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림자가 없다

 뱀발.

 

 

1.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다. 듣고서도 뜸을 들인 이유가 뭐였을까?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오랫만에 들른 도서관의 신간코너가 빼곡해졌다. 도서관이 구력이 생긴 것인지 헐겁던 코너가 시간의 힘에 이렇게 무게를 감당하며 부피를 채우고 있다. 몇권을 빼어들고 그림과 사진과 활자 큰 글들을 번갈아 보다 대출하려고 마음먹다. 그런데 독서카드를 큰녀석이 가져간 것도 그때 알아차린다. 고스란히 이동 책꽂이에 두고 물러선다.

 

 

2. 시를 낯설고 좋아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 이 책에서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너무 삶과 동떨어진 시를 강요당한 것 하나. 둘째는 너무도 판에 박힌 틀에 박혀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기피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저자의 분석이다. 음~ 그런가?! 좋아하니 그 이유ㅡㄹ 잘 모르겠다. 수학 방정식 같은 것인가?! 숙제같은 것이었나?  어린아이들은 다 시인이다. 궁금하고 사물에 대한 가림이 없다. 불쑥 불쑥 뭐야? 어른이 생각지 못하는 발견 속은 모두 시다.

 

 

3. 시는 모태 다양성의 발로다.

 

 

4. 그런데, 시를 밝히는 이들 가운데 김수영을 좋아하는 분들을 만나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주변에서 저자들과 같이 컴밍 아웃을 하거나 건네들은 이들이 여럿이니 나름  잠재적인 팬클럽을 만들 수준이 될까? 그런면에서 강신주-김서연 저자가 고맙다. 이렇게 인문정신의 금빛가루를 뿌려주어서....라고 말하면 그 취지에 반하겠다 싶다. 하지만 그 좋아하는 속내를 듣고, 그 아픔의 친구로 김수영을 껴안았다는 사실로도 그 위로를 받을 수 있겠다 싶다. 처음 책을 펴들고 굿바이! 김수영의 저자말씀을 읽기전, 그림들을 쭉 살핀다. 그림들이 차분하게 다가선다. 좋아하는 그림들이거나 봤던 그림들이 중간중간 박혀있어 더 친숙하다 싶다.

 

 

5. 인문정신과 시, 시인의 삶, 김수영은 온몸으로 밀고가는 것이 시라고 했다. 삶이라는 것. 삶을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이 그저그런 색깔 회색이 될 수밖에 없다. 끙끙 앓는 이들은 여전히 이런 문제로 고민과  통증을 호소한다. 여기저기 답답함을 토로하지만 단체와 조직들은 그 호흡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 人間 사람 사이가 있을까? 기댈 수 있을까? 그런 관계는 있나?  일의 강도가 세거나 규격화되어 있어 활동하거나, 살아지는 이들에게 다른 시선이 들어갈 수 있을까? 시 한편 읽힐까?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곳이어서 시도, 꽃도 나무도, 사람사이의 일들과 일상에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을까 싶다.

 

 

6. 진보는 진부?해져 김수영이 온몸을 흐느끼며 말한 비와 팽이와, 민주주의와 적을 지금여기에 불러내며 회자시키지 못하고 있다.  소음처럼 소리지르고 주장하고, 이게 아니라는 삶과 일상을 논하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수영의 해묵은 그림자가 50년이 지난 지금여기에 그대로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뻔뻔스럽고 말많고, 소란스럽고 불편해져야 한다.

 

 

7.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만 어떤 것들에 대해 불편할 줄 알아야 진보다. 그래서 김수영을 굿바이!! 할 수가 없다. 어느 선술집이나 회의자리나 모임이나 반상회나 일터나 학회장이나 세미나 장이나 곳곳에 김수영을 불러내고 싶은 유혹을 멈출 수 없다.

