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자, 살피자, 생각하자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좌파는 아직 철저하게 바닥까지 떨어지는 위기를 맞지 않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제 친구 알랭 바디우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바디우가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죠.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20세기 이래 지속되어온 좌파가 비록 영광스러운 순간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절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중략) 문제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중략) 1990년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회적 모델들, 즉 공산주의 국가형태, 조금 완화된 사회민주주의 형태, 직접 민주주의 모델 등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모든 것을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완전히 새로운 자본주의를 생각해야한 합니다...(중략) 오늘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란 다소간의 불교적 색체가 깃든 쾌락주의입니다. "너 자신을 실현하라. 실험하라. 만족하라. 삶을 만끽하라" 등의 것들은 오늘날 일반화된 쾌락주의입니다. ...고정된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31-133


정치적 올바름과 나르시시즘적 경제논리

 

섹스는 할 수 있지만 사랑은 하지 않는다. 열정적인 애정은 없으니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등. 우리는 마치 3-4세기에 쇠퇴해가던 로마 제국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것이죠. 윌리엄 예이츠의 유명한 시구가 생각납니다. 자신의 시 the second coming에서 그는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있다"고 말했지요. 오늘날 정치에 있어 우리는 어디서 열정을 찾을 수 있습니까?  138

 

이방인의 시선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외국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의식을 갖고 있느냐며 말이다. 그러고는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만약 우리의 오래된 사회규범 또한 외국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보편적 선을 향한 유일하게 훌륭한 길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이방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또 상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사유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97

 

당대의 이론적 문제

 

오늘날 '인간됨'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전자 조작이나 생태계 파괴 등은 인간됨에 대한 근본 개념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인간됨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물리적 정신적 속성을 변화시키고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 큰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다 더 종속적인 존재가 되고, 더 취약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 할 수 있죠.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윤리적 규준 혹은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206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에는 아주 분명한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측면을 하나의 추상적인 문제로 합칠 수 있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 사유의 궁극적 과제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한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207

 

불/가능한 것의 경계흐리기

 

냉소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맞아. 30년마다 혁명적 봉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도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어. 그러니 우리는 결국 다시 돌아가야돼"라고 말이죠. 예를 들어, 오늘날 프랑스의 어느 보수주의자도 "나도 68혁명 현장에 있었어. 나 또한 물론 시위를 했지. 하지만 후에 나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사유의 방식을 재정의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재사유하는 것 말입니다. 209


 

"공동선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궁극적 선은 무엇인가? 이는 물론 배제된 자들의 정치-사회적 침입과 복원이다. 지젝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급진적 좌파는 이 세계에 배제된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결단을 이미 내린 상태이다. 자본주의적 삶에서 최상의 선은 물질적 삶의 안정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정치적 담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은 손대지도 못하고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투쟁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을 어설프게 소비할 뿐이라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렇기에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서 진정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할 수 있으며, 그것을 시도하는 정치-사회적 행위야말로 새로운 선의 범주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1990년 이후의 모든 것은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며, 대의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새로운 선, 다시 말해 새로운 대의를 찾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선악의 초월이 아니라 도덕적 다수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이론 작업과 실천 행위야말로 오늘날의 좌파가 당면한 과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선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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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자, 살피자, 생각하자

사색의 삶

 

깊은심심함 - 향기를 시각화하는 데는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사색의 능력이 반드시 영원한 존재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34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백치가 보통은 계산기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52


 

성과사회의 피로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66

 

눈 밝은 피로, 근본적 피로, 우리-피로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짧고 빠른 과잉 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저 길고 느린 형식의 주의 말이다...."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 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사물들은 반짝이고 어른거리면 가장자리가 흔들린다.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그렇게 우리는 - 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피로의 구름이, 에테를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 평화의 시간이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우울증의 메카니즘

 

오늘난 성과주체가 앓는 우울증 등의 질환은 이렇게 내면화된 타자와의 갈등관계 또는 양가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우울증에는 아예 타자의 차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소진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94

 

 

결코 저항적일 수 없는 가상공간,SNS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다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95

 

