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이제 정치에 관심갖다
111202 닥치고 삶, 닥치고 행복...늘 유행의 고점이 드나든다. 막걸리 생각이 나 두부한모를 사들고 들어가니 처형이 와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꼼수로 인해 정치에 관심이 거의 없던 처형이 바뀌었다. 정봉주의 열혈한 팬이 되었고, 정치 담화를 시작하는 것이 왠지 낯설다. 관심을 갖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강**삐리같은 이로 인해 학벌에 대한 선입견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서열이란 것이 위에 있는 친구들 편하라고 만들어놓은 허위라고, 그래서 그런 것에 마음 주면 이미 지는 것이다라는 것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분권매체에 대한 고민과 교감
만명이 교감하거나 교신할 수 있는 잡지나 매체. 111203 서울서 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찌라시같은 무가지, 동네 카페에 무심이 놓여있는 잡지의 효과를 논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잡지가 아니더라도 좀더 다양한 접근과 컨텐츠가 나돌아다녔으면 하는 바램을 상상잡지를 보며 건넨다. 혁명이든, 대중운동이든, 민족주의든 대중이 어떻게, 왜, 존재에 기반을 달리해서 움직이는가? 팩트(사실)만을 밝혀보자라고 한 책이 [맹신자들]이다. 125가지 꼭지마다 씌여있는 꼬리를 보다나니 그냥 훑어볼 일은 아니다 싶다. 천명을 겨냥하든, 만명과 교감하든 그 마음을 관통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구전으로 이어지는 속도를 높이는 강열함이든, 더디지만 파고가 크든, 아니면 꼭 그 끈을 잡고 싶은 것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수단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꼽사리다 - 과학편
111130 기획단골수멤버 쫑파티를 했다. 사진을 넣은 문자의 강열함도 매체의 수단이다. 나꼼수가 하지 못하는 것. 나는 꼽사리다의 과학편. 원자력을 논할 수도 있다. 지금은 돌맹이를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발화되고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면 언젠가 또다른 관점의 전환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11125 참터운영위 뒤풀이 이런 이야기가 보태졌다. 참터는 꼽사리다. 붙어살게 만들어주면 고맙다고, 말과 논란이 없는 과학계에 잔잔한 파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꺼리나 능력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응집을 시키거나 렌즈로 빛을 모아 저기를 비추이는가란 고민이 든다.
새로운 단체 作 - 충고편
111126 상가집에 가기전 인권연대 오**국장이 내려와 식사를 같이하구 서대전역에 내려준다. 서울과 대전의 문화격차는 몸으로 각인되어 있다. 지방과 지역. 그리고 인권단체를 만들려는 연두부와 상가에서 신**의 신신당부가 이어졌다. 세심한 부탁이자 권유인 셈인데, 즉답하려는 습관을 버리고, 충고를 몸에 삭히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단체를 만드니 더 세세하게 챙겨야 한다는 부탁의 말이 두시간내내 접수가 되지 못한다. 운영위의 확대, 겹침, 운영의 질적차별화도 잠깐 논하다.
나꼼수, SNS, 컨텐츠 그리고 지역과 중심
111130 뒤풀이, 111202 뒤풀이 나꼼수란 유행은 또 다른 정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과 달리 팟캐스트 방식이 여기에 유효한 것은 도시중심 문화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소식의 유의미성보다 전국적인 방식과 소문을 타는 것이 여기다. 친밀함으로 구나 동, 다른 컨텐츠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 의미는 달리 확산되지 않는다. SNS 역시 컨텐츠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꼼수로 인해 청춘이 정치도서를 읽는 문화의 역류가 생기듯이, 삶의 지류에 대한 접근이 생기도록 통로의 다변화가 필요하다. 크로포트킨이 청년에게 의사, 변호사, 건축사가 삶에 어떻게 엮이는지 생생하게 전달하는 백삼십년전의 고민이나, 가족 과연 믿을만한가?라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라는 것도 지역대학의 30% 해당구에서 할당제로 뽑는다고 하면 굳이 서울로 가려할까? 이런 파격을 담는 문화의 역습과 언로가 필요하다.
닥치고 삶, 그리고 행복의 소소함, 재중심
결국 삶으로 귀결되고, 그 삶의 결을 세세히 녹아날 때에서야 겨우 닥치고 삶이나 닥치고 행복의 화두로 본연의 고민이 녹아나는 것이다. 정치도 행정도, 그로 인한 삶의 횡포가 너무 중앙집중적이다. 지역의 모든 곳, 모든 의제, 모든 논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땅의 삶의 고통은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다. 그 중심과 컨텐츠로 이땅이 들썩거려야 한다. 그래야 아주 조금 삶은 달리 생각해볼 만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