 

 

8. "너나 잘 하세요." " -너-나-너- 도 잘 하세요"  일상을 겨워내는 일들....너무 늦은 건 아닐까? (세상엔 그런 법은 없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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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우리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의미를 띠었던 것이다.-레비스트로스-"

 

 

법과 종교의 이전으로 맹세

 

법과 종교는 바로 언어 경험에서 이러한 파열을 막기 위한 시도에서 태어난다. 법과 종교는 둘 다 발화를 사물(사태)에 묶어두려고, 저주와 파문을 통해 말하는 주체를 그들이 하는 발화의 진실화하는 힘에, 그들의 '맹세'에, 그리고 그들의 신앙 선언에 묶어두려고 애쓴다. 122

 

맹세는 선언도 아니고 약속도 아닌 다른 것,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진실 말하기'로서,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는 주체와의 관계만을 그것의 수행적 효력의 유일한 규준으로 가지는 말이다. 선언과 진실 말하기는 말하자면 '로고스'의 공기원적인 두 얼굴인 것이다. 121

 

 

맹세: 또다른 살붙이, 욕설에서 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항상 참인 이름, 오로지 참일 뿐인 이름, 즉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한 언어 경험을 이른다. 인간에게는 이 경험이 맹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이름은 맹세이며, 모든 이름에서는 '믿음'이 관건인 것이다. 115

 

독신(제기랄! 오마이갓!같은 욕설)은 맹세의 일종이다. 다만 신의 이름이 선언이나 약속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로, 부당하게, 의미론적인 내용과 무관하게 소리 내어 말해지는 맹세인 것이다. 88

 

말과 사실(또는 행동) 사이의 관계이며 이것이 맹세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내가 만약 이 맹세를 어김없이 완수한다면 내게 좋은 일이 있을지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 맹세를 어기고 위증한다면 그와 반대의 일이 내게 있을지어다." 말과 사물(사태) 사이의 결합을 의미하고 보증하는 신의 이름이 이 관계가 깨질 경우에는 저주로 바뀌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본질적인 것은 축복과 저주의 공기원성,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맹세에서 같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80

 

 

맹세의 정치사

 

맹세의 정치사에서 종교와 정치 사이의 분리 과정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원초적 무구별 상태'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들에 있어 종교적이고 세속적 영역들을 규정하는 기지의 특성들, 정확히 말해 역사가들의 끈질긴 노력의 산물인 그러한 특성들을 이른바 이 '원초적 무구별 상태'에 단순하고 무비판적으로 투사하지 않는 지혜를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화학적 화합물이 그것을 이루고 있는 성분의 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수한 고유성을 갖듯이, 역사적 분리에 앞서 있는 것이 반드시 그러한 부분들을 규정하는 특성의 합, 그러한 특성들의 불분명하고 구별되지 않는 합인 것은 아니다. 40

 

이 고고학이 도달하기 바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와 '역사의 최말단'의 성격과 토대이다.....그것은 마치 인도유럽어가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접근 가능한 언어들 사이의 동족 관계 체계를 표현하는 것과 같고, 정신분석학에서 아동기가 성인기의 정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을 표현하는 것과 같으며, 우주 발생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빅뱅'이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배경 복사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천체 물리학자들이 해당 시점을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빅뱅과 달리 'arche'는 어떤 소여, 실체, 사건이 아니라 인류발생과 현재 사이에, 역사의 바깥과 역사 사이에 펼쳐져 있는 역사적 흐름의 장이다. 30


 

맹세의 새로운 위치

 

지금까지 학자들은 맹세라는 제도를 끊임없이, 노골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주술-종교적 영역에 근거해, 다시 말해 거짓맹세를 처벌함으로써 맹세의 효력을 보증하기 위해 개입하는 신적인 힘 또는 '종교적인 힘들'과 관련시켜 설명해왔다....나의 가설은 정반대이다. 즉 주술-종교적 영역은 맹세에 논리적으로 선재하는 것이 아니며, 차라리 종교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맹세라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136

 

인간성이 어떤 탈구 앞에 처해있다는, 적어도 살아있는 존재자를 언어와 묶어주었던 결합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에는 갈수록 더 순전히 생물학적인 실재로,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각종 장치들을 통해 더욱 더 공허해져버리는 말의 경험 속에서 인위적으로 전자에 분리되는 '말하는 존재자'가 있다. 그러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말 속에서는 정치적 경험 따위는 갈수록 더 미덥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말과 사물(사태)과 인간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윤리적인 연관이 깨지면 사실상 한편으로는 공허한 말이,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장치들이 대대적이고 유례없이 만연해 더 이상 통제 불능으로 보이는 그러한 삶 전반을 법으로 집요하게 틀어쥐려고 한다. 145

