망은 더 풍부하고 충만해진다. 그러한 공동체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생명에너지가 발산될 수 있는 프랙탈적인 방향으로 진화되어 나갈 것이다.

 

53 정신분열자가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예숙술가, 어린이, 청년에 모든 중요한 열망 형태에 포함되어 있는 분열과정이 혁명적인 것이다.


57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고 그 욕망에 감응할 수 있는 형태의 조직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대안적인 생명운동은 욕망이라는 생명에너지의 흐름을 통해서 하나의 전형, 하나의 모델, 하나의 모범에 사로잡히지 않고 끊임없는 창조적 진화를 통해서 생명이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과 형태, 관계망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89 자기생산적인 집단의 역능이 구조적 수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서 나타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을 개척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기획은 구조를 바꾼다는 기획이 아니라, 자기생산적인 자율성의 영역을 확대하고 보호하면서 기존영역과 교섭하는 방향으로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은 어쩔 수 없는 구조에 맞선 자본주의적 삶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라는 도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은 대안적인 활동방식이라기보다는 대안의 자율성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의 운동이다.

 

94 삶의 영역은 유무형의 양상으로 진화했다. .시간-공간-에너지의 감수성이 달라지며, 새로운 모습으로 삶의 방식이 개척되고 있다. 이것을 좌표로 보자면 횡단면이 넓게 존재하고, 새로운 방향성 속에서 벡터를 형성하는 그림이 될 것이다. 시간의 의미는 현실의 리듬과 가상 리듬의 합성물이라고 할수 있으며, 공간의 의미는 현실의 질서와 가상의 질서를 관통하는 혼성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중적이라기보다는 다중적이며, 다중적인 것에 중심이 있다기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조각들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118 욕망과 역능을 대립시키는 것은 불합리할 것입니다. 욕망은 역능입니다. 그리고 역능은 욕망입니다.

 

뱀발. [세가지 생태학] 윤수종 교수의 라이히 소개이후 다시 접한다.  신승철님의 노고로 좀더 쉽게 다른 각도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여우님의 책소개가 닿아 이렇게 되짚게 되어 감사드린다. 정신분석에 대해 주눅들 필요가 없다.  조직론에 대한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현실 속에서 적절한 설명해내는지 증명만 된다면 충분하다. 모임이 자기생산을 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욕망을 만들어내고, 꿈도 새롭게 꿀 수 있다면 어느 덧, 삶도 세상도 변해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만난 이들을 따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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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권위를 믿는 남녀차이


 우리는 무의식중에 책으로 엮어지면 권위가 있다라고 가정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나 완결성도 없이 표지와 영어제목과 내용이 다른 책들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런면에서 고전이 검증을 거쳐 나름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별반 관심들이 없다. 얕음에 대한 익숙함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차이가 보인다. 그래 그렇게 얘기해서 어쩌자구. 나한테 관계있는 것이 무엇인데. 그래서 내 삶과 관계가 있는 것은 무엇이냐구. 그것도 이야기 못해주잖아. 아 책 괜찮지 않아요. 쌈박하지 않나요. 전 흥미로웠는데요. 논리를 풀어가는 점이 신선하고 자료도 만찮아요.
 

 환원에 대한 유혹

 

 학문은 집요함을 발판으로 하지만 한편 환원에 대한 욕망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감이나 증폭없이 그대로 주조할 위험에 빠진다.  책을 보면서 미국의 현대인이란 개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백만년 이백만년전으로 옮긴 듯하다.  그 개인이란 존재는 경쟁하고 싸우는 만인의 투쟁을 가정한 개인이다. 민속지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한 용도로 편집한 것은 아닌가. 칼폴라니가 언급하듯이 호혜나 상호부조를 관점이나 홀로 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시선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인류가 화식을 통해 진화했다. 침팬지가 불씨를 가지고 논다. 한편으로 인류가 불이나고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유인원과 달리 있다. 그것이 결정적이다라고 하면 자료를 견강부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컬럼 한쪽으로 될 이야기를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은 아닌지. : 한편 이렇게 과학적 사실을 읽기 쉬운 문체로 쓴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사람들이 지금도 밥과 음식의 관계로 여러가지 권력관계도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런 점들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익명과 노출

 

 도시의 익명성이 좋다. 자신을 온전히 놓고 관심없음을 즐길 수 있다. 나의 생활과 삶에 관여하지 않는 자유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 시골마을의 너나들이가 싫다. 온전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 언제 사고친 누구의 딸, 밥먹는 습관이 그러저러한 누구다.  자유로운 나로 그 마을에 들어설 곳이 없다. 말 사이에도 없다. 그래서 징글징글하다. 난 도시가 좋다.  난 도시가 싫다. 알갱이 하나 하나 발라내어 정작 모니터만 만지작거리는 나의 옆엔 너가 없다. 그래서 너가 그립다. 아 공동체가 그립다. 너와 맺는 새로운 관계도 그립다. 잔소리하던 엄마가 측은하다. 밥도 따로따로 먹는 아이와 아빠와 외식도 물린다. 이젠 밥에 도란도란 얘기가 곁들이면 좋겠다.  어깨를 짓누르는 일들의 강도가 이렇게 우리사이를 갈라놓은 것인가. 아마 정답은 익명과 노출, 도시와 마을,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의 움직임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해도 해도 끝없는 일이 아니라 해도해도 끝이 보이는 일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동치미 사용후기
 