유대란 중력이 없는 우울증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슬픔은 대상과의 강력한 리비도적 유대관계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그 점에서 우울증과 구별된다. 반면 우울증은 대상이 없고 따라서 지향점도 없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96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

 

투쟁이 집단, 이데올로기, 계급 사이에서가 아니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성과주체의 위기에 그렇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 자체가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이다. 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인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101

 

자학으로 이상자아

 

복종적 주체가 초자아에게 예속된다면, 성과주체는 자신을 이상 자아에게 기투한다. 예속과 기투는 상이한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초자아에게서는 부정적 강제가 발생한다. 반면 이상 자아는 긍정적 강제력을 발휘한다. 초자아의 부정성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이상 자아를 향한 기투는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102

 

 

 

성과사회의 폭력성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하지만 주체(예속)에서 프로젝트 전환으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103

 

아감벤의 호모사케르와 비교

 

성과사회의 한복판에서 아감벤은 주권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아감벤 사상의 시대착오적 성격은 여기서 기원한다. 그가 추적하고 폭로하는 폭력은 오로지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에 국한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에 특징적인 긍정성의 폭력, 고갈과 포섭으로 표출되는 폭력은 아감벤의 시야를 벗어난다. 그는 이미 낡게 느껴지는 부정성의 세속화된 형식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까닭에 긍정성의 극단적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한다. 착취는 지배 없이 관철된다. 여기에서 자기 착취의 효율성이 생겨난다....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 자기 자신의 주권자, 호모 리베를 자처하는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밝혀진다.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109

 

활동과잉 인간에 대하여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가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112

 

 

벌거벗은 건강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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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시 심사평 “시는 자신을 비워줄 때 조금씩 다가오는것”

문학평론가 황현산·시인 박주택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기예를 넘어 정신의 한 경지를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다운 시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온힘을 다하여 시에 헌신하고 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워줄 때 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조금씩 다가온다. 시는 결코 설익은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신춘문예 시 부문을 심사하고 있는 박주택 시인(왼쪽)과 문학평론가 황현산씨. | 김문석 기자

 

최종에 오른 네 편의 시 가운데 ‘그 여자의 거실에는 기차가 달려가지’ 외 4편을 응모한 서진배의 시는 발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산문적 진술에 기대고 있고 급격히 장면을 전치시키거나 전복시켜 시를 읽는 데 재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침묵의 불법 점거에 대한 진술서’ 외 4편의 김희정의 시는 소음과 환청, 자본주의와 물신과 같은 도시적 생태를 다루고 있으면서 눅눅한 서정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의 관절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쉽게 선외로 밀렸다. ‘귀갓길’ 외 4편의 김창훈의 시는 “그림자에도 단내가 난다”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와 같이 선후 문맥을 잇는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녹번동’ 외 4편을 응모한 이해존의 시는 그간의 적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당선작으로 합의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조(構造)하고 있는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해 사유와 감각을 적절하게 가로지르며 생의 경험이 곧 시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시는 시여야 한다는 기원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모른다면 시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당선자의 대성을 기대해본다.

 

 

 

뱀발. 

 

1. 시인을 지근 거리에서 지켜본다는 일은 어쩌면 자꾸 더 아픈 일인지도 모른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며 피는 생살의 꽃. 또 다른 살은 빨갛게 그렇게 두드러기처럼 마음 속에 인다. 많은 시간들이 긴장을 멈추지 않고 푸릇해지거나 서슬퍼렇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서시인에 대한 호불호와 지청구를 듣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심사평에서처럼 수련에 수련, 헌신에 헌신은 늘 지켜보던 모습이기에 더 더욱 뫔이 짠하다. 어쩌면 지켜보는 이에겐 당선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니 각자 기차여행에서 돌아오고, 대흥동 한적한 북카페에서 카프카를 얘기하고, 내집에서 증약막걸리를 비울 즈음에 이 기사가 올라왔던거다.

 

2. 사랑은 단념이다. 절제다.  가장 아끼는 것을 비워내야 비로소 다가오는 것이란다.