 

인간, 그리고 철학의 필요

 

...인간은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라고 말해야만 하고, '말을 붙잡고' 떠안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생명체이다. 언어에 대한 서양의 사유가 언어의 형식적 장치들 속에서 언표화 기능, 다시 말해 화자로 하여금 구체적인 담화 행위 속에서 언어를 떠맡게 하는 수단인 지시사 또는 전환사들의 총체를 따로 식별해내기까지는 무려 2천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철학은 인간을 언어에 연결시켜주는 성사적 결합을 의문에 부치며, 바로 그런 까닭에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고 또 말의 허망함에도 빠지지도 않는다. 유럽 각국의 언어가 헛되이 맹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듯 보이며 벌거벗은 삶에 대한 빈말에 대한 지배라는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이 때, 언어를 지닌 살아있는 인간이 이르게 된 극단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저항과 변화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또 다시 철학인 것이다.  146-148

 

 

 

뱀발.  말과 사물(사태), 행위에 윤리적 연관이 깨어지면서 악이 시작되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발가벗은 삶은 법과 종교와 언어와 그 우수마발에 끼이고 치여 숨조차 쉴 수 없다. 2천년의 역사라는 것이 이렇게 비참을 만들어낸 것일까? 저자는 그 시원의 근원을 달리보자고 말한다. 지금으로 거기를 보는 역사, 주술-종교, 사법-공법의 시선이 아니라 그 막다른 벽의 시작은 아마 분자와 분자의 결합이 전혀다른 성질을 갖는 화학적 결합이듯이 다른 관점에 보아야 한다고 한다. 말과 사물과 행동의 일체가 되는 그것. 인류발생의 이전은 빅뱅처럼, 아동기를 발굴해놓은 정신분석학처럼, 유럽언어의 모태인 인도유럽어의 시작점처럼 전혀 다른 덩어리라는 것이다.

 

욕설은 감정과 행동과 몸의 상태를 정확히 표현해낸다. 저주라는 것이 맹세와 한몸뚱아리라는 것이다. 맹세의 고고학. 그 기원을 찾아가며 지금 시대를 저자는 읽는다. 인간은 말을 붙잡고 떠안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생명체라 한다. 그 뒤집힘으로 맹세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문어-구어-욕-말과 사물, 행동의 윤리적 연관: 집합적 주체....독일까 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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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먹다. 인건비는 퉁~치구

 

활자의 힘이 무엇일까? 자료집은 받아든 느낌이 새롭다. 발주처 대전시민아***, 인건비는 날로 먹고 500명의 대학생 면접조사를 한 비용이 겨우 400만원, 아마 기관이나 다른 곳에서 했으면 몇천만원이나 되는 프로젝트이겠지 싶다. 대학생 정치의식 조사. 좌냐 우냐가 정치를 우선 두고 보는 관점이라면, 진보냐 보수냐는 기존 사안을 보고 나누는 관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자신 개인에 대한 판단이 진보냐 보수냐 좌파냐 우파냐라는 차이가 상당이 주관적이어서 설문내용에 안전 장치를 마련해두었다 한다. 개인은 좌파라고 하지만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취합해보니 중도이거나 우파인 상황이 그렇겠다.

 

날로 먹다. 연구포인트는 쏘옥~

 

그리고 정치지향적인 구도만이 아니라 물질주의자인지? 탈물질주의자인지? 혼합형인지 응답하도록 하였고, 또 하나의 관점 권위주의자인지 탈권위를 지향하는지 교차 분석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경제,과학, 환경, 교육 등등 현안이 되는 사안들에 응답하도록 함에따라 대학생들의 의식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도록 한점이 설명을 듣는 내내 인상적이다 싶다.

 

20대 청춘들은 어찌 생각할까? 의식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진보적이다. 물질주의와 권위를 숭상하는 경향도 강하니 그럴만도 하겠지만 약자나 문화적 심성이 훨씬 더 풍부하다고 여길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남성 여성을 떠나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한다. 국가보안법 유지, 줄기세포 연구 주장,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진보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어도 우선은 민족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연구네트워크 월담은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념이나 설문사안마다 예상치 못하는 답변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리도 사안에 대한 실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서 그렇지 않은가 한다. 시민으로 의식보다 소비자의 의식이 몸에 배여있는 세대이기도 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한다.