 동치미는 맹글로브 나무 같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습지의 나무를 이렇게 부르는데 그곳에 나무는 몸뚱이에 뿌리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단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바로 그것에 적응해서 뿌리를 내리든, 뿌리를 감추든지 한다. 그런 적응력이 있는 것 같다. 색깔도 하나하나 숨죽지 않고 그렇다고 배척하는 것도 아니고 적절한 긴장도 있는 것 같다.
 

 어젯밤 꿈

 

 초등학교 2층교실인듯. 교탁과 교실을 옮기며 연신 사람을 만나는데 잡지가 부족하다. 부족한 잡지가 차 뒤 트렁크에 있다. 그 기억을 쫓아 가서  잡지를 찾아보면 원본한권과 다른 한권뿐 손님한테 줄 것이 아니다. 그렇게 몇번을 꿈속에서 이층과 일층, 그리고 분교 초등학교 운동장을 마음만 분주히 다닌다.

 

 여성과 남성


- 인류라는 종족은 화식으로 인해 이빨과 창자가 짧아지는 변화를 거쳐 고효율 소화능력을 갖게되어 뇌용량이 크게 진화했다. 화식은 불씨를 보존하는 화덕을 갖게 만들고, 남녀의 성차를 낳고 결혼 등 사회적인 문화를 낳게 된다. 폭력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요리를 하지않는 여자때문이다.

- 존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보면 아마 불편할 것이다. 백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지만 직접 접속을 해보면 지금여기에 또 다시 불편이 덕지덕지 붙을 것이다. 불편을 감내하고 현실을 되짚어보고 싶다면 권한다. 애써 그럴 필요는 없지만 서두.

 

 

 본능의 주조성과 무의식


 사람들이 본능은 자연스럽다고 하는데, 상당부분 억눌림에 기인한 반대방향을 담고 있다. 과도한 관계에 의한 자유를 갈구하는데 그러할 생각이나 마음, 결정적인 것은 몸공간이겠지만 그렇게 억눌림의 누적되어 몸에 인이 박힌다. 문제는 개인은 이것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잘 모른다.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봐도 보이지 않는다. 온전히 홀로 있는 야생의 자신을 발견한다. 놀이터에서 시 c팔 ** 욕을 달고사는 초등학교 고학년의 불량스러움은 어떻게 주조되는 것인가. 본능대로 한다라는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이런 주조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나는 자유다라고 선언하고 해방되는 순간, 그 억눌림의 나를 한가닥도 수선할 수 없다.

 

 무의식의 대부분은 이렇게 갈망과 욕망이 차고 들어가지 않는 부분의 합이 몸에 스며들어 생긴다. 유의식이 모이는 자신을 살펴보는 일과 분위기, 문화가 흐르는 지점과 내가 충돌하는 점을 면밀히 살피고, 나의 눈이 아니라 너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또 하나의 자유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자유는 디테일의 발산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무의식을 만드는 일도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경을써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는 먼지의 힘, 거꾸로 먼지 한점을 올려놓는 일이 큰 일이기도 하다. 서투르지 않는 서투름이라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관 계 만 들 기

 

 만들다와 하다. 삶의 관성은 대부분 보수적이게 만든다. 기존의 맺어진 관계들. 가족, 친구, 선후배 사이에 삶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온몸의 온도를 40도까지 끓어오르게 하는 열정도 없는 듯하다. 365일 그저 안이하거나 순탄한 관계만을 고집하는 삶의 무게는 다른 길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학연의 습속에서 벗어나는 길. 나이의 장벽에서 벗어나는 길. 지연의 단순함에서 벗어나는 길. 삶의 울타리로, 보호마개로 기댄 것들을 낯설게 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가슴으로 , 뜨거운 40도의 관계를 만드는 일도, 36.5도의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얕지만 긴 농도의 관계를 만드는 일. 아마 이런 새로움은 시도해볼만 하지 않을까. 틀에 안주하지 말고, 삶을 뒤집고 새롭게 사는 생각들도 조금씩 자라났으면 좋겠다 싶다.

 

 

 한 달 에  한 번

 

 불편을 감내하면서까지 책을 보고 싶지 않다. 이런 기회에 읽기 어려운 책을 읽고 싶다. 언제 내가 이런책을 읽을까 하다가 정작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달라져 있다. 나의 범주에서 벗어난 책이 새롭게 스며들 때가 있다. 그러면 불편한 이야기를 감당해보실까. 아뇨 아직. 그래도 책은 싫으면 덮을 수 있어 낫다. 불편한 이야기가 주류로 번지면 싫다.

