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중 '욕망의 미시정치'는 거시적인 정치의 신화로 이루어졌던 맑스주의와 가족 내의 사생활로 이루어진 프로이트주의를 동시에 비판한다. 이것은 구체적인 삶의 욕망과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미시적으로 움직이며, 미시파시즘적 분리와 차별에 맞서 어떤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용기 있는 행동에 나서는가에 대한 그림을 그려낸다.

 

프로레타리아트의 형이상학적 신화가 아니라, 사회의 주변부와 가장자리에 있는 소수자와 접속과 변용이 만들어낼 색다른 움직임에 주목한다. 노동자 가장이 가정에 돌아와서 여성에 대해서 차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본주의와 색다른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것이며, 아이에 대해서 교육적인 면에서 권위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지식권력과는 다른 방식의 집단지성을 획득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에 대한 태도, 감수성, 지각형태가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재구축되는 삶이 바로 스피노자의 내재적인 역능의 차원을 의미한다.

 

47 공통성에 주목하는 후렴구들은 대부분 거시적인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질생성은 매우 미세한 삶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특이성 생산' 즉 '이질생성'의 차원은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구도가 욕망하는 주체성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주체들의 구체적인 움직임과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 또한 집단의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가 풍부하게 관계망을 생성할 수 있으며, 색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여부는 바로 이질생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공통성만을 강조하다보면 특이한 개개인들이 어떻게 움직이며 생산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원천이 신비한 부재의 고리로서 작동하게 된다. 그러나 가타리는 특이성 생산의 원동력을 미시적인 변용(=사랑)과 욕망의 움직임으로 보면서, 살아가면서 사랑하며 실천하고 욕망하는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본다.

 

73 가타리는 초기 프로이트의 입장을 더 발전시켜 무의식으로 세상을 설명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의 일환으로 욕망하는 기계 개념을 만들어낸다. 무의식은 더 이상 개인의 심리상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게 되며 현실에서 작동되는 욕망의 흐름, 관계망, 상호작용 속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타리는 욕망하는 기계는 결코 은유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이주체성이자 관여적 주체성을 의미하며 프로이트의 부분충동에 대한 혁신적인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부분충동은 유아기 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전체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합과 접속/연결을 달리 할 수 있는 기계가 된다.

 

86 가타리에게 비기표적 기호계의 차원은 무의식을 그려나갈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비언표적 기호에 주목하는 이유는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흐름, 관계망, 상호작용을 그려내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부엌이라는 공간을 생각해 본다면, 요리 매뉴얼이나 오가는 대화와 같은 언표적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의 흐름, 불의 흐름, 음식의 흐름, 쓰레기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흐름의 구도를 잡고 그려본다는 단순한 말의 차원이 아니라 말이 아닌 색다른 방식의 기호작용에 대해서 주목해볼 필요성이 생긴다.

 

89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신경증 유형의 가족 무의식을 통해서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가타리는 초자아의 작동방식이 신경증 유형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순된 메시지를 발신하는 이중구속의 상황으로 내몰고, 결국 분열증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사고한다. 정신분석의 해석, 전이, 가족주이라는 요소와 달리 분열분석은 탈영토화하는 욕망을 가진 집단분석을 위한 도구이다. 결국 프로이트가 가족무의식적 차원에서 세상을 설명하는데 그쳤다면, 가타리는 사회적 장에서 욕망의 집단적 투여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138 라이히의 성정치와 욕망의 미시정치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성정치가 성욕망의 억압을 벗어나려는 입장에서 서있지만 주체를 이미 노동대중으로 설정하고 있음에 반해, 욕망의 미시정치는 주체성 생산의 시각에서 욕망의 차원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139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왜 인간은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생각하는가?라고 서술하면서 당대 대중이 갖고 있었던 욕망에 대해 의문점을 던진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후에 라이히는 왜 대중은 억압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가타리도 역시 라이히의 문제의식과 동일선상에서 문제의식을 가지며, 예속에 대한 욕망의 이유를 탐색한다. 그러나 성억압이 제거되는 것을 통해서 권위주의적 질서가 붕괴되면 사회변혁이 이루어진다는 것보다 문제의식을 확장시킨다…”예속되기 위한 욕망은 무의식의 질서까지 들어와 있으며, 이러한 작동방식 때문에 욕망투쟁의 방향성은 무의식 해방과 주체성 해방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가타리의 문제의식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