 

스무살,  소비자의 덫에 걸린 것일까?

 

20대 대학생을 한마디로 정하면 어떨까? 월담은 이렇게 말한다." 탈권위" 20대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키워드. 늘 청춘은 그러하다라고 하면 할말은 없겠지만 권위에 집착하는 사회의 모습은 그들의 마음엔 "아니올시다"일게다.

 

시민의식 대 소비자 의식, 후자의 경향이 명민하고 강하다면, 기성세대가 늘 접근하는대로 이념지향이나 정치지향, 선전은 많은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가 있다. 프런트 논의 속에는 소비자로서 실리적으로 어떠하다는 설명이 구체적일 때, 정치의식과 시민의식은 완만한 접점을 찾는 것은 아닌가 지적한다.

 

집에 있던 한권의 책을 펼쳐본다. 2005년 스웨덴과 지역 대학생(대전, 광주-목포)의 정치의식 조사를 한 것이다. 이번 결과와 비교해서 보면 좋겠다 싶다. 스웨덴은 물질주의자와 탈물질주의자, 권위의식과 탈권위, 진보-보수의 성향이 어떨까?  일련의 흐름을 보여줄까? 궁금하다.

 

청춘, 소비자 그리고 삶, 민주주의를 위한 일보

 

면접조사를 한 월담 연구원은 대학생들과 만나면서 학교마다 다른 분위기와 함께, 총선 뒤 어느 정당에 투표한 것인지 묻자, 극도로 꺼려했다고 어려움을 전한다. 정치적 입장을 밝힌다는 것이 어느새 피해나 자기 검열로 접어드는 이 사회의 단면을 보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일년에 한두번의 선거당일만 대리할 수 있는 정치현실의 벽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선거기간에 정치적 표현을 자제하거나 하지 못하는 선거문화의 단편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가 흥미진진한 놀이라는 유럽 나라들의 문화와 정견발표와 지지정당을 공개하도록 열어놓은 정치문화의 수준 차이가 젊은이들을 점점 더 소비자로만 제조하는 것은 아닐까?

 

 

연구공간 수작, 연구자네트워크 월담에 바란다.

 

기초연구와 그간의 노고에 대한 마음 표현이 서툰 대표들의 단답 수고인사가 겸연쩍습니다. 진보의 키워드인 권위를 서슴없이 꺼내주셔서 한번 더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지금여기, 진보분들의 희망을 품고 나눌꺼리를 찾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1,000분 전수인터뷰를 해보면 어떨까요? 지역에서 활동하고, 고민하는 분들의 마음지도를 그려볼 수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되는지 어렴풋하게 소묘할 꺼리라도 나오는 것은 아닌가하고 욕심을 내어보기도 합니다.(물론 연구비 만듭니다. 허세장렬하게..) 기자분들의 문의와 인터뷰가 준비되어 있다는 우쭐도 좋고, 뽐도 더 내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늘 불이 꺼지는 않는 연구공간 수작에 대한 식상한 수고의 멘트로 마무리하게 되지만 시를 좋아하는 학자분들과, 꺼지지 않는 열정을 가진 월담분들고 더 자주 뵙고 싶네요. 이럴 땐 이렇게 말해야죠. "사랑합니다!!"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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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잃어 버리다.

 

민중의 집과 유토피아와 안철수의 생각을 생각하다 모두 붉은 비닐봉투에 담겨있던 책들을 잃어버리다. 술을 마시다가 기억의 끝이 중동난 기억도 오랜만이기도 한데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다. 민중의 집의 변죽을 울리는 이야기들이나 속내에 무척이나 솔깃하다.  함께 나눌 이웃이 누구인가? 세미나, 앎만 찾아헤매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세미나와 토론모임을 나눌까? 받는 것이 아니라 나눠야 할 이웃, 주어야할 무엇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는 말에 떨림이 전해진다.

 

메모를 잃어 버리다.