 

뱀발. 뒤풀이 장소가 새로운 곳이 생겼다. 조용하고 얘기나누기 편하다. 달은 총총, 별은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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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이제 정치에 관심갖다 

111202  닥치고 삶, 닥치고 행복...늘 유행의 고점이 드나든다. 막걸리 생각이 나 두부한모를 사들고 들어가니 처형이 와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꼼수로 인해 정치에 관심이 거의 없던 처형이 바뀌었다. 정봉주의 열혈한 팬이 되었고, 정치 담화를 시작하는 것이 왠지 낯설다. 관심을 갖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강**삐리같은 이로 인해 학벌에 대한 선입견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서열이란 것이 위에 있는 친구들 편하라고 만들어놓은 허위라고, 그래서 그런 것에 마음 주면 이미 지는 것이다라는 것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분권매체에 대한 고민과 교감

만명이 교감하거나 교신할 수 있는 잡지나 매체. 111203 서울서 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찌라시같은 무가지, 동네 카페에 무심이 놓여있는 잡지의 효과를 논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잡지가 아니더라도 좀더 다양한 접근과 컨텐츠가 나돌아다녔으면 하는 바램을 상상잡지를 보며 건넨다. 혁명이든, 대중운동이든, 민족주의든 대중이 어떻게, 왜, 존재에 기반을 달리해서 움직이는가? 팩트(사실)만을 밝혀보자라고 한 책이 [맹신자들]이다. 125가지 꼭지마다 씌여있는 꼬리를 보다나니 그냥 훑어볼 일은 아니다 싶다. 천명을 겨냥하든, 만명과 교감하든 그 마음을 관통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구전으로 이어지는 속도를 높이는 강열함이든, 더디지만 파고가 크든, 아니면 꼭 그 끈을 잡고 싶은 것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수단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꼽사리다 - 과학편

111130 기획단골수멤버 쫑파티를 했다. 사진을 넣은 문자의 강열함도 매체의 수단이다. 나꼼수가 하지 못하는 것. 나는 꼽사리다의 과학편. 원자력을 논할 수도 있다. 지금은 돌맹이를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발화되고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면 언젠가 또다른 관점의 전환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11125 참터운영위 뒤풀이 이런 이야기가  보태졌다. 참터는 꼽사리다. 붙어살게 만들어주면 고맙다고, 말과 논란이 없는 과학계에 잔잔한 파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꺼리나 능력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응집을 시키거나 렌즈로 빛을 모아 저기를 비추이는가란 고민이 든다.

새로운 단체 作 - 충고편 

111126 상가집에 가기전 인권연대 오**국장이 내려와 식사를 같이하구 서대전역에 내려준다. 서울과 대전의 문화격차는 몸으로 각인되어 있다. 지방과 지역. 그리고 인권단체를 만들려는 연두부와 상가에서 신**의 신신당부가 이어졌다. 세심한 부탁이자 권유인 셈인데, 즉답하려는 습관을 버리고, 충고를 몸에 삭히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단체를 만드니 더 세세하게 챙겨야 한다는 부탁의 말이 두시간내내 접수가 되지 못한다. 운영위의 확대,  겹침, 운영의 질적차별화도 잠깐 논하다. 
 

나꼼수, SNS, 컨텐츠 그리고 지역과 중심 


111130 뒤풀이, 111202 뒤풀이 나꼼수란 유행은 또 다른 정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과 달리 팟캐스트 방식이 여기에 유효한 것은 도시중심 문화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소식의 유의미성보다 전국적인 방식과 소문을 타는 것이 여기다. 친밀함으로 구나 동, 다른 컨텐츠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 의미는 달리 확산되지 않는다. SNS 역시 컨텐츠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꼼수로 인해 청춘이 정치도서를 읽는 문화의 역류가 생기듯이, 삶의 지류에 대한 접근이 생기도록 통로의 다변화가 필요하다. 크로포트킨이 청년에게 의사, 변호사, 건축사가 삶에 어떻게 엮이는지 생생하게 전달하는 백삼십년전의 고민이나, 가족 과연 믿을만한가?라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라는 것도 지역대학의 30% 해당구에서 할당제로 뽑는다고 하면 굳이 서울로 가려할까? 이런 파격을 담는 문화의 역습과 언로가 필요하다.

닥치고 삶, 그리고 행복의 소소함, 재중심 

결국 삶으로 귀결되고, 그 삶의 결을 세세히 녹아날 때에서야 겨우 닥치고 삶이나 닥치고 행복의 화두로 본연의 고민이 녹아나는 것이다. 정치도 행정도, 그로 인한 삶의 횡포가 너무 중앙집중적이다. 지역의 모든 곳, 모든 의제, 모든 논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땅의 삶의 고통은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다. 그 중심과 컨텐츠로 이땅이 들썩거려야 한다. 그래야 아주 조금 삶은 달리 생각해볼 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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