 

3. 가장 아끼는 것을 버린다. 그래야 온전히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비단 시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시 대신 괄호를 넣는다.  올 한해도 그렇게 슬며시 넣어본다. 나 곁에 나, 나 곁에 너...너 곁에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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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세밑, 새해  일틈 사이로 모처럼 책마실을 다니다. 몸에 기차소리가 익거나 물리도록, 차창밖으로 설경이 마음 속에 내리도록 해주고 싶다. 끊임없이 펼쳐진 초록, 멀리 들리는 파도소리와 포말들 몸에 아른거리는 것들을 넣어주고 싶다.

 

일터송년회도 말미, 해설피 취한 술김에 아빠 떠나니 묻지 말라고 한다. 내일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궁금해 하지 말라 한다. 흔쾌한? 허락에 책들과 가벼운 짐을 챙겨 나선다. 눈발은 짙어지고 밤은 어두워지고 달리는 기차소리가 곱고, 들뜬 여행객들의 상기된 얼굴과 목소리가 좋다.

 

출발전 정여울의 책소개가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사놓고 뒷부분에 날개가 접힌 책이다. 일리히 책들도 주섬주섬 읽고 [젠더]는 여러번 재독했건만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이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책의 문고리를 잡고 기차소리를 들으면 읽다. 사랑은 단념이다. 우정은 낯선사람에 대한 환대다. 믿음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 있는거다. 예수의 결을 이리 치밀히 쫓고 분석하는 이가 있을까? 역사 속의 결을 이리 현실화 시키려는 이가 있었을까? 여운을 깊이 들어마신다. 뫔 속에서 달아나지 않게 숨을 꾹 참는다.

 

책의 화자들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세상은 안개보다 더 짙다. 보이는 것이 없다. 보인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네 몸은 지칠대로 지쳐있다. 너무 열심히 살아 지쳐있다. 멈춰라. 살펴라. 판단하지 말고 살펴라. 한올한올 살펴라. 서사도 없고,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있는 것들을 다시 보고 이어라. 저기 역사의 뒤편에서 말했던 이의 말에 감금되지 말고, 보는 것만으로 주섬주섬 섬겨라. 우리의 판단이 들어서고, 우리의 피로같은 어둠을 서로 더듬다가 저편에 나만이 아니라 너가 있다는 것이 설핏느낄 때 희망은 생겨나는 거다. 우회하고, 나눠지는 갈래를 살펴라. 판단하지 말고 살펴라. 학문은 애초나눠진 것이 없다. 그 바닥까지 느껴라.

 

12월 12일. 십이월 십이 일.

 

"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 이 속에서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스무살 청년 이상에게 소설은 이런 것이었다. 책은 얼어붙은 바다를 가르는 도끼라고 한 카프카처럼... ... [십이월 십이 일]은 다가오는 화살이다. 점점 뜨겁게 조준되어 오는 불화살이다. 여울 생일날은 이렇게 새까맣게 타서 새해의 불쏘시개로 쓴다.

 

책마실 중이다. 책들이 이렇게 불꽃처럼 한꺼번에 다가서는 것인지, 자칫 정신을 잃을 듯 싶다.

 

 

 

 

 

 

 

 

 

 

 

이반 일리히의 유산 

정여울의 내 마음속의 도서관

 

 

내가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고를 때가 있다. 오스트리아 신학자 이반 일리히(1926~2002)의 <이반 일리히의 유언>이 그랬다.

 

 