 

그 빨간봉투 속, 민중의 집 책갈피 사이에 메모도 잃어버렸다. 녹취의 근거를 찾아가면 있으련만 부산스럽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조금 더 위의 레토릭의 메모를 확장시키고 싶은 맘이 있어서인데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책을 보면서 동*미와 아***가 불쑥 불쑥 떠올랐다는 이들. 다락방이나 비밀스런 공간이어서 아는 사람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지 않다는 그(녀)들. 공동체주의 자유의 경계에 대해 논하다. 공동체로 치자면 교회공동체가 탄탄하지만, 그 역시 어떤 정치적 지향에 무색무취해서, 세상일을 연결시키는 능력이 없어 허하다고 결론을 짓는다. 공동체 역시 끊임없이 개인을 간섭해서 싫지만, 마음이나 생각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끈을 이어놓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한다.

 

쪽지를 잃어 버리다.

 

그 책갈피사이에는 얇은 편지봉투가 있다. 따로 보라고 준 것인데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때문에 미안함이 솟아 오른다. 책갈피인지 무엇인지 준 샘에게 미안스럽다. 샘은 이탈리아에 6년정도 체류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곳엔 10여년이 지난 뒤에 갔는데, 장터에서 옹기종기 사람맛을 느낄 수 있던 거리가, 대형할인매장의 파고처럼 썰렁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자산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고 한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그것만 쳐다보는 것이 그들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세상의 파고는 저자가 말한대로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를 가리지 않고 더 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샘은 10년전이라면 유럽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발 디딘 곳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목소리에 힘은 준다. 다른 나라의 경험을 이식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핀란드식은 핀란드식대로 스웨덴은 스웨덴식으로 접목하기가 어렵다. 한국형이라는 것은 새롭게 시도되어야 하는 것이지 여행이나, 복지국가를 투어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라고 한다.

 

은행잎이 술기운에 더 노랗다. 툭툭 떨어지는데 그(녀)가 손을 빌린다.

손을 잡아준다.

 

민중의 집 책 뒤편을 보면 스페인의 마니넬레나란 도시가 있다. 4만명의 인구, 공산당원인 시장이 30년째 하고 있다. 그곳의 한달 집세가 우리돈으로 25,000원 정도 한다고 한다. 가장 가난한 이웃의 생활비를 기준으로 정하는 원칙이 있는 셈이다. 당원이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3천명정도라고 한다. 누구라도 그곳에 가서 살 수 있다.

 

이런 질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임대주택에 당신보고 살라고 하면 이사갈 수 있겠느냐구. 말로만 진보는 아니냐구. 도발적인 질문이기도 한데, 받는 이들의 마음이 곱다. 이사는 못간다. 하지만 지금 사는 아파트에 임대주택의 이웃이 층별로 섞여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느냐? 해야되느냐?는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이 개인으로 해결해야되는 당위만 있다면 너무 팍팍할 것이다. 마니넬레라같은 도시의 오아시스는 만들 수 없는 것인가? 제도적 해결은 요원한 일인가?

 

은퇴뒤에 사람들은 모여서 살고 싶어한다. 1층에 식당, 2층에 카페, 3층에 도서관 겸 공용공간.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은 샘은 나름 공간에 대한 고민과 기본설계를 해보았다고 한다. 진보가 이념이 아니라 몸을 섞는 일에 얼마나 인색한 것인지?

 

함께 살아갈 이웃을 고민한다는 일.
함께 살아갈 세상을 설계한다는 일.
함께 나눌 꺼리를 생각한다는 일은 설레인다. 조금 더 디테일로 향해야 한다.

 

김수영은 말한다. 민주주의에는 그림자가 없다. 민주주의는 불편한 것이다. 불편을 자청하려면 뻔뻔해야 한다. 논쟁도 즐겨야하고, 제대로 싸우는 법을 일찍 가르쳐야 한다. 싸우는 횟수만큼, 싸우는 근력만큼 민주주의는 단련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진보라는 것은 쿨하지도 않고 산뜻하지도 않다. 늘 곁에 있는 것이기도 한데, 불편을 감내하면 너무도 보이는 것이 많다. 그 숲의 나무에는 기댈만 할 것이다. 아마. 무척이나. 함께할 이웃이 늘 곁에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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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그림자가 없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ㅡㅡ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 · 19에서 배운 기술

 

최근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은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뱀발.  아  단단한 고요함, 사랑. 1967년 작. 어느새 또 다른 아버지가 되고, 잘못된 시간은 흐른다.  민중의 집을 이 시로 닫다.  꼬옥!! 여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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