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권위를 믿는 남녀차이
우리는 무의식중에 책으로 엮어지면 권위가 있다라고 가정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나 완결성도 없이 표지와 영어제목과 내용이 다른 책들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런면에서 고전이 검증을 거쳐 나름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별반 관심들이 없다. 얕음에 대한 익숙함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차이가 보인다. 그래 그렇게 얘기해서 어쩌자구. 나한테 관계있는 것이 무엇인데. 그래서 내 삶과 관계가 있는 것은 무엇이냐구. 그것도 이야기 못해주잖아. 아 책 괜찮지 않아요. 쌈박하지 않나요. 전 흥미로웠는데요. 논리를 풀어가는 점이 신선하고 자료도 만찮아요.
환원에 대한 유혹
학문은 집요함을 발판으로 하지만 한편 환원에 대한 욕망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감이나 증폭없이 그대로 주조할 위험에 빠진다. 책을 보면서 미국의 현대인이란 개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백만년 이백만년전으로 옮긴 듯하다. 그 개인이란 존재는 경쟁하고 싸우는 만인의 투쟁을 가정한 개인이다. 민속지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한 용도로 편집한 것은 아닌가. 칼폴라니가 언급하듯이 호혜나 상호부조를 관점이나 홀로 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시선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인류가 화식을 통해 진화했다. 침팬지가 불씨를 가지고 논다. 한편으로 인류가 불이나고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유인원과 달리 있다. 그것이 결정적이다라고 하면 자료를 견강부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컬럼 한쪽으로 될 이야기를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은 아닌지. : 한편 이렇게 과학적 사실을 읽기 쉬운 문체로 쓴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사람들이 지금도 밥과 음식의 관계로 여러가지 권력관계도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런 점들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익명과 노출
도시의 익명성이 좋다. 자신을 온전히 놓고 관심없음을 즐길 수 있다. 나의 생활과 삶에 관여하지 않는 자유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 시골마을의 너나들이가 싫다. 온전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 언제 사고친 누구의 딸, 밥먹는 습관이 그러저러한 누구다. 자유로운 나로 그 마을에 들어설 곳이 없다. 말 사이에도 없다. 그래서 징글징글하다. 난 도시가 좋다. 난 도시가 싫다. 알갱이 하나 하나 발라내어 정작 모니터만 만지작거리는 나의 옆엔 너가 없다. 그래서 너가 그립다. 아 공동체가 그립다. 너와 맺는 새로운 관계도 그립다. 잔소리하던 엄마가 측은하다. 밥도 따로따로 먹는 아이와 아빠와 외식도 물린다. 이젠 밥에 도란도란 얘기가 곁들이면 좋겠다. 어깨를 짓누르는 일들의 강도가 이렇게 우리사이를 갈라놓은 것인가. 아마 정답은 익명과 노출, 도시와 마을,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의 움직임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해도 해도 끝없는 일이 아니라 해도해도 끝이 보이는 일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동치미 사용후기
동치미는 맹글로브 나무 같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습지의 나무를 이렇게 부르는데 그곳에 나무는 몸뚱이에 뿌리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단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바로 그것에 적응해서 뿌리를 내리든, 뿌리를 감추든지 한다. 그런 적응력이 있는 것 같다. 색깔도 하나하나 숨죽지 않고 그렇다고 배척하는 것도 아니고 적절한 긴장도 있는 것 같다.
어젯밤 꿈
초등학교 2층교실인듯. 교탁과 교실을 옮기며 연신 사람을 만나는데 잡지가 부족하다. 부족한 잡지가 차 뒤 트렁크에 있다. 그 기억을 쫓아 가서 잡지를 찾아보면 원본한권과 다른 한권뿐 손님한테 줄 것이 아니다. 그렇게 몇번을 꿈속에서 이층과 일층, 그리고 분교 초등학교 운동장을 마음만 분주히 다닌다.
여성과 남성
- 인류라는 종족은 화식으로 인해 이빨과 창자가 짧아지는 변화를 거쳐 고효율 소화능력을 갖게되어 뇌용량이 크게 진화했다. 화식은 불씨를 보존하는 화덕을 갖게 만들고, 남녀의 성차를 낳고 결혼 등 사회적인 문화를 낳게 된다. 폭력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요리를 하지않는 여자때문이다.
- 존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보면 아마 불편할 것이다. 백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지만 직접 접속을 해보면 지금여기에 또 다시 불편이 덕지덕지 붙을 것이다. 불편을 감내하고 현실을 되짚어보고 싶다면 권한다. 애써 그럴 필요는 없지만 서두.
본능의 주조성과 무의식
사람들이 본능은 자연스럽다고 하는데, 상당부분 억눌림에 기인한 반대방향을 담고 있다. 과도한 관계에 의한 자유를 갈구하는데 그러할 생각이나 마음, 결정적인 것은 몸공간이겠지만 그렇게 억눌림의 누적되어 몸에 인이 박힌다. 문제는 개인은 이것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잘 모른다.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봐도 보이지 않는다. 온전히 홀로 있는 야생의 자신을 발견한다. 놀이터에서 시 c팔 ** 욕을 달고사는 초등학교 고학년의 불량스러움은 어떻게 주조되는 것인가. 본능대로 한다라는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이런 주조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나는 자유다라고 선언하고 해방되는 순간, 그 억눌림의 나를 한가닥도 수선할 수 없다.
무의식의 대부분은 이렇게 갈망과 욕망이 차고 들어가지 않는 부분의 합이 몸에 스며들어 생긴다. 유의식이 모이는 자신을 살펴보는 일과 분위기, 문화가 흐르는 지점과 내가 충돌하는 점을 면밀히 살피고, 나의 눈이 아니라 너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또 하나의 자유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자유는 디테일의 발산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무의식을 만드는 일도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경을써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는 먼지의 힘, 거꾸로 먼지 한점을 올려놓는 일이 큰 일이기도 하다. 서투르지 않는 서투름이라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관 계 만 들 기
만들다와 하다. 삶의 관성은 대부분 보수적이게 만든다. 기존의 맺어진 관계들. 가족, 친구, 선후배 사이에 삶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온몸의 온도를 40도까지 끓어오르게 하는 열정도 없는 듯하다. 365일 그저 안이하거나 순탄한 관계만을 고집하는 삶의 무게는 다른 길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학연의 습속에서 벗어나는 길. 나이의 장벽에서 벗어나는 길. 지연의 단순함에서 벗어나는 길. 삶의 울타리로, 보호마개로 기댄 것들을 낯설게 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가슴으로 , 뜨거운 40도의 관계를 만드는 일도, 36.5도의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얕지만 긴 농도의 관계를 만드는 일. 아마 이런 새로움은 시도해볼만 하지 않을까. 틀에 안주하지 말고, 삶을 뒤집고 새롭게 사는 생각들도 조금씩 자라났으면 좋겠다 싶다.
한 달 에 한 번
불편을 감내하면서까지 책을 보고 싶지 않다. 이런 기회에 읽기 어려운 책을 읽고 싶다. 언제 내가 이런책을 읽을까 하다가 정작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달라져 있다. 나의 범주에서 벗어난 책이 새롭게 스며들 때가 있다. 그러면 불편한 이야기를 감당해보실까. 아뇨 아직. 그래도 책은 싫으면 덮을 수 있어 낫다. 불편한 이야기가 주류로 번지면 싫다.
뱀발. 뒤풀이 장소가 새로운 곳이 생겼다. 조용하고 얘기나누기 편하다. 달은 총총, 별은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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