이 책은 서구문명을 구조화한 핵심 열쇳말들-복음·신비·우연성·범죄·두려움·학교·병원 등을 출발점 삼아 일리히의 평생에 걸친 사유의 여정을 장대한 파노라마로 펼쳐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열쇳말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불꽃은 ‘사랑’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열망의 비겁함을 깨달았다. 나는 내 결핍을 채워주고, 내 불안을 잠재우는 감정이 사랑이라 믿었다. 한 번도 나를 파괴하는 사랑에 몸담아 본 적이 없다. 그런 감정이 다가올 때마다 용케도 잘 피하며 이런 위험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부정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본디 나였던 나, 나라고 믿었던 나를 파괴하는 사랑이야말로 내가 한 번도 끝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유언>을 통해 내게 소중한 세가지 단어의 정의를 완전히 바꾸었다. 바로 믿음·우정·이웃이다. 첫째, 믿음. 나는 믿음이 불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나약한 감상의 일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일리히에 따르면, 믿음이야말로 ‘가장 바보같은 인식’임과 동시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이다. 인간은 바로 그 조건 없는 믿음의 목소리를 잃어왔기에, ‘최선의 것이 타락하여 최악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다. 이 ‘최선의 것’이란 곧 기독교 문명이다. 둘째, 우정. 우정이란 나의 결점을 말없이 받아주고, 나의 장점을 질투 없이 예찬하는 상대방의 선의라 믿었다. 그런데 일리히의 우정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단 한 번 마주친 이에게 내 모든 마음을 내줄 수 있는 용기. 낯선 타인과의 사소한 우연을 뜻밖의 연대로, 눈부신 기적으로 만드는 삶의 기예다. 너와 나 사이에 제3자를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환대의 능력이다. 셋째, 이웃. 그에 따르면, ‘이웃’을 생각할 때 특정한 얼굴이 떠올라선 안 된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일지라도, 그 아픔을 반드시 알아봐야 하는 타인. 내 아픈 시선을 기다리는 완전한 타인. 그것이 이웃이다. 나는 얼마 전, 길바닥에서 폐지를 주우며 말라비틀어진 식빵과 물을 드시는 할머니를 보았다. 그때 마침 나는 맛 좋은 돼지갈비를 먹고 만족스런 얼굴로 음식점을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핏기 없는 얼굴과 마주친 뒤, 하복부에 격심한 고통을 느꼈다. 일리히에 따르면, 바로 이 ‘하복부의 고통’이 구원의 열쇠다. 온몸을 통해 느끼는 타인의 존재, 곧 내가 돌봐야 할 이웃의 얼굴을 인지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일리히는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낼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고, 10여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손대지 않은 학문 분야가 거의 없었지만, 모든 특권을 포기했다. 온 세상을 떠돌며 오직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교회·믿음·세상이 구원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실천했다. 나는 그를 통해 나를 언제나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을 느낀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휘감을 때, 나는 문득 내 아픈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낀다. 내가 상상도 못하는 아픔으로, 내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걸어가는 누군가의 슬픈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내게 사랑은 단념이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다. 이제 내게 사랑은 절제다. 나를 가장 기쁘게 해주는 바로 그것이 없어도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아픈 사랑은 오직 완전한 단념과 절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가 없는 모든 곳에서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용기. 누군가를 어떤 희망도 없이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까지.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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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난 새해!! 만나요!! 이렇게는 말구 오프라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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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로사회, 도핑사회의 전단계로 성과사회
    from 木筆 2013-01-06 12:34 
    사색의 삶 깊은심심함 - 향기를 시각화하는 데는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사색의 능력이 반드시 영원한 존재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34 컴퓨터는 긍
  2.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from 木筆 2013-01-06 14:43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좌파는 아직 철저하게 바닥까지 떨어지는 위기를 맞지 않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제 친구 알랭 바디우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바디우가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죠.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20세기 이래 지속되어온 좌파가 비록 영광스러운 순간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절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중략) 문제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종말을 향
  3.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만 제기한 것일까?
    from 木筆 2013-01-09 13:35 
    미래가 보내는 징후 그러나 지켜보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대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의 친누이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보낸 편지다. - 프랑스 혁명

 

뱀발. 절대 이런 일은 있어서도 일어나서도 되지 않는다. 민생현장의 중심, 홀로가 아닌 조직과 단체를 찾아나서야 한다. 비정규직 노조와 노동단체와 전교조와 방송국과 그 숱한 사연과 비극이 있는 사람책을 만나러 나서야 한다. 그 사람책을 읽고 느끼지 못하는 순간, 개연성없는 정치가 낳은 비극과 불화는 온 국민의 몫이 될 수 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순간, 가장 많은 권력과 가장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그대가 박근